영실서 떨어진 해발 1370m에 위치
탐라시대부터 이용된 것으로 추정
추위-비바람 피하는 최적의 장소로
훼손되기前 역사적 가치 규명해야
한라산국립공원의 숨겨진 유적 자원 가운데 하나인 ‘수행굴(修行窟)’이 무분별한 탐방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탐라시대부터 이용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행굴의 유래와 용도 등을 규명하는 종합적인 학술조사가 이뤄지기도 전에 각종 유물이 사라지기까지 하고 있다.
● 유물유적 훼손 심각
17일 오전 제주도세계유산본부와 제주대 박물관 등과 함께 답사한 수행굴 현장은 한라산 명승인 영실을 따라 올라가는 영실탐방로와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어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과거 벌목꾼이나 목동, 약초꾼들이 다녔을 만한 오솔길 흔적을 따라가다 제주조릿대 숲으로 우회하니 가까스로 해발 1370m의 수행굴 입구에 다다랐다. 굴 입구는 옴팡진 곳에 있어 자칫하면 지나치기 쉬웠다. 제주조릿대로 뒤덮인 굴 외부는 개서어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굴 입구는 어른 1명이 허리를 굽혀서 들어갈 정도의 크기인데 막상 안으로 진입해 보니 허리를 펴고 서도 천장이 닿지 않았다. 내부는 돔형으로 10여 명이 기거하기에 충분한 공간으로 보였다. 굴 입구에서 끝까지는 10여 m, 좌우로는 20m 정도 됐다. 바위 그늘이라고 하기에는 길이가 길고, 동굴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짧게 느껴졌다. 굴 끝부분에 뼈 모양이 선명한 길이 70cm가량의 동물 사체가 보였다. 최근까지 누군가가 이용한 흔적으로 보이는 초 2개가 바위틈에서 발견됐다.
굴 바닥에서 기왓장 조각 10여 개와 옹기 조각이 발견됐고 깨진 소주병 조각도 나왔다. 바닥을 파내서 고른 흔적도 있었다. 문제는 수년 전에 발견됐던 토기가 사라진 것이다. 제주대 박물관 관계자는 “3세기경 탐라시대 유물로 추정되는 토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며 “토기는 수행굴의 역사를 추정할 만한 귀중한 자료”라고 말했다.
● 수행굴 학술조사 필요
수행굴은 조선시대부터 기록에 등장한다. 안무어사로 제주에 도착해서 산신제를 지내기 위해 1601년 한라산을 오른 김상헌(1570∼1652)이 남긴 ‘남사록’에 수행굴에 대해 ‘굴중가용이십여인(窟中可容二十餘人) 고유고승(古有古僧) 휴량(休糧) 입서지처야(入棲之處也)’라는 기록이 있다.
이를 두고 그동안 ‘굴속에 20여 명이 들어갈 만하다. 옛날 고승 휴량이 들어가 살던 곳이다’라고 해석됐지만 ‘쌀미(米)’자가 들어간 법명이 없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휴량’은 스님 이름이 아니라 쉬거나 기거했던 곳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 기록에 따라 2001년 굴이 발견될 당시 수행굴로 불렸다. 1901년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한라산 정상에 올라 높이 1950m를 측정한 독일인 지크프리트 겐테(1870∼1904)는 여행기에서 “벌목꾼들이 살고 있는 굴에서 하룻밤을 보냈다”고 회고했다.
수행굴에서 잉크병으로 추정되는 파편도 발견되면서 겐테가 머물렀던 굴로 추정됐지만 반론도 있다. 겐테 기록에 따르면 그가 머물렀던 굴은 해발 1070m이고 나무꾼 23명과 수행원 12명이 한꺼번에 들어가서 부엌을 따로 차릴 정도의 공간이었다. 수행굴과는 해발 고도에서 300m나 차이가 나고 굴 규모도 다르다는 지적이다.
강문규 전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장은 “한라산을 오른 이들이 추위와 비바람을 피하는 등 상당히 오랜 기간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다”며 “더 이상 훼손되기 전에 역사적 가치를 규명하기 위한 종합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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