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별 - 1화
[아무도 울지 않은 코로나 고독사]〈상〉배웅조차 받지 못한 그들
무연고 코로나 사망자 9명, 흔적의 퍼즐 맞추기
《코로나19로 세상을 떠난 1988명. 어느 하나 안타깝지 않은 죽음이 없다. 그중엔 홀로 떠난 이들도 있다. 무연고 코로나19 사망자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244개 광역·기초자치단체에 정보 공개를 청구해 전국에서 외로이 떠난 9명을 확인했다. 아무도 울지 않은 부고만 남긴 채 그들은 사라져갔다. 떠난 이는 말이 없다. 특히 무연고 사망자들은 흔적을 쫓기 힘들었다. 히어로콘텐츠팀은 3개월 동안 유족과 지인, 관계기관 등을 만나 기억의 파편을 재구성했다. 그 속엔 우리가 미처 보듬지 못한 삶의 심연이 담겨 있었다.》
아무도 배웅하지 못한 죽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확진돼 숨을 거둔 ‘무연고 사망자’ 중에는 50대 남성이 2명 있다. 한창 사회활동을 이어갔을 나이.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았다면 ‘아버지’라 불렸을 이들. 하지만 고인들의 마지막 길에 슬퍼하는 가족은 없었다. 자리를 지킨 건 방호복을 입은 직원뿐. 고인은 유골함에 담겨 봉안소에 안치됐다.
#1. 693번째 코로나19 사망자
지난해 11월 22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고시원에서 홀로 지내던 류석환(가명·58) 씨는 병원을 찾았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데 코로나19 확진자가 빠르게 늘어나자 불안을 느꼈다. 의료진 권유로 코로나19 검사를 받았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류 씨는 다음 날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고 중구 국립중앙의료원으로 이송됐다. 치료 초기부터 심한 호흡곤란 증세를 보였다. 길어지는 입원 기간, 나아지지 않는 병세. 12월 어느 날. 류 씨는 휴대전화를 붙잡고 없는 힘을 짜내 말문을 열었다. 자신이 머물던 고시원 원장이었다.
“원장님. 미안합니다. 괜히 제가 코로나19에 걸려 고시원에 큰 피해를 끼쳤네요.”
“선생님이 뭘 잘못해 걸린 게 아니잖습니까. 걱정 말고 건강히 돌아오세요.”
극심한 고통에도 남들에게 사과부터 했던 류 씨. 원장이 그와 나눈 대화는 그게 마지막이었다. 12월 20일 오후 류 씨는 병원에서 홀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코로나19. “왕래가 없었다”던 류 씨의 형제는 시신 인수를 거부했다.
2021년 1월 1일 새해 첫날.
고인은 지켜보는 유족도 없이 홀로 화장됐다. 경기 파주시 용미리 서울시립공원묘지의 ‘무연고 사망자 추모의 집’에 안치됐다.
류 씨의 남동생은 뒤늦게 형이 살던 고시원 방을 찾았다. 값어치 있는 몇 가지 물건만 정리하고는 나머지 유품들은 원장에게 처리를 맡겼다.
“형과는 오랫동안 연락이 두절됐어요. 정이 있는 상태가 아니었어요.”
남동생은 그저 이 말만 남기고 떠났다. 봉안소에 있는 형의 유골함도 찾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고인의 방 안에선 명함이 수백 장 나왔다. 서울 강서구에 있는 한 중소기업 회사명과 ‘관리부장’이란 직함이 적혀 있었다. 류 씨는 이 회사에 다니다가 일자리를 잃은 뒤 지난해 11월 기초생활수급자(주거급여)로 등록했다.
“다녔던 직장을 자랑스럽게 여기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일을 더 못 다니게 됐으니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에요. 정말 성실하고 착한 분이셨는데…. 참 안됐지.”
원장이 기억하는 류 씨에 대한 얘기는 그게 다였다. 회사 쪽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무연고 사망자 류 씨는 그렇게 지워졌다.
#2. 125번째 코로나19 사망자
“저기요, 아무도 안 계시나요?”
지난해 3월 18일. 대구 동구의 다세대주택 2층. 집 밖에서 사람 찾는 목소리가 이웃집까지 들렸다. 소리를 지른 이는 인터넷 설치기사. 전화 연결도 되지 않자 설치기사는 조심스레 문을 열어봤다. 스스로 열리는 문. 방 안에는 김동석(가명·53) 씨가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설치기사는 다급히 119로 전화했다. 구급대가 김 씨를 발견한 시간이 오후 1시 10분. 다행히 숨을 쉬고 있었다. 근처 병원으로 이송된 김 씨는 곧장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대구 경북에서 코로나19 1차 대유행이 발생했던 때였다. 김 씨가 언제 의식을 잃었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김 씨는 엿새 뒤인 24일 숨을 거뒀다. 부모는 세상을 떠난 상태. 미혼에 자녀도 없었다. 가까스로 연결된 형제의 반응은 차가웠다.
“어머니가 다른 형제입니다. 연락도 끊긴 지 오래예요.”
뒤이어 연락이 닿은 고모 역시 “직접 장례를 치르기 어렵다”고 했다. 김 씨는 25일 화장돼 경북 칠곡군 대구시립공원묘지 ‘무연고 사망자 추모의 집’에 안치됐다.
김 씨가 살던 방은 고모가 정리했다. 작은 트럭 1대 분량의 유품이 나왔다. 고모는 집주인에게 짧은 얘기만 남기고 떠났다.
“조카와는 명절 때나 한 번씩 봤어요. 어떻게 생활했는지도 잘 몰랐어요. 친누나도 있는데 서로 연락을 안 하고 지냈다고 합디다.”
홀로 남겨진 류 씨의 유골. 그의 친누나가 유골을 인수한 날은 2021년 5월 4일. 김 씨가 숨진 지 1년 1개월이 지나서였다.
“일이 바빠서 올 수가 없었어요. 코로나19 확산세가 심해져서 더 조심스러워서….”
이웃 중에도 김 씨의 일생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었다. 홀로 살며 일용직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다는 게 기억의 전부였다. 그와 관련해 남아 있는 공적 기록도 거의 없었다.
김 씨의 집이 보이는 맞은편 건물에 사는 주민. 그가 전해준 쓸쓸함만이 고인에 대한 추억의 전부였다.
무연고 코로나 사망 9명중 5명, ‘밀집 수용’ 정신질환 시설서 나와
다른 4명은 고시원 등 1인 가구
국내에서 발생한 ‘무연고 코로나19 사망자’ 9명 가운데 5명은 정신질환 치료시설에 머물고 있었다. 모두 건강이 나빴고 오랜 기간 생활고를 겪은 기초생활수급자였다.
올 1월 숨진 경영수(가명·64) 씨와 김창덕 씨(68), 노정현(가명·64) 씨는 충북 음성군 음성소망병원에 장기 입원 중이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이영 의원이 중앙방역대책본부 등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2월부터 이 병원에선 환자 150명이 코로나19에 확진됐다.
3명이 세상을 떠난 뒤 음성군은 법적인 유족에게 시신 인계를 요청했다. 모두 개인 사정을 이유로 거부했다. 한 유족은 “전혀 관여하기 싫다”며 전화를 끊었다. 이들은 무연고 코로나19 사망자로 화장된 뒤 화장장에 뿌려지거나 봉안소에 안치됐다.
지난해 3월 30일 확진된 박성남(가명·78) 씨와 강형수(가명·74) 씨는 대구 달성군의 정신질환 치료시설 제2미주병원에 있었다. 이곳도 집단감염 발생 뒤 환자 195명이 확진됐다.
박 씨는 4월, 강 씨는 5월에 숨졌다. 둘 다 서류상 가족은 남아 있지 않았다. 국가인권위원회는 4월 발간한 ‘정신장애인 인권보고서’에서 “대규모로 수용하는 치료 방식을 개선해야 집단감염 등을 예방할 수 있다”고 짚었다.
나머지 무연고 사망자 4명은 홀로 사는 1인 가구였다. 김동석(가명·53) 씨와 김은숙(가명·67) 씨는 다세대주택에서 지내다 코로나19에 확진됐다. 고시원 독방에 살던 류석환(가명·58) 씨는 병원에서 확진 판정을 받고 치료 중 숨졌다. 누구도 코로나19에 감염된 뒤 ‘보호자’에 이름을 올릴 가족이 없었다.
다만 서울 양천구 다세대주택에 살았던 이연자(가명·86) 씨는 실제로는 함께 지낸 이가 있었다. 딸이지만 법적으로 가족관계가 아니었다. 지난해 9월 1일 코로나19 확진 당시 딸도 밀접 접촉자로 분류돼 이 씨의 시신을 인계하지도 장례를 치르지도 못했다.
딸은 이 씨의 유해를 “알아서 처리해 달라”고 했고, 무연고 사망자로 경기 성남시 화장장에 뿌려졌다.
::히어로콘텐츠팀:: ▽총괄 팀장 : 지민구 기자 warum@donga.com ▽기사 취재: 이윤태 김윤이 이기욱 기자 ▽사진 취재: 송은석 기자 ▽그래픽: 김충민 기자 ▽편집: 한우신 기자 ▽프로젝트 기획: 이샘물 이지훈 기자 ▽사이트 제작: 디자인 이현정, 퍼블리싱 조동진, 개발 최경선
‘고별-아무도 울지 않은 코로나 죽음’ 디지털페이지(original.donga.com/2021/covid-death1)에서 더 많은 영상과 기사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익스플로러 브라우저는 지원하지 않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