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방향으로 논산분기점(JCT)을 약 4km 앞둔 지점에서 비가 내리는 4차로를 과속으로 달리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 중심을 잃고 미끄러졌다. SUV는 갓길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간신히 도로에 멈췄지만, 안전벨트를 착용하지 않았던 40대 초반 운전자와 30대 조수석 탑승자가 차 밖으로 튕겨 나가 목숨을 잃었다. 뒷좌석에 타고 있던 30대 남성은 안전벨트를 차고 있었지만 충격으로 역시 숨을 거뒀다.
약 두 달 뒤 경부고속도로에서도 빗길 사고가 발생했다. 서울 방향으로 수원신갈 나들목(IC)을 2.4km 남겨둔 지점에서 연쇄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 5차로를 과속 주행하던 1t 화물차가 제동력을 잃고 가드레일을 들이받은 뒤 튕기면서, 2∼4차로를 달리던 25t 탑차와 5t 화물차, 버스 등과 연달아 부딪쳤다. 이 사고로 1t 화물차를 운전하던 60대 남성과 옆자리 50대 여성이 숨졌다.
빗길 과속운전으로 벌어지는 교통사고가 줄어들지 않고 있다. 특히 속도 제어가 어려운 빗길 고속도로에서 발생한 사고는 일반 고속도로 교통사고보다 치사율이 1.6배 높을 정도로 위험하다. 한 교통 전문가는 “비가 오는 날이 늘어나는 여름철이 시작되고 있어 빗길 안전운전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는 시점”이라고 말했다.
○ 빗길 과속은 빙판길을 달리는 격
경찰청에 따르면 2018년부터 2020년까지 고속도로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는 1만2341건. 해당 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681명으로 치사율은 5.5%에 이른다. 경찰 관계자는 “이 가운데 빗길 교통사고는 1087건으로 95명이 목숨을 잃었다. 치사율은 8.7%나 된다”고 전했다.
지난해는 역대 가장 오랜 기간(54일) 동안 이어진 여름 장마로 2019년 대비 고속도로 교통사고 사망자가 늘어났다. 지난해 고속도로 교통사고 사망자는 223명. 이 가운데 37명(16.6%)의 사고 원인이 빗길 교통사고였다. 여름 장마가 34일 동안 이어졌던 2019년에는 교통사고 사망자가 206명이었다. 빗길 교통사고 사망자가 19명(9.2%)이었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비가 오면 노면 마찰력이 줄어든다. 차가 미끄러지기 쉽고, 제동거리도 길어진다. 빗길 교통사고는 대부분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다. 한국교통안전공단 관계자는 “빗길 운전 시 자동차의 제동거리는 평소보다 급증한다. 빗길에서 시속 50km로 주행할 때 승용차의 제동거리는 18.1m다. 맑은 날 제동거리(9.9m)의 약 2배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물이 고인 빗길에서 시속 80km 이상의 속력으로 주행할 때는 ‘수막(水膜)현상’이 생길 가능성도 커진다. 수막현상이란 자동차가 물이 고인 도로를 빠르게 달릴 때 타이어와 노면 사이에 일종의 물로 된 막이 생기는 것을 일컫는다.
이렇게 되면 타이어가 접지력을 잃고 자동차가 물 위를 미끄러지듯 주행하게 된다. 특히 차량의 속도가 빠를수록 타이어 접지면 앞쪽에 수막이 더 깊게 생긴다. 교통전문가는 “이럴 경우 노면으로부터 타이어가 완전히 떨어져 브레이크 등 차량 제동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당연히 사고로 이어질 확률도 커진다”고 경고했다.
○ 빗길 안전거리 평소보다 2배 이상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에 따르면 빗길에서는 차량 안전거리를 평소보다 2배 이상 확보해야 한다. 제한속도가 시속 100km인 도로라면 차 간 거리는 200m 정도 둬야 한다. 운행속도도 제한속도의 80% 이하로 달려야 안전하다. 폭우로 가시거리가 100m를 넘지 않을 때는 제한속도의 50% 이하로 속도를 낮춰야 한다.
여름 장마철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차량을 점검해둘 필요가 있다. 타이어 마모 상태와 공기압 점검이 대표적이다. 교통안전공단이 젖은 노면에서 타이어 마모 상태에 따른 제동거리를 실험한 결과 타이어 마모에 따라 제동거리는 최대 1.5배까지 증가했다. 시속 100km 속도에서 타이어 홈 깊이가 마모한계선(1.6mm)일 경우 제동거리는 71.9m나 됐다. 새 타이어(홈 깊이 5.5mm)의 제동거리가 48.6m인 것을 감안하면 큰 격차를 보인다.
이호근 대덕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제동장치와 와이퍼 상태 등을 점검하고, 유리창에는 발수제 등을 이용해 빗물이 잘 흘러내리게 코팅해주면 좋다”며 “여름철 에어컨을 오래 틀면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져 졸음운전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자주 환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도로공사는 고속도로 빗길 교통사고를 줄이기 위해 일부 구간에만 적용하던 ‘우천 시 잘 보이는 차선’을 올해부터 고속도로 전 구간으로 확대하고 있다. 차로 이탈 방지 등의 효과를 지닌 ‘돌출형 차선’도 비가 올 때 식별이 쉬운 만큼 일부 구간에 시범 설치한 뒤 확대 적용할 계획이다. 조재성 한국도로공사 교통처 차장은 “빗길 교통사고는 차량 제동이 쉽지 않아 차량이 도로 밖으로 이탈해 추락하는 대형사고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며 “안전벨트 착용, 안전거리 확보, 감속 운행 등 빗길 주행의 안전운전 기본수칙을 꼭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2차사고 치사율 60%… 비상등 켜고 안전지대 대피를”
일반사고 치사율의 6.7배 달해… 후속차량 졸음-주시태만 등 원인 “차량 환기-쉼터 이용 졸음 방지를”
올 1월 중부고속도로에서 갓길에 서 있던 차량을 뒤에서 오던 다른 차량이 추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차량 상태가 이상하다고 느낀 앞차 운전자가 갓길에 정차해 점검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른 차량이 정차된 차량 쪽으로 돌진했다. 이 사고로 추돌한 차량의 운전자는 목숨을 잃었다.
이처럼 교통사고를 당했거나 고장 등으로 차량이 정차했을 때 다른 차량이 이를 추돌해 벌어지는 사고를 ‘2차 사고’라 부른다. 특히 고속도로에서 2차 사고에 따른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경우가 잦다. 한국도로공사에 따르면 2016∼2020년 고속도로에서 발생한 2차 사고에 따른 사망자는 165명. 연평균 33명에 이른다. 치사율은 59.8%로 매우 높다. 산술적으로 2차 사고 10건당 6명이 목숨을 잃는 셈이다. 한 교통 전문가는 “일반사고 치사율이 8.9%인 것을 감안하면 약 6.7배 수준이다”라고 설명했다.
2차 사고가 일어나는 주요 원인으로는 선행하던 차량 운전자의 대피 미흡이나 뒤에서 오던 차량 운전자의 졸음, 주시 태만, 안전거리 미확보 등이 꼽힌다. 도로 위를 지나는 고라니나 멧돼지 같은 동물을 들이받은 뒤 멈춰 섰다가 뒤따르던 차량이 추돌하는 사고도 적지 않다.
겨울철이면 춥다는 이유로 갓길에 세워둔 차량에서 내리지 않아 인명 피해로 이어지기도 한다. 갓길 정차는 사고 위험이 커 차에서 대피하는 게 원칙이다. 경찰 관계자는 “장시간 히터를 켜놓는 바람에 차량 내 산소가 부족해 운전자의 졸음을 유발하는 것도 사고의 원인이 된다”고 말했다.
도로교통공단이 차량 내 대기 변화가 운전자 피로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결과를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차량이 고속도로를 장기간 주행하면 이산화탄소가 증가하며, 농도가 증가할수록 졸음운전 위험성이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2차 사고를 막기 위해서는 운전자들의 인식 전환이 가장 중요하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사고나 고장 등으로 차를 갓길에 세워야 할 때는 비상등을 빠르게 켜서 뒤따르는 차량에 상황을 알려야 한다. 그 다음 가드레일 밖 안전지대로 서둘러 대피한 뒤 신고와 안전조치를 해야 한다. 모든 차가 빠르게 달리는 고속도로의 특성상 뒤에서 오는 차량 운전자는 정차된 차량이나 사람을 보지 못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한국도로공사 관계자는 “졸음운전을 막으려면 틈틈이 창문을 열어 차량 내부를 환기해 주는 것이 좋다”며 “휴게소나 졸음쉼터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하는 것으로도 사고를 막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특별취재팀
▽ 팀장 박창규 사회부 기자 kyu@donga.com ▽ 변종국(산업1부) 기자 bjk@donga.com 신지환(경제부) 기자 jhshin93@donga.com 정순구(산업2부) 기자 soon9@donga.com 이윤태(사회부) 기자 oldsport@donga.com 신아형(국제부) 기자 abro@donga.com
공동 기획: 행정안전부 국토교통부 경찰청 한국교통안전공단 손해보험협회 한국도로공사 도로교통공단 한국교통연구원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교통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독자 여러분의 제보와 의견을 e메일(lifedriving@donga.com)로 받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