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부 불법체류 아동 구제대책, 15년이상 체류-초교 졸업 등 기준
‘그림자 아이들’ 1만3000여명 중 구제받는 대상은 많아야 500명
한가족 남매 중 초등생은 추방대상
“이젠 제 이름으로 네이버 회원 가입도 할 수 있대요. 하지만… 동생들은 어떡하죠. 언젠간 한국을 떠나야 한다는데. 저희 이대로 헤어져야 하나요.”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한국말밖에 모른다. 김치가 들어가면 다 좋고, 콩국수는 ‘최애’다. 아, 그리고 방탄소년단(BTS). 세계를 휩쓴 우리 오빠들. 같은 한국인이라 자랑스럽다. 그런데 세상은 날 달리 부른다. ‘그림자 아이’라고.
영락없는 중학생 현지(가명·15). 한 번도 한국인이 아니라 생각한 적 없다. 꿈은 한국 최고의 특수 분장사. 하지만 언제나 마음 한편이 아리다. 아버지가 불법 체류자라 자신도 미등록 체류 아동이다. 현지는 택한 적 없는데, 다른 존재여야 했다.
사이트 계정 하나 만들 때도 남의 것을 빌려야 했다. 휴대전화도 내 명의가 아니다. 봉사활동도 서류를 몇 장씩 떼야 했다. 하지만 다 참아낼 수 있다, “너 어른 되면 강제 추방될 거야”란 말만 빼면.
그런 현지에게 4월 19일은 잊지 못할 날이다. 법무부가 ‘국내출생 불법체류 아동 조건부 구제대책’이란 걸 발표했다. 심사만 통과하면 한국에서 이대로 살 수 있단다. 더 이상 주눅 들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현지는 마냥 신나지 않다. 큰딸 현지에겐 남동생 둘과 여동생이 있다. 현지와 둘째는 구제 대상이지만, 셋째와 막내가 제외됐다. 법무부는 국내 체류비자 자격 조건으로 △한국 출생, 15년 이상 체류 △2월 28일 기준 초등학교 졸업 △신청일 기준 국내 중고교 재학이거나 고교 졸업만 대상으로 했다.
“애들한테 뭐라 하죠. 전 여기 살 수 있는데 동생들은 크면 떠나야 하는 이유를. 꿈이 많은 애들인데. 초등학생이라 안 된다는 걸 이해할까요.”
물론 법무부 구제대책은 선의에서 나왔다. 2020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제도 마련을 권고하자 법무부가 받아들인 결과다. 하지만 수혜를 받을 수 있는 아이들은 많아야 500명뿐이다. 그림자 아이들은 추정 1만3239명(2017년 기준). 겨우 약 3.8%일 뿐이다.
최윤철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무부 대책은 지금까지 한국 사회가 그림자 아이들을 대해 온 태도에 비춰보면 고무적이다. 하지만 실제 수혜 아동은 적어 연령 제한 등의 조건 개선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15년 살아야 불법체류 구제”… 첫째-둘째 남고 동생은 추방 위기
“독도는 당연히 우리나라 땅이지. 뭐 그런 걸 물어봐.”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인 민준이(가명·12)는 엄마의 질문이 이해가 안 간다. ‘독도가 어느 나라 땅이냐’니. 한국 영토라는 거 유치원 어린애들도 다 아는데. 그걸 자기네 땅이라 우기는 일본이 밉다.
또 하나 이해가 안 가는 말이 있다. ‘미등록 체류 아동.’ 어렴풋이 느끼긴 했다. 베트남에 사는 할머니는 한국말을 할 줄 모른다. 아빠 엄마도 한국말이 다소 서툴다. 내 친구들이랑 나는 다르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괜찮다. 난 한국인이니까. 하지만 엄마는 아직 민준이에게 하지 못한 말이 하나 더 있다.
○ 그림자 아이 96%가 대상에서 제외
“요즘 민준이의 최고 관심사는 수학여행이에요. 내년에 중학생 되면 제주도 갈 수 있느냐고 계속 물어봐요. 학교 다니면서 계속 체험학습에서 빠졌거든요. 등록번호가 없어 보험 가입이 안 되는 바람에. 근데 어디서 법무부 구제 대책이 생겼다는 걸 들었나 봐요. 이젠 자기도 가도 되냐고 하는데. 넌 1년 어려서 자격이 안 된다는 걸 어떻게 얘기할지….”
부모가 불법체류자라 미등록 체류 아동이 되는 ‘그림자 아이들’. 2019년 9월 당시 고등학생이던 그림자 아이 2명은 국가인권위원회에 “미등록 체류 아동들의 강제 추방을 막아 달라”며 진정을 했다. 이듬해인 2020년 4월 인권위는 “구체적이고 공개적인 심사 기준에 따라 (그림자 아이들의) 체류 자격을 부여할 제도를 마련하라”고 법무부에 권고했다.
그 결과로 올해 4월 19일 나온 것이 법무부의 ‘국내 출생 불법체류 아동 조건부 구제 대책’이다. 법무부는 “최대 500명 정도가 조건부 구제 대책의 자격 요건을 충족할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법무부의 연구용역 결과를 봐도 이 숫자는 너무 미흡하다. 전국의 미등록 체류 아동은 2017년 기준으로 최대 1만3239명에 이른다. 500명만 가능하다는 건 약 96.2%는 ‘신청 자격 미달’이란 뜻이다.
게다가 신청 자격엔 ‘불법체류하는 부모가 과태료를 완납해야 한다’는 조항도 달려 있다. 법무부는 적게는 900만 원부터 많게는 3000만 원을 납부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자격이 되는 약 3.8%도 더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국민의힘 김도읍 의원실이 법무부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구체 대책이 나온 지 약 2개월이 지난 6월 14일까지 체류 자격을 신청한 아동은 21명뿐이다.
법무부는 “2021년 2월 기준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동의 연령은 최소 12세로 ‘국내에 15년 이상 거주’ 조건을 감안해 충분한 신청 기간을 부여하겠다”며 “2025년 2월 28일까지 접수를 받겠다”고 밝혔다. 이 기준에 따르더라도 올해 2월 이전에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모든 그림자 아이는 제외된다.
○ “공정한 심사로 체류 자격 부여해야”
“우리 아이는 둘 다 발달장애로 치료를 받고 있어요. 한국말도 또래들에 비해 어눌하죠. 겨우겨우 적응하며 살고 있는데, 그런 애들이 필리핀에 가서 어떻게 적응하겠어요.”
초등생 A 군(12)과 B 군(11)의 어머니는 하루하루가 버겁다. 매달 치료비와 약값만 40만 원이 든다. 아이들은 한자리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한다. 갑자기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그래도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라 한국에서 치료를 받다 보니 많이 좋아진 편이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이번 구제 대상에서 제외됐다. 단지 나이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법무부가 ‘초등학생 이하 아동은 고국에 돌아가면 현지 적응이 비교적 쉽기 때문에 제외했다’고 한다”며 “아이들 각자의 상황을 고려해서 제도를 융통성 있게 적용해 주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다.
법무부 측은 부작용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조건부 구제 대책에 대해 “국내 출생 아동 모두를 대상으로 상시 시행하면, 아동을 수단으로 불법 이민이 증가할 수 있다. 초등학교를 마치기 전에 본국으로 귀국하면 적응이 용이할 것으로 판단해 기준을 삼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인권위는 권고 당시 “법무부는 부모가 자녀를 이용해 체류하는 사례가 늘고 국경 관리 및 체류 질서의 근간이 훼손될 것을 우려하나, 이는 현실화되지 않은 가정적 우려로 이를 이유로 피해자들의 기본적 인권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한 전문가도 “미등록 체류 아동에 대한 무조건적인 강제 퇴거는 당장 중단해야 한다”며 “이들이 체류를 원할 경우엔 공정한 심사 기준을 마련해서 체류 자격을 부여하도록 상시적인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법무부는 김도읍 의원실에 제출한 답변서에서 “향후 아동의 인권과 급증하는 불법체류 외국인에 대한 국민의 법감정을 균형 있게 고려하며 신청 등 진행 상황을 주시하면서도 제도 개선 방향 등을 신중하게 검토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수천만원 과태료 내야 가족 체류자격 준다는데, 무슨 수로…”
4년전 ‘그림자 아이들’ 세상에 알린 페버씨 인터뷰
“가족 중에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저뿐이에요. 6명 생활비도 빠듯할 지경인데, 과태료 수천만 원을 어찌 마련하겠어요.”
‘그림자 아이들’을 세상에 알린 페버 씨(22)는 이제 더 이상 그림자 아이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드리워진 그림자 아래서 힘겨워하고 있다.
16일 전화를 받은 그는 대뜸 한숨부터 지었다. 법무부가 4월 발표한 ‘국내 출생 불법체류 아동 조건부 구제대책’에 대해 착잡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페버 씨는 “가족 모두 체류 자격을 얻길 꿈꿔왔지만, 현실의 벽은 높기만 하다”고 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페버 씨는 2017년 4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이지리아로 추방 명령을 받았다. 2008년 나이지리아 출신 아버지가 체류 기간을 연장받지 못해 강제 출국당한 뒤 줄곧 불법체류(미등록) 상태로 지냈다.
결국 열일곱 살에 외국인보호소에 구금돼 쫓겨날 위기에 처했지만, 당시 그의 사연이 2017년 5월 동아일보에 보도된 뒤 극적인 전환을 맞았다. 국민적 관심이 커지며 보호소에서 석방됐고, 이듬해 법원에서 추방 명령 취소 판결도 받았다. 이후 페버 씨는 학생비자를 얻어 대학에 진학했고, 졸업한 뒤엔 취업비자를 받아 합법적으로 일하며 산다.
하지만 페버 씨의 다른 네 형제는 여전히 불법체류자다. 누나(23)와 셋째(19), 넷째(17), 다섯째(14)는 모두 이번에 법무부가 제시한 조건은 갖췄다. 모두 한국 출생으로 15년 이상 체류했고, 국내에서 초중고교에 재학 중이거나 졸업했다. 하지만 ‘미등록 체류 외국인인 부모의 과태료 완납’ 조건이 발목을 붙잡았다.
“저는 다행히 해결했지만, 어머니는 2008년 아버지가 강제 출국된 뒤 지금까지 미등록 체류 신분으로 한국에서 지내왔어요. 과태료가 3000만 원 정도라는데 저희에겐 너무 큰 돈이에요. 모은 돈이 없고 대출도 받기 어렵거든요. 너무 막막합니다.”
과태료를 마련해 납부한다고 해도 문제가 끝나는 게 아니다. 미성년자 자녀에게 체류 자격이 주어지면, 부모 역시 합법적으로 체류할 수 있다. 하지만 자녀가 성인이 되는 순간 체류 자격은 사라지고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막내가 5년 뒤면 성인인데, 그때 어머니가 무조건 한국을 떠나야 하는 거죠. 출입국사무소 직원에게 ‘성인이 되자마자 부모님이 떠나면 어떡하냐’고 물어보니, ‘그러면 같이 가라’고 하더군요. 정식으로 비자 받아서 다시 들어오라고 하지만, 언제 올지, 돌아올 수나 있을지 기약이 없어요. 한국 정부에서 조금만 배려해주길 바랄 뿐입니다.”
박종민 기자 blick@donga.com / 이윤태 기자 oldspor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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