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을 통해 자기 뜻을 세우고 그 뜻을 실현함으로써 국가나 사회에 공헌한다. 공헌이란 재화와 서비스의 풍족한 제공이며, 고용과 소득 기회의 더한 확대이며 국가경영의 재원을 이루는 납세의 세원(稅源) 조성이다. 기업 수익을 축적해 새로운 기업에 투자하고 새로운 기술 개발을 추진한다. 한마디로 국민 행복, 나아가 인류복지 향상에 공헌하는 길이다.”(호암 이병철, ‘호암자전’ 중)
삼성 창업자 호암(湖巖) 이병철(1910∼1987)이 경영철학인 사업보국(事業報國)을 생전에 정리한 것이다. 호암은 삼성그룹을 일궈 이 경영철학을 완성시키기 전, 두 번 크게 실패했다. 그때마다 나락의 바닥을 박차고 올라오게 한 곳이 대구였다.
호암은 26세 때 경남 마산에 정미소를 차려 성공을 거둔 뒤 김해평야 논 40만 평을 매입했다. 매입금은 식산은행(殖産銀行)을 통해 융자를 받기로 약정을 맺었다. 그러나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자금동결령이 떨어지자 융자는 취소됐고 그 땅을 헐값에 처분해야 했다. 정미소 등으로 모은 돈은 온데간데없어졌다.
호암은 원산 평양 흥남과 만주 중국의 하물집하장(荷物集荷場)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경영(經營)의 뜻을 정리했다. 경(經)은 ‘밧줄이나 끈으로 줄을 쳐놓는다는 것’, 영(營)은 ‘줄 쳐놓은 둘레를 두루 쌓는다는 것’. 즉, 경영은 사전 준비와 계획이라는 뜻이었다. 토지 매입 실패는 사전 계획과 준비의 부족이라는 냉엄한 진단을 스스로 내렸다.
삼성상회 원래 모습.이 깨달음을 바탕으로 호암은 1938년 3월 1일 대구 수동(현 중구 인교동) 서문시장 한쪽에 지상 4층, 지하 1층의 목조건물을 짓고 ‘주식회사 삼성상회(三星商會)’를 세웠다. 당시 서문시장은 철도 경부선과 여러 국도로 북으로는 경북 안동 의성 김천 상주, 남으로는 현풍 고령, 서로는 성주까지 연결돼 생활필수품과 농수산물 포목 가축 등이 거래됐다. 경북 지역 상업 중심지에 삼성의 모태(母胎)가 탄생했다.
호암이 지은 삼성이라는 이름의 ‘삼(三)’은 큰 것, 많은 것, 강한 것을 나타낸다. ‘성(星)’은 밝고 높고 영원히 깨끗이 빛나는 것. 즉 ‘크고 강력하고 영원하라’는 뜻으로, 재출발하는 사업에 호암의 바람과 포부를 담았다.
전화기 한 대와 종업원 40여 명으로 출발한 삼성상회는 대구 근교 청과물과 동해안 건어물 등을 모아 만주와 베이징 등으로 수출했다. 동시에 제분기와 제면기를 갖춰 국수를 만들어 팔았다. 여기서 만든 ‘별표국수’는 인기가 높았다.
복원된 삼성상회.1939년 호암은 지역의 ‘조선양조’를 12만 원에 인수해 술을 빚어 내다 팔았다. 삼성상회와 조선양조의 성공은 더 큰 시장으로 눈을 돌리게 했다. 조선양조의 경영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 호암은 1947년 대구를 떠나 서울로 올라온다. 더 다종다양한 상품을 무역하는 삼성물산공사를 만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두 번째 실패를 맛본다.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서울 용산과 인천 보세창고에 쌓아둔 삼성물산공사 수입품이 모두 사라졌다. 인천 것은 공산군이 탈취했고, 용산 것은 악덕 유력업자가 착복했다. 그해 겨울 금값이던 트럭을 5대 사서 남은 짐과 직원, 그 가족들을 싣고 대구로 내려왔다. 삼성물산공사는 모두 무(無)로 돌아갔다. 그를 다시 끌어올린 것도 대구였다.
실의에 빠진 호암이 조선양조를 찾아 “신세를 지겠다”고 했을 때 운영을 맡아오던 사장, 지배인, 공장장은 “비축 자금 3억 원가량 있다”고 했다. 뜻밖의 구원이었다. 이 돈으로 임시수도인 부산으로 내려가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설립해 재기에 성공했다.
호암 고택 내부.호암은 제조업에 투신하기로 결심한다. 수입대체산업이던 설탕 제조에 뛰어들어 제일제당으로 꿈을 이뤄냈다. 제당(製糖) 다음은 복지(服地)였다. 상류층을 휩쓸던 마카오양복을 밀어낸다는 목표를 세웠다. 복지 역시 당시 요청이 큰 수입대체산업이었다.
1954년 제일모직을 설립하고 대구 침산동 7만 평(약 23만 m²) 터에 최신식 공장을 지었다. 모직(毛織) 산업에 필수적인 기온 습도 수질을 맞추는 노력을 늦추지 않았다. “우리나라 최초 모직공장이긴 하지만 국제 수준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여성 종업원 1000여 명이 사는 기숙사도 지었다. 이후 삼성의 성공 궤도는 말이 더 필요 없다. 당시 제일모직 등을 통해 낸 세금은 전체 국세의 4%를 차지했다.
현재 제일모직 터는 대구삼성창조캠퍼스라는 복합문화생활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벤처창업존, 제일모직 공장 기숙사 건물을 활용한 문화벤처융합존, 주민생활편익존, 삼성존 등 4개 구역에서 유망 스타트업 지원 및 창업 교육, 오페라와 뮤지컬을 비롯한 예술 창작 지원, 쇼핑몰과 야외 쉼터 등을 제공하고 있다.
호암은 생전 “한평생을 두고 나보다 기업에 정성을 쏟은 사람은 드물 것이라 자부한다. 기업을 전부로 알고 있는 나를 더러는 돈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다”라고 술회했다. 대구는 호암의 기업가정신과 삼성 신화를 되돌아보며 대구 경제 재도약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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