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울지 않은 코로나 고독사…아버지의 마지막 흔적 [고별 2화]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6월 15일 16시 00분


1평 고시원 방에서 홀로 숨진 아버지…사후 확진 판정
어릴 적 떠난 아버지 원망하며 가난하게 자란 삼형제
세상 떠난 뒤에야 삼 형제 품에 안긴 79세 아버지


강정식(가명) 씨는 1월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추모공원에서 큰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장됐다. 강 씨의 시신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후 확진 판정을 받고 장례 의식도 치르지 못한 채 화장장으로 옮겨졌다. 그의 관이 놓여 있었던
 화장 시설을 취재기자가 응시하고 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강정식(가명) 씨는 1월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추모공원에서 큰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장됐다. 강 씨의 시신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후 확진 판정을 받고 장례 의식도 치르지 못한 채 화장장으로 옮겨졌다. 그의 관이 놓여 있었던 화장 시설을 취재기자가 응시하고 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39호! 영감님! 안에 계세요? 문 좀 열어보세요!”

서울 동대문구의 한 고시원. 이영숙(가명) 원장이 아무리 불러 봐도 4층 39호실 주민 강정식(가명·79) 씨는 여전히 기척이 없다. 2021년 1월 11일 월요일. 고시원은 오전부터 시끄러웠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이곳마저 덮쳤다. 35호실에 사는 주민이 확진됐다는 소식이 전달됐다. 이 원장은 고시원의 모든 방을 다니며 말했다.

“우리 고시원도 확진자가 나왔대. 다들 검사받으러 가셔야 해.”


39호실 강 씨만 오전부터 고시원에서 보이지 않고 반응이 없다. 이 원장은 불길한 예감에 문을 힘껏 밀어본다. 아주 좁은 틈새로 안쪽 풍경이 보였다. 핏기가 없는 강 씨의 손이 보였다. 손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 원장이 손을 뻗어 만진 강 씨의 손은 싸늘했다.

강정식 씨는 고시원 원장의 신고로 1월 11일 오후 6시 20분 1평 남짓한 방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강 씨가 지낸 곳에는 
이미 다른 주민이 거주해 같은 구조의 다른 방만 확인할 수 있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강정식 씨는 고시원 원장의 신고로 1월 11일 오후 6시 20분 1평 남짓한 방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강 씨가 지낸 곳에는 이미 다른 주민이 거주해 같은 구조의 다른 방만 확인할 수 있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깜짝 놀란 이 원장. 그는 다급하게 휴대전화를 꺼내 119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신고 시간 오후 5시 59분. 구급대원들이 5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아무리 밀어도 39호실의 문은 꼼짝하지 않았다. 결국 고시원 복도로 난 창문을 뜯고 진입했다. 발견 시간 오후 6시 20분. 이미 강 씨는 숨이 끊긴 상태였다. 향년 79세. 강 씨는 1평 남짓한 고시원 방에서 홀로 눈을 감았다.

시신은 병원으로 옮겨졌다.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한 공간에서 숨을 거둔 만큼 검사부터 진행됐다. 다음 날 확진 판정이 나왔다. 부검이나 역학조사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밀접 밀폐 밀집 등 이른바 ‘3밀’ 환경인 고시원에선 강 씨를 포함해 6명의 확진자가 나왔다.

10일 늦은 시간까지 기척이 들렸다는 옆방 주민의 진술에 따라 사망 일시는 ‘11일 0시 추정’으로 남았다. 숨진 뒤 18시간이 지나서야 발견된 ‘코로나19 고독사’였다.

46년 전 떠난 아버지가 ‘코로나 사망자’로 돌아왔다

2021년 1월 12일 화요일 오후. 강상준(가명·50) 씨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혹시, 강상준 선생님이 맞으실까요?”

“네, 제가 맞습니다.”


주민센터입니다. 아버님이 강정식 선생님이시죠? 부친께서 어제 오후에 홀로 계시다가 소천하셨습니다.”

상준 씨는 “아…”라고 입을 떼다 한참 뜸을 들였다. 아버지란 단어를 입에 담아 불러보는 게 얼마 만인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지내다가 떠나셨습니까?”

“돌아가시기 전까지 고시원에서 혼자 지내셨어요.”


고시원에선 강정식 씨를 포함해 총 6명의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와 2주간 폐쇄됐다. 동대문보건소가 고시원 입구에 붙인 ‘일시적 폐쇄 명령서’가 남아 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고시원에선 강정식 씨를 포함해 총 6명의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와 2주간 폐쇄됐다. 동대문보건소가 고시원 입구에 붙인 ‘일시적 폐쇄 명령서’가 남아 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상준 씨는 당황스러웠다. 덤덤했고, 슬픈 기분은 들지 않았다. 아버지는 46년 전 어머니와 삼 형제를 떠났다. 상준 씨 기억에 아버지는 한 번도 가족들을 따뜻하게 안아준 적이 없었다. 그런 아버지가 혼자 세상을 떠났다고 했을 때, 상준 씨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1975년 어느 날. 아버지가 집을 떠났다. 당시 상준 씨는 네 살, 남동생은 갓 돌을 지났을 때였다. 이혼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아버지가 서울로 갔다는 것만 어렴풋이 들었다. 어머니도 삼 형제를 키울 상황이 안 됐다. 충남 논산시에 남은 삼 형제는 결국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떠나고 삼 형제는 가난하게 자랐다. 할머니는 논에서 이삭을 주워가며 손자들을 거둬 먹였다. 상준 씨의 형은 차비를 아끼기 위해 10km 거리의 등굣길을 고물 자전거로 다니며 버텼다. 아버지가 가끔씩 보내준 적은 액수의 생활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삼 형제는 가족을 떠난 아버지를 원망하고, 또 미워하며 자랐다.

2009년 1월 늦은 밤. 강 씨는 조심스럽게 몸을 뉘었다. 그동안 본 적이 없었던 낯선 천장. 키가 180cm에 가까운 강 씨의 발가락 끝에 고시원 벽이 닿을 듯 말 듯했다. 예순일곱 나이에 맞이한 비좁은 고시원에서의 첫날. 추위를 뚫고 구로구에서 동대문구까지 홀로 무거운 이삿짐을 날랐다.

수중에 돈이라곤 없었다. 직장에서의 은퇴 뒤 두 번째 이혼. 강 씨는 당장 첫 달 월세 23만 원이 없어 친구에게서 빌렸다. 다 큰 삼 형제에겐 손 벌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월 20만~30만 원의 기초연금으로 버티면서 간혹 친구를 통해 일거리를 구해 월세와 생활비 등을 충당했다.

강정식 씨가 셔츠와 정장 세탁을 자주 맡겼던 서울 동대문구 세탁소. 그는 노년에 고시원에서 홀로 생활하면서도 항상 다림질한 셔츠와 정장을 갖춰 입고 다녔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강정식 씨가 셔츠와 정장 세탁을 자주 맡겼던 서울 동대문구 세탁소. 그는 노년에 고시원에서 홀로 생활하면서도 항상 다림질한 셔츠와 정장을 갖춰 입고 다녔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외딴 섬’ 고시원에서 홀로 몸부림쳤던 아버지

홀로 시작한 고시원 생활은 생각보다 더 괴로웠다. 고시원은 ‘외딴 섬’이었다. 방에서 홀로 누워 있으면 외로움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강 씨는 그럴수록 더 몸부림쳤다. 아침마다 장을 봐 직접 요리를 해먹었다. 꼭 세탁소에서 다림질한 셔츠와 정장을 갖춰 입고 외출했다. 고시원 근처 청과물 가게에서 싸게 내놓은 과일을 가끔씩 사와 고시원 주민들에게 나눠주며 인사를 건넸다. 외딴 섬 고시원에서 느끼는 노년의 외로움을 이렇게 달래곤 했다.

“강 선생님이 딸기 같은 것을 잔뜩 가져오셔서 나눠주면 총무나 주민들이 좋아했어요. 고시원에서 신선한 과일을 먹기가 쉽지 않잖아요. 고시원에서 지내는 20대 학생들은 아예 강 선생님을 ‘키 큰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꾸벅 인사를 했죠. 총무들도 ‘선생님’이라고 하면서 잘 따랐고요.”(당시 고시원의 이신우 실장)

“고시원에 오시는 여느 분과는 좀 달랐어요. ‘순둥이’라고나 할까. 점잖으시고, 남한테 폐 끼치는 행동은 절대 안 하셨어요. 언젠가 넌지시 자녀 얘기를 에둘러 꺼내신 적도 있긴 해요. 왠지 남모를 아픔이 느껴져 자세히 여쭤보진 못했죠.”(당시 고시원의 김종근 원장)

강정식 씨가 자주 들렀던 고시원 근처 청과물 가게 앞. 강 씨는 이곳에서 산 과일을 고시원 주민들에게 나눠주며 먼저 인사를 건네곤 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강정식 씨가 자주 들렀던 고시원 근처 청과물 가게 앞. 강 씨는 이곳에서 산 과일을 고시원 주민들에게 나눠주며 먼저 인사를 건네곤 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세월은 강 씨와 삼 형제의 관계를 돌려놓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와 아들들은 가끔 안부 전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저 오가는 형식적인 말이 대부분이었다. 서로에게 진심을 담은 따뜻한 말은 건네지 못했다. 상준 씨는 아버지가 고시원에서 혼자 생활한다는 걸 알게 된 뒤 고심 끝에 동생에게 털어놨다.

“그래도 아버지인데, 우리가 용돈이라도 모아서 보내드리자.”

동생의 반응은 생각보다도 더 차가웠다.

“글쎄요, 형. 전 좀 생각해볼게요.”


상준 씨는 처음에는 동생에게 화도 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마음이 이해가 됐다. 동생이 말도 떼기 전에 떠난 아버지. 힘들 때 곁에 없었던 아버지. 동생에게 아버지에 대한 정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아버지 없이 커서 삶이 팍팍했어요. 세상살이에 지치기도 많이 지쳤고요. 2016년 영등포역 근처에서 얼굴 뵌 게 마지막이었어요. 누굴 돌볼 여력조차 없었습니다.” (상준 씨)

2020년 12월 20일 일요일. 강 씨는 12년을 보낸 고시원을 떠났다. 건물의 재개발 결정으로 모든 주민들이 쫓겨나듯이 나와야 했다. 어렵사리 찾은 동대문구의 다른 고시원. 살던 곳보단 낡고 퀴퀴했지만 강 씨는 비슷한 월세에 만족했다. 그는 처음 고시원에 들어올 때처럼 추위 속에서 쓸쓸히 무거운 이삿짐을 날랐다.

일흔여덟의 나이. 강 씨는 다시 낯선 천장을 마주했다. 좁디좁은 방과 어두운 복도. 그리고 새로운 고시원 주민들. 하지만 강 씨가 이곳에서 머물 수 있었던 기간은 3주밖에 안 됐다.

강정식 씨가 생전에 3주간 머물렀던 고시원의 복도. 복도는 성인 남성 1명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비좁고 어둡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강정식 씨가 생전에 3주간 머물렀던 고시원의 복도. 복도는 성인 남성 1명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비좁고 어둡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고인이 떠난 곳에 남은 건 박카스 10병과 동전 뭉텅이 뿐

2021년 1월 13일 오후 5시경. 서울추모공원에는 전날 내린 흰 눈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시간이 지난 뒤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일반 사망자의 화장이 모두 끝난 뒤, 코로나19 사망자의 화장 절차를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아버지의 유골을 수습하기 위해 상준 씨의 형(52)이 대전에서 이곳을 찾았다. 코로나19 감염 우려 탓에 큰아들은 아버지의 시신을 가까이 지켜볼 수도 없었다. 그래도 큰아들은 1시간 넘게 자리를 지켜 아버지의 유골을 직접 품에 안았다. 이미 오래전 삼 형제에게서 멀어진 아버지를, 이제는 영영 떠나보내기 위해.

강 씨가 머문 고시원 39호실에 설치됐던 폴리스라인은 일주일이 지나자 경찰이 거둬갔다. 삼 형제는 아버지가 살았던 고시원을 찾지 않았다. 고시원에서 여러 명의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해 갈 수도 없었다. 삼 형제는 아버지의 유품을 직접 정리하지 않겠다는 뜻을 동대문구와 보건소 측에 전달했다.

강 씨가 남기고 떠난 흔적은 방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영숙 고시원장은 강 씨의 유품을 하나씩 자루에 담았다. 바닥과 침대에 널브러진 옷가지와 각종 서류들. 10원, 50원짜리 동전 뭉텅이. 먹다 남은 채로 까맣게 썩은 밥그릇.

강정식 씨가 살았던 고시원 방 안 모퉁이엔 박카스 빈 병 10개가 남아있었다. 옆 방 이웃에 따르면 강 씨는 기침 증세를 보일 때 박카스를 마셨다고 한다. 그래픽=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강정식 씨가 살았던 고시원 방 안 모퉁이엔 박카스 빈 병 10개가 남아있었다. 옆 방 이웃에 따르면 강 씨는 기침 증세를 보일 때 박카스를 마셨다고 한다. 그래픽=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강 씨에게 무엇이 소중한 물건이었는지, 또 세상에 남기고 싶은 게 있었는지. 이 원장은 알 길이 없었다. 남은 이는 죽은 자의 흔적을 모두 쓸어 담고 정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방 안 모퉁이에서 박카스 빈병 10개가 나왔다. 강 씨가 마시고 남은 흔적이었다.

“강 씨가 떠나기 전에 유독 기침소리가 컸어. 자다가 다들 깰 정도로 자주 기침을 했지. 그러면서 박카스를 엄청 마시더라고. 딱히 약을 먹거나 병원에 다니는 것 같진 않았어. 박카스가 어쩌면 그 사람이 유일하게 건강을 챙기는 수단이 아니었을까.”(옆 방 38호실 이웃)

“당황스러웠어요.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단 전화를 받았을 때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결국 이렇게 떠나셨구나….’ 이 생각뿐이었어요.”

상준 씨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소식을 전달받은 날을 떠올리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어렸을 때부터 최근까지 저희는 아버지와 ‘정’을 나눈 기억이 없어요.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죠. 같이 찍은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거든요. 저희에게 남은 건, 아버지 유골이 담긴 네모난 상자뿐이었어요. 그걸 보니 가슴 한쪽이 먹먹해지더라고요. 이게 제가 느낀 감정의 전부였어요. 아버지가 떠난 뒤, 저는 무엇을 슬퍼해야 하는 걸까요.”

강정식 씨가 화장된 서울 서초구 서울추모공원 내부의 전광판. 강 씨가 화장된 날에는 그의 큰아들이 이곳에 와 아버지의 유골을 인계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강정식 씨가 화장된 서울 서초구 서울추모공원 내부의 전광판. 강 씨가 화장된 날에는 그의 큰아들이 이곳에 와 아버지의 유골을 인계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코로나19가 아니었어도 강 씨와 삼 형제의 관계는 회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들의 뒤틀린 관계는 46년 전부터 이어져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코로나19만 없었다면 조금 더 먼 훗날에 아버지와 아들들은 함께 만나 웃으며 정을 나눌 수 있는 순간이 찾아왔을까. 강 씨는 삼 형제와 손자, 손녀들을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었을까.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코로나19가 실낱같은 가능성마저 없애버렸을 뿐이다.

사망 후 확진 판정을 받은 강 씨의 유골은 어린 시절 삼 형제와 함께 살았던 충남 논산에 조용히 안치됐다. ‘서울 2만1915번 확진자’란 이름으로 기록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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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괄 팀장 : 지민구 기자 warum@donga.com
▽기사 취재:
이윤태 김윤이 이기욱 기자
▽사진 취재: 송은석 기자
▽그래픽: 김충민 기자
▽프로젝트 기획: 이샘물 이지훈 기자
▽사이트 제작: 디자인 이현정, 퍼블리싱 조동진, 개발 최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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