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야” 신생아 안고 대피… 전원 무사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6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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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산후조리원 화재서 빛난 ‘소방훈련의 힘’

29일 오전 불이 난 서울 종로구의 한 산후조리원에서 직원이 흰 포대기에 신생아를 감싸 안고 대피하고 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29일 오전 불이 난 서울 종로구의 한 산후조리원에서 직원이 흰 포대기에 신생아를 감싸 안고 대피하고 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아래층에서 불이 났어요. 아기들 데리고 얼른 대피하세요.”

29일 오전 11시 38분경 서울 종로구에 있는 A산후조리원.

2층 주방에서 점심식사를 한창 준비하던 조리사 B 씨는 비상계단으로 한 층을 뛰어올라와 목 놓아 외쳤다. 다급하게 올라오느라 실내화가 벗겨진 줄도 몰랐다.

B 씨는 멈추지 않았다. 다시 한 층을 더 올라가 계속해서 “불이야!”를 외쳤다. 주방 조리대에서 불길이 솟아오르는 걸 확인한 지 1분 만이었다.

10층 건물에서 2∼4층을 쓰고 있는 A조리원에는 화재 당시 산모 12명과 신생아 17명, 직원 11명 등 40명이 있었다. 불을 처음 발견한 B 씨는 순간 놀라면서도 조리원에서 2개월마다 실시하는 화재 대피 훈련을 떠올렸다고 한다. 각 층 입구와 화장실, 주방 벽면 등 곳곳에 부착된 ‘피난안내도’대로 곳곳을 쫓아가 화재를 알렸다. 이후 곧장 119로 전화해 “조리원에 불이 났다. 아기들이 있어 빨리 와줘야 한다”고 요청했다.

서울 종로소방서에 따르면 이날 화재는 신고 32분 뒤인 낮 12시 12분 완전히 잡혔다. 소방당국은 주방에서 튀김요리를 하던 중 기름이 주변으로 튀며 불이 옮겨 붙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주방 조리대와 벽면 등이 새까맣게 그을려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지만 인명피해는 없었다. 소방 관계자는 “천장이 불에 타 스프링클러가 작동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직원들이 신속하게 대응한 덕분”이라고 했다.

B 씨를 포함한 직원들은 “소방 훈련의 힘”이라고 입을 모았다. 종로소방서에 따르면 A조리원은 지난달 7일 전 직원이 참여해 화재 대피 훈련을 진행했다. 한 산후조리사는 “훈련대로 직원 11명이 두 팀으로 나눠 3, 4층으로 가 흰 포대기에 신생아를 감싸 안았다”며 “각 층 입구로 대피해 있던 산모의 머리 위에도 담요를 덮어씌우고 품에 아이를 안겼다”고 설명했다.

혼자 아이를 안기 힘든 산모들은 직원들이 따로 거들었다. 특히 세 쌍둥이와 쌍둥이 산모들은 직원 3명이 아이들을 품에 안고 비상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갔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덕에 전원 대피까지 14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화재가 발생한 2층의 방화문을 닫은 것도 좋은 판단이었다. 연기가 다른 층으로 확산되는 걸 막았기 때문이다. B 씨가 대피를 안내하고 있을 때, 다른 직원들은 2층 방화문부터 차단했다. 불길이 잡힌 오후 1시 반경 둘러본 화재 현장은 화재가 발생한 2층에서 매캐한 연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위층들은 연기와 불길이 올라온 흔적이 전혀 없었다.

조리원과 20m가량 떨어져 있는 혜화경찰서 교통센터도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 산모와 신생아들의 ‘임시대피소’를 자처해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다. 낮 12시경 센터에서 만난 산모들은 다들 품에 아이를 안은 채 안도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한 조리원 직원이 차분하게 산모들을 진정시키는 모습도 보였다. 세 쌍둥이 엄마도 연신 “고맙습니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실내화가 벗겨진지도 모른 채 산모와 아이들을 챙겼던 B 씨. 오후 1시 10분경 모두가 무사하단 걸 확인한 뒤에야 시커멓게 얼룩진 양말을 벗었다. B 씨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다. 구조 생각만 가득해 맨발인 줄 몰랐다”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종로 산후조리원#화재#전원 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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