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한 고시원. 이영숙(가명) 원장은 한참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4층 39호실에 머무는 강정식(가명·79) 씨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1월 11일 월요일. 이날 고시원은 오전부터 시끄러웠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이곳마저 덮쳐왔기 때문. 35호실 남성의 확진 소식이 알려진 뒤, 이 원장은 층마다 돌아다니며 문을 두드렸다.
“우리 고시원도 확진자 나왔어요. 다들 검사 받으러 가셔야 해.”
그런데도 유독 39호실은 꼼짝하질 않았다. 오후가 지나도록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 강 씨. 그의 방은 이상하리만치 적막했다. 불길한 예감. 이 원장은 힘껏 문을 밀었다. 겨우 열린 틈새로 1평 남짓한 크기의 방 안 풍경이 엿보였다. 거기엔 한눈에도 미동조차 없는 강 씨의 손이 있었다.
이 원장은 가슴이 덜컥했다. 손을 뻗어 가까스로 닿은 육체는 싸늘히 식어 있었다. 마음을 다잡고 119로 신고한 시간이 오후 5시 59분이었다.
약 5분 만에 도착한 구급대원들. 여전히 39호실 문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복도에 난 창문을 뜯고 진입했다. 발견 시간 오후 6시 20분. 강 씨는 숨이 끊긴 지 오래였다.
병원으로 옮겨진 시신. 곧장 코로나19 검사부터 진행했다. 결과는 ‘사망 후 확진’. 방역수칙에 따라 부검도 역학조사도 불가능했다. 어떤 경위로 강 씨가 코로나19에 걸렸는지, 사인이 코로나19가 맞긴 한지 밝혀낼 수 없었다.
그나마 단서는 “10일 늦은 밤까지 소리가 들렸다”는 옆방의 진술. 사망 일시는 ‘11일 0시 추정’으로 남겨졌다. 방 수십 개가 촘촘히 붙어 있으나 서로 외딴섬이던 고시원 1인실. 강 씨는 숨을 거둔 뒤 최소 18시간이 지나 발견된 ‘코로나19 고독사’였다.
하지만 고인은 원칙적으로는 코로나19 고독사도, 무연고 사망자도 아니다. 그저 n번째 코로나19 사망자다. 수십 년간 왕래가 끊겼던 아들들이 시신을 인수해 무연고에서 제외됐다. 게다가 강 씨가 떠나던 시점엔 ‘법적으로’ 고독사를 규정할 근거가 없었다.
정부가 고독사 통계 작성과 실태조사를 의무적으로 진행하도록 한 ‘고독사 예방 및 관리법’은 약 3개월 뒤인 4월 1일부터 시행됐다. 서울시에 따르면 지난해 고독사 의심 사례는 667명. 이 역시 추산에 그치며 정확한 통계 수치는 아니다.
이렇다 보니 법 시행 전인 3월 말까지 코로나19로 숨진 1735명 가운데 강 씨 같은 고독사가 또 있는지는 파악조차 불가능하다. 그저 유족이 시신을 거두지 않은 코로나19 무연고 사망자 9명만 확인될 뿐이다. 역병(疫病)에 휩쓸려 홀로 마주한 죽음은 기록도 남지 않은 채 스쳐 지나가버렸다.
당황스러웠다. 솔직히 놀라거나 눈물이 나진 않았다. 아버지는 46년 전 어머니와 삼 형제를 떠났다. 한 번도 우리를 따뜻하게 안아준 적 없었다. 그런 당신이 혼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감이 서질 않았다.
1975년 어느 날. 집을 나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상준 씨는 네 살, 남동생은 갓 돌을 지났을 때였다. 이혼이 뭔지도 몰랐다. 서울 가셨단 얘기만 어렴풋이 들었다. 어머니는 홀로 삼 형제를 키울 여건이 안 됐다. 아이들은 충남 논산에서 할머니 손에 자랐다.
아버지의 부재는 당연한 듯 가난으로 이어졌다. 할머니는 논에서 이삭을 주워 손자들을 거둬 먹였다. 상준 씨의 형은 차비를 아끼려 10km가 넘는 등굣길을 고물 자전거로 버텼다. 배가 불러본 기억조차 없는 밤들. 형제들은 아버지를 원망하고 미워했다.
2009년 1월 늦은 밤.
강정식 씨는 조심스럽게 몸을 뉘었다. 낯선 천장. 키가 180cm 가까운 강 씨 발끝에 벽이 닿았다. 예순일곱에 맞이한 비좁은 고시원 첫날. 추위를 뚫고 구로구에서 동대문구까지 혼자 이삿짐을 지고 날랐다.
수중에 돈이라곤 없었다. 직장에서 은퇴 뒤 두 번째 이혼. 강 씨는 첫 월세 23만 원이 없어 친구에게 빌렸다. 삼 형제에겐 손 벌릴 생각조차 못 했다. 월 20만∼30만 원인 기초연금을 아껴 쓰며 가끔씩 생기는 소일거리로 생활비를 충당했다.
고시원 생활은 생각보다 더 괴로웠다. 사방이 꽉 막힌 외딴섬. 가만히 누워 잠이라도 청할라치면 외로움부터 밀려들었다. 그럴수록 강 씨는 더 몸부림쳤다. 아침마다 장을 봐 요리를 해 먹었다. 외출 땐 세탁소에서 다림질한 셔츠와 정장을 꼭 갖춰 입었다. 청과물 가게에서 싸게 내놓은 과일을 사 와 옆방들에 나눠 주며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다들 좋아했죠. 강 선생님이 과일을 가져와 나눠 주면 젊은 친구들도 반색했어요. 이런 고시원에서 신선한 과일 맛보기가 어디 쉽습니까. 20대 청년들은 강 선생님을 ‘키 큰 할아버지’라 불렀어요. 지나치다 마주치면 반갑게 꾸벅 인사했죠.”(당시 고시원 실장 이신우 씨)
“분위기가 좀 달랐어요. 흔히 고시원에서 뵙는 분들 같지 않다고나 할까. 음…, ‘순둥이’라 불러도 되려나. 남한테 폐 끼치는 행동은 절대 안 하셨어요. 언젠가 넌지시 자녀분들 얘기를 에둘러 꺼내신 적도 있긴 해요. 왠지 남모를 아픔이 느껴져 자세히 여쭤보진 못했죠.”(당시 고시원장 김종근 씨)
많은 세월이 흐른 탓일까. 강 씨와 성인이 된 아들들은 아주 조금이나마 ‘관계’를 회복했다. 어쩌다 한 번씩 안부 전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하지만 오래전 깨져버린 마음은 다시 붙지 않았다. 그저 오가는 형식적인 말들. 진심 어린 말 한마디는 서로 건네지 못했다.
2009년 이후 언제쯤인가의 일이다. 아버지가 고시원에서 생활한다는 걸 안 상준 씨. 고심 끝에 동생에게 의견을 물었다.
“미우나 고우나 아버지인데, 우리가 용돈이라도 좀 모아서 보내드리면 어떨까.”
동생의 반응은 예상보다 더 차가웠다.
“…글쎄요, 형. 전 좀 생각해 볼게요.”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게 자연스러웠다. 아버지는 동생이 옹알이도 떼기 전에 떠났다. 처음부터 없던 정이 갑자기 솟아오를 리 없었다.
“형제들 모두 아버지 없이 크다 보니 어른이 되어서도 삶이 팍팍했어요. 가진 게 없어 세상살이에 많이 치였죠. 아버지는 2016년 영등포역 근처에서 잠깐 얼굴 뵌 게 마지막이었어요. 저 역시 누굴 돌볼 여력조차 없었습니다.”
2020년 12월 20일 일요일.
강 씨는 12년을 머물던 고시원을 떠났다. 건물 재개발이 결정돼 모두 쫓겨나듯 짐을 쌌다. 어렵사리 찾은 동대문구의 한 고시원. 살던 곳보다 훨씬 낡고 퀴퀴했지만 비슷한 월세에 만족해야 했다. 처음 고시원에 들어올 때처럼 강 씨는 추위를 견디며 쓸쓸히 살림살이를 옮겼다.
이젠 일흔여덟의 나이. 강 씨는 다시 낯선 천장을 마주했다. 좁디좁은 방과 어두운 복도. 그리고 새로운 고시원 사람들. 어떻게든 또 견뎌내야지. 하지만 강 씨가 이곳에 머무른 건 겨우 3주밖에 되지 않았다. 해가 바뀌고 1월 11일 그는 숨이 끊긴 채 발견됐다. 이틀 뒤인 13일 오후 5시경.
서울추모공원에는 전날 내린 눈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얼마쯤 기다렸을까. 방호복을 입은 관계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반 사망자 화장이 모두 끝난 뒤, 코로나19 사망자의 화장 절차가 시작됐다.
무연고 사망자로 남을 뻔했던 강 씨는 상준 씨의 형(52)이 나서며 유족 인수로 결정됐다. 대전에 살던 형은 아버지 유골을 수습하러 짬을 냈다. 화장 뒤 큰아들은 아직 뜨끈한 열기를 품은 봉안함을 건네받았다. 살아서 한 번도 제대로 안아보지 못했던 아버지를 형은 그제야 품에 안았다. 영원히 떠나보내기 위해.
강 씨가 머물던 고시원 39호실의 폴리스라인은 일주일이 지나자 경찰이 거둬 갔다. 상준 씨도 형제들도 고시원은 찾아가지 않았다. 확진자가 발생한 터라 갈 수도 없었다. 삼 형제는 “아버지 유품은 직접 정리하지 않겠다”는 뜻을 동대문구와 보건소에 전달했다.
누군가는 치워야 하는 강 씨의 자리. 폴리스라인을 걷어낸 뒤 이영숙(가명) 원장이 유품을 하나씩 자루에 담았다. 바닥과 침대에 널브러진 옷가지와 각종 서류들. 10원, 50원짜리 동전 뭉치. 먹다 남은 채로 까맣게 썩어가는 밥그릇.
어르신에게 무엇이 소중한 물건이었는지, 행여 세상에 남기고 싶은 건 없었는지. 이 원장은 알 길이 없었다. 남은 이는 그저 떠난 이의 흔적을 모두 쓸어 담는 수밖에 없었다. 한참 정리 도중 구석 모퉁이에서 박카스 빈병 10개가 나왔다. 그게 강 씨가 마지막까지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이었다.
“떠나기 전에 기침 소리가 정말 컸어. 자다가 주위에서 다들 깰 정도로 계속 기침을 했지. 그러면서 박카스를 엄청 마시더라고. 딱히 약을 먹거나 병원에 다니는 것 같지도 않았거든.”(옆방 38호실)
“결국 이렇게 떠나셨구나…. 솔직한 심정으로 그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어요.”
상준 씨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전화를 받은 날을 그렇게 떠올렸다. 한마디씩 찬찬히 입을 뗐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와 쌓은 추억이 없어요. 정을 나눌 기회조차 없었던 거죠. 함께 찍은 사진 한 장 남아 있질 않거든요. 저희에게 남은 건, 아버지 유골이 담긴 네모난 상자뿐이었어요. 근데 그걸 보니 가슴 한쪽이 먹먹해지더라고요. 이유는 지금도 정확히 모르겠어요.”
너무 오랫동안 뒤틀려 있던 관계. 코로나19로 이렇게 헤어지지 않았다 해도 강 씨와 아들들의 사이는 쉽게 회복되긴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19는 그 실낱같은 가능성마저 없애버렸다. 어쩌면 먼 훗날 가슴속 깊은 상처를 꺼내놓고 얘기했을, 울부짖고 다투더라도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어낼 기회가 그냥 사라졌다. 강 씨는 삼 형제와 손자, 손녀들을 끝내 안아주지 못했다.
‘사망 후 코로나19 확진.’ 늦은 판정을 받은 강정식 씨의 유골은 삼 형제가 어린 시절 함께 살았던 충남 논산에 안치됐다. 1975년 떠났던 고향. 강 씨는 46년 만에 ‘서울 2만1915번 확진자’란 이름을 달고 돌아왔다.
상준 씨는 대화가 끝나자 혼잣말처럼 물었다.
“…저는 무엇을 슬퍼해야 하는 걸까요.”
통계에도 기록되지 않은 ‘코로나 고독사’
고독사 예방-관리법 4월에야 시행… 노숙인 시설-쪽방촌 등 사각 여전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고독사’는 통계로 숫자가 잡히지 않는다. 코로나19가 발생한 지난해부터 올해 3월까지는 이에 대한 실태조사를 규정한 ‘고독사 예방 및 관리법’ 자체가 없었다. 그 사이 강 씨가 세상을 떠난 고시원은 물론 쪽방촌이나 노숙인 집단 거주지 등에선 코로나19 고독사가 어디선가 발생했을 수도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올 1월 1일부터 2월 8일까지 서울에 있는 7개 노숙인 지원 시설에서만 코로나19 확진자가 100명이 발생했다. 특히 중구에 있는 서울역희망지원센터에서는 90명이 확진 판정을 받는 집단 감염이 발생했다. 쪽방촌 1만971명을 대상으로 한 선제 검사에서도 100명 이상의 확진자가 나왔다.
해당 센터 역시 강 씨가 머물렀던 고시원과 조건이 엇비슷했다. 여기선 하루 최대 169명에게 잠자리를 제공한다. 1인당 평균 취침 면적은 3.3m²(약 1평) 정도다. 법무부가 교정시설 등의 1인당 취침 면적 기준으로 제시한 5.4m²(약 1.6평)보다 좁은 공간이다.
코로나19 집단 감염이 번진 뒤 대응도 다소 미흡했다. 인권위가 1월 서울역희망지역센터에서 진행한 현장조사에 따르면 확진자와 밀접 접촉자 분류 업무를 방역당국이 아니라 시설 측이 담당했다. 이 과정에서 밀접 접촉한 노숙인 40여 명은 확진자가 나오고 60시간이 지난 뒤에야 별도의 격리 시설로 옮겨졌다. 중앙방역대책본부의 방역 지침은 확진자가 나오면 24시간 이내 격리 조치를 하도록 돼 있다.
물론 코로나19 고독사나 집단 감염이 취약계층에서만 발생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노년층이 많고 주거환경이 열악한 만큼 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천은미 이대목동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정부가 주거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선제 검사를 진행하고 자가진단키트를 무상 지원하는 방식도 고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히어로콘텐츠팀:: ▽총괄 팀장 : 지민구 기자 warum@donga.com ▽기사 취재: 이윤태 김윤이 이기욱 기자 ▽사진 취재: 송은석 기자 ▽그래픽: 김충민 기자 ▽프로젝트 기획: 이샘물 이지훈 기자 ▽사이트 제작: 디자인 이현정, 퍼블리싱 조동진, 개발 최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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