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격수업에 멀뚱멀뚱…‘경계선 지능’ 아동 아시나요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4월 23일 1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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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날리지(Corona+Knowledge)] <6>

“얘들아~ 모니터 왼쪽 아래에 스피커 버튼을 눌러봐. 그걸 누르면 선생님 목소리가 들릴 거야”

“…….”

지난해 초, 경계선 지능 아동을 위한 수도권의 한 대안학교 수업 시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으로 원격수업이 진행되던 중 한 학생이 화면에서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알려왔습니다. 선생님은 전화로 해결법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왼쪽 아래’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한 아이는 그저 멀뚱멀뚱하게 앉아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옆에 있으면 손가락으로 짚어주면서 설명하면 될텐데 답답함이 물밀 듯 몰려오더라”고 말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원격수업 장기화는 기초학력 미달 문제를 교육계 수면 위로 끌어올렸습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장애와 비장애 사이에 선 경계선 아동의 이야깁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로 인한 원격수업이 장기화되면서 경계선 아동들이 사실상 ‘학교를 다니지 않은 것’보다 못한 상황이라고 지적합니다. 왜일까요?

●학교, 다녔지만 다니지 못했다


경계선 지능 아동은 지능지수(IQ)가 71~84 사이인 아이들을 의미합니다. 전체 인구의 약 13% 정도가 경계선 지능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25명의 학생이 있는 한 학급을 기준으로 하면 적어도 한 반에 3,4명은 경계선 아동일 가능성이 있는 셈이죠.

이들은 지적 장애로 구분되지는 않지만 장애 진단 기준에서 ‘지속적 관심과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대상’으로 분류됩니다. 경계선 아동은 또래에 비해 배움이 느려 맞춤형 학습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장애 아동은 아니기에 특수학교에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경계선 아동에게 대면수업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학습자극이 계속해서 주어지지 않을 경우 지능이 장애 수준까지 저하될 우려가 있어 교실에서 선생님과의 교감하며 꾸준한 지도를 받아야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코로나19로 원격수업이 진행되면서 경계선 아동의 실질적인 학습은 사실상 중단됐다는 점에 있습니다. 특수학교나 특수학급에 소속됐더라면 올해부터라도 매일 등교를 했겠지만 경계선 아동들은 일반 학급에 소속돼 있다보니 초1·2 학생이 아니면 대부분 지금도 등교수업보다는 원격수업을 받는 비율이 높습니다.

“최근에 ‘중간층이 실종됐다’는 기사들이 많이 나왔잖아요. 경계선 아동들은 더 심각한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원격수업을 하게 되면 경계선 아동들은 컴퓨터를 조작하는데 어려움을 겪어 소외될 확률이 높거든요. 계속 모니터를 보며 수업을 들어야 하다보니 집중력도 필요하고요. 그런데 이 아이들은 집중도가 비장애 아동에 비해 낮아요. 그러다보니 비대면수업을 하면 학습효과가 더 낮아질 수밖에 없는 거죠.” (김미옥 전북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경계선 아동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수도권의 한 대안학교 교사도 비슷한 문제를 지적합니다.

“평소엔 선생님이 바로 옆에서 지도하면서 모르는 내용을 알려주고 반복학습을 시킬 수 있어요. 그런데 원격수업이 진행되면 아이들과 소통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져요. 일반학급에 재학 중인 경계선 아동들은 더 심각할 겁니다. 작년에 많은 학교들에서 EBS동영상을 많이 틀어줬잖아요? 이 영상들은 비장애 학생 수준에 맞춰 제작됐어요. 이 아이들이 이해하기엔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죠.” (수도권의 한 대안학교 교사)

상황이 이러다보니 경계선 아동들에겐 ‘이상 징후’가 포착됩니다. 1년 넘게 학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학습능력과 자기관리 능력을 점차 잃어간 것인데요. 무기력하게 멍하니 앉아 하루를 보내기도 하고 며칠 동안 씻는 걸 거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한 경우 자해, 타해, 충동행동 등의 도전적 행동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낙인 우려에 진단·지원 어려워


‘선생님들이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경계선 아동도 원격수업에 충분히 적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서울 한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전하는 상황은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지금의 기초학력 검사로는 그냥 학습이 더딘 학생과 경계선 아동의 구분이 가지 않아요. 선생님들이 한참 관찰하다보면 이 학생이 경계선 아동인지 아닌지 어느 정도 파악하는 거죠. 그런데 학년이 올라가면 진단 결과가 인수인계 되질 않아요. 주관적인 평가다보니 혹여 새 담임에게 편견을 줄까봐 걱정되는 거죠.”

이러다보니 맞춤형 교육을 제공하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새로운 담임선생님이 또다시 상당 기간을 아이를 관찰하며 상태를 진단해야 하니 말이죠. 운 좋게 아이의 상태가 진단되면 학교 밖 센터 등에 연계해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도 쉽지가 않습니다.

“선생님이 기초학력 지도를 하다가 아이가 경계선 지능이라고 판단하는 경우에는 아이를 서울학습도움센터로 연계해서 지능검사를 받을 수 있어요. 근데 그 과정이 너무 어렵다고들 하세요. 부모님의 동의가 없으면 센터에 의뢰할 수가 없거든요. 아이가 겉보기에 큰 문제가 없는데 부모님한테 ‘아이가 지능이 낮은 거 같다’고 말해야 하는 거잖아요.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너무 부담스러운 것이죠.” (서울시교육청 관계자)

학생의 경계선 지능이 의심되는 경우 각 시도교육청의 학습도움센터 등에 의뢰해 지원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경계선 지능 의심 아동의 센터 연계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서울시교육청 블로그 캡처 화면.
학생의 경계선 지능이 의심되는 경우 각 시도교육청의 학습도움센터 등에 의뢰해 지원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경계선 지능 의심 아동의 센터 연계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서울시교육청 블로그 캡처 화면.


●기초학력, ‘사회적 책임’으로

전문가들은 현재의 기초학력 진단 검사 시스템 자체를 바꿀 필요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는 경계선 아동뿐만 아니라 모든 기초학력 미도달 학생을 위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제대로 된 진단이 있어야 그에 맞는 처방전도 나올 수 있기 때문이죠.

교육청 단위의 기초학력 진단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대표적입니다. 백순근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기초학력을 단위 학교 책임으로 넘기면 진단의 신뢰성과 타당성이 약해진다”며 “적어도 시도교육청 단위에서 책임감을 갖고 다양한 형태의 기초학력 지원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기초학력 진단이 이뤄진 후에 학습 부진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추가 검사를 진행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기초 학력 진단 검사를 1, 2차로 나누자는 건데요. 1차적으로 판별된 기초학력 미도달 학생 중 하위 30% 등 일부를 대상으로 2차 웩슬러 아동지능 검사(WISC)를 진행하자는 겁니다. 웩슬러 검사는 1946년 미국의 심리학자 데이비드 웩슬러가 만든 지능검사로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며 계량화된 비교 분석도 가능합니다.

기초학력을 지역 사회 차원에서 책임져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학습량이 부족하면 보충 학습 지도를, 심리적 문제가 있는 아이는 심리상담을, 경계선 지능 아동은 그에 맞는 맞춤형 교육을 지원하기 위해선 유기적으로 연결된 ‘지역사회 기초학습 지원망’이 필요하다는 거죠. 김경범 서울대 서어서문학과 교수는 “기초학력의 책임이 개별 학교로 떠넘겨지면서 학생들이 사실상 방치돼 있다”며 “학교, 지역아동센터, 의료기관 등 지역 사회가 협력하는 기초학력 기구가 신설돼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올해 1월 교육부는 신학기 업무보고에서 “국가기초학력지원센터 신설과 기초학력보장법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했죠. 하지만 지금까지 교육부 차원의 기초학력 대책은 ‘과밀학급 방역 대책’으로 파견한 협력 강사 외엔 마땅히 없는 상황입니다. 교육부의 슬로건이 ‘모든 아이는 우리 모두의 아이’인데, 지금보다는 나아져야 하지 않을까요?

이소정 기자 soj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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