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는 걷는다. 도심 높은 아파트 단지 아래 골목이 걷는다. 20세기 초 읍성(邑城)이 사라지고 들어선 이국적 건축물을 따라 걷는다. 이야기 없는 길, 사연 없는 터, 의미 없는 건물은 없다. 격동의 근대사를 씨줄 삼고 산업화 신화를 날줄 삼아, 대구는 걷는다.
지난달 3일 대구 중구와 북구가 연 ‘경제 신화 도보길’은 기존 ‘근대로(路)의 여행’ 골목 투어 코스에 날개를 달았다. 1960, 70년대 대구 산업의 중추 지점에 새 이정표를 꽂았다.
경제 신화를 걷는 길은 삼성 창업자 호암(湖巖) 이병철이 1938∼1947년 살았던 중구 서성로 ‘호암 고택(古宅)’에서 시작한다.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이 1942년 여기서 태어났다. 대지 250m²에 방 4개. 근방에서 꽤 큰 집에 속했다. 50m 남짓 걸어 서문시장 맞은편에 ‘오토바이 골목’이 있다. 1960년대 대구 섬유공장에는 오토바이 통근자가 적지 않았다. 이들의 오토바이 수요, 잔 고장 수리 요구에 맞춰 1961년부터 오토바이 가게가 들어섰다.
5분 정도 걸으면 ‘삼성상회 터’다. 호암이 1938년 자본금 3만 원으로 ‘삼성(三星)’이라는 이름을 처음 내건 곳이다. 대구 일대 청과류와 포항 건어물 등을 만주 중국 등지로 수출하고 국수를 만들어 팔았다. 창립 당시 삼성상회 건물 전면을 축소해 나무로 제작해 놓았다.
인근 북성로 공구골목은 1905년 일본인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대구 근대화가 시작된 곳이다. 1947년 주한미군 보급 창고에서 나온 폐(廢)공구를 수집하는 11명이 영업하며 공구골목 모습을 띠었다. 6·25전쟁과 1950, 60년대 미군부대 군수용 공구 유통 및 관련 철공소 등이 모이며 호황을 누렸다. 한때 전국 공구가 다 모인다는 얘기도 들었다. 박물관 ‘북성로 기술 예술 융합소 모루’에서 공구골목 역사를 엿볼 수 있다.
공구골목을 지나면 국내 가장 오래된 담배공장이던 대구연초제조창 터다. 대구연초제조창 역사는 1921년 조선총독부 전매국의 대구지방 전매국 설립과 함께 시작한다. 6·25전쟁 때도 문을 닫지 않고 군수품 담배를 공급했다. 광복 기념 담배 ‘승리’, 1950년대 ‘화랑’, 70년대 ‘거북선’, 80년대 ‘태양’, 90년대 ‘88라이트’ 등을 여기서 만들었다.
1990년대 문을 닫은 연초제조창은 예술 공간으로 변신했다. 연초제조창 직원 아파트이던 3층 건물은 ‘수창청춘맨숀’이라는 청년 작가를 위한 복합문화공간이 됐다. 그 앞의 1949년 지은 연초제조창 창고 건물은 예술 전시 공간 ‘대구예술발전소’로 변했다.
중구와 북구 경계에는 주한미군 보급 창고 ‘미군 47보급소’가 있다. 현재 국방부 소유로 용지의 대구 반환이 추진 중이다. 10여 개 창고에 지금도 가구 등이 보관돼 있다. 북구로 발을 옮기면 상공업 발전의 근간이 된 현장을 재해석한 공간이 이어진다.
칠성동 ‘별별상상이야기관’에서는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한 회사들의 시작을 보여준다. 경제 신화를 걷는 길의 핵심일지도 모른다. 대구 대표 브랜드였던 제일모직, 쌍용그룹의 출발이 된 삼공유지, 고무신 가게에서 세계적 자동차 부품 회사가 된 평화산업㈜, 점보지우개로 유명한 화랑 등의 연혁을 시청각 자료로 살펴볼 수 있다.
고성동으로 걸음을 옮기면 오래된 철강공장을 공장형 카페로 개조한 ‘빌리웍스’와 의약품 공장과 창고를 복합문화공간으로 재생한 ‘투가든’이 있다. 빌리웍스에서는 전시 공연 패션 등 문화예술도 향유하고, 투가든에는 커피숍뿐만 아니라 서점을 비롯한 각종 매장이 있다.
바로 곁에 옥산로 테마거리를 상징하는 근대 건축물인 고성성당이 있다. 1958년 지은 이 성당은 1960, 70년대 섬유도시 대구를 이끌던 제일모직 여공들이 일요일, 몸과 마음을 쉬던 곳이었다.
종착지는 침산동 대구삼성창조캠퍼스다. 1954년 제일모직이 들어선 자리다. 도심 아파트 숲 한가운데 평온하게 자리 잡고 있다. 4개의 존(zone)으로 구성돼 있으며 목조 4층 규모의 삼성상회 건물이 재현돼 있다.
경제 신화 도보길은 총 4km. 돌아보는 데 약 3시간 걸린다. 해설사가 동행하는 정기 투어는 토요일 오전 10시, 오후 2시 두 차례 있으며 중구, 북구 홈페이지나 전화로 예약하면 된다. 10명 이상 단체는 아무 때나 전화 예약 가능하다.
류규하 중구청장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산업 발전의 발자취를 돌아보며 세대를 아울러 대구 근대사를 재조명하고 이미지를 제고하는 투어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배광식 북구청장은 “걷기를 통해 건강과 치유를 얻는 관광 코스로 ‘위드 코로나’ 속 생활의 활력소 역할을 톡톡히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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