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잃어버린 아이에게 희망을 주는 곳
중2 학생에게 대학생 1년간 멘토링 프로젝트 12년째
윤대희 신보 이사장의 희망 씨앗 뿌리는 교육봉사
“아이에게 꿈 주는 대학생들은 밤하늘의 보석, 우리 사회가 희망적인 이유는 청년”
서울 마포 신용보증기금 구사옥을 청년창업 둥지로, 100여개 스타트업 입주
“저는 부모로부터 버림 받은 아이였어요. 어려서부터 할머니와 함께 사는데 나를 버린 친부모를 생각하면 원망과 미움이 커졌어요. ‘버림을 받았다’는 생각에 늘 세상이 원망스럽고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이고 싶은 충동이 있었어요. 그런데 형이 1년 동안 베풀어준 사랑으로 이제는 그런 마음이 사라졌어요. 나도 나중에 대학생이 돼서 남을 돕고 싶고,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거예요.”
서울 외곽의 한 중학교에 다니는 영수(가명)가 대학생 멘토에게 보낸 편지다. 자신을 버린 부모에 대한 원망은 이웃과 사회에 대한 분노가 됐고, 점점 거칠고 비뚤어진 성격으로 변해갔다. 중학교 2학년이 된 어느 날 영수는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방과 후 학교에서 운영하는 1년 과정의 멘토링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멘토인 대학생 형과 저녁도 먹고, 꿈과 희망을 얘기하면서 점차 마음을 터놓게 됐다. 멘토는 외톨이 영수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1년 동안 많은 관심과 사랑을 쏟았다. 어려운 환경에 처한 청소년들이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지 않도록 도와줘 공교육의 빈자리를 메우려는 ‘청소년 멘토링 프로그램’이 일군 성과다.
● 한국판 ‘티치 포 아메리카’ 씨드스쿨을 만들다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국무조정실장이었던 윤대희 신용보증기금 이사장은 퇴임 후인 2009년 대학총장과 목사 등 기독교계 인사들과의 오찬에 초대됐다. 장로교신학대 총장을 지낸 임성빈 교수를 비롯해 대학교수와 전직 장관, 청소년 전문가 등이 뜻을 모아 한국에도 미국의 교육봉사 프로그램인 ‘티치 포 아메리카(Teach For America·TFA)’ 같은 조직을 만들어 교육봉사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얘기가 나왔다. TFA는 미국 동부 명문 대학인 아이비리그 출신들이 사회에 진출하기 전 2년가량 미국의 소외된 지방을 찾아 아이들을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자리에서 꿈을 잃은 아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려면 공교육에서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소외된 아이들에게 눈을 돌려야 하고, 사춘기 시절 사고뭉치가 될 수 있는 중학교 2학년 학생을 상대로 1년 동안 대학생 멘토링을 받도록 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창립 멤버로 우창록 율촌 대표 변호사가 이사장을, 임성빈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와 박경현 샘교육복지연구소장이 공동대표를 맡았다. 윤 전 국무조정실장을 비롯해 이달곤 전 행정안전부 장관, 배규한 국민대 교수, 배종석 고려대 교수, 김성중 장신대 교수, 김영식 좋은교사운동 대표 등이 이사로 참여했다. 기독교에 뿌리를 둔 인사들이 많았다. 김지철 소망교회 담임목사와 이동원 지구촌교회 원로목사, 이장로 한국리더십학교장은 고문을 맡았다. 비영리 교육단체 등록을 위해 이름을 대교단(대한민국교육봉사단)으로 지었다.
● 서울 외곽에서 시작, 경기 강원 경북 중학교까지
“처음엔 서울 외곽 변두리 학교 5~6개 학교를 선정해 멘토링을 하게 됐습니다. 직접 학교에 가보니 학교 건물은 괜찮은데 주변 환경이 너무 열악했습니다. 이사들이 한 학교를 책임지는 식으로 시작했어요. 1주일에 한번 방과후 학교를 열고 한 학교당 30~40명을 선발했어요. 환경이 어려운 사각지대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도록 하기 위해 대학생 멘토를 붙여줬어요. 영어, 수학 같은 과외가 아니라 중2 아이들에게 잃어버린 꿈과 희망을 어떻게 살려내고 용기를 북돋워주느냐에 초점을 맞췄지요.”
대형교회 대학부 청년들이 멘토링 자원봉사로 나섰다. 방과후 학교에 남아 아이들을 돌보려면 돈이 들어가야 했다. 학생과 자원봉사 대학생을 함께 저녁을 먹이는 데 필요한 돈은 이사들이 갹출해 부담했다. 당직교사와 학부모도 초청해 함께 식사하면서 마음을 터놓도록 했다. 자원봉사 대학생들은 멘티를 집에 데려다주는 길에 자비로 빵을 사주기도 했다. 나중엔 입소문이 나면서 무료로 급식을 제공하는 업체도 생겨났다.
무엇보다 대물림된 가난과 소외 속에서 또 다시 대물림할 희망 없는 오늘을 사는 아이들에게 꿈과 용기를 찾아주는 게 급선무였다. 빈곤 청소년 대부분이 학교 부적응에 조기 흡연과 음주를 일삼고, 기성세대의 폭력에 노출돼 정상적인 자아 성장이 어려웠다. 정체성과 자존감을 잃어버린 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다. 아이들이 상실한 꿈과 희망을 어떻게 찾아줄지 찬찬히 열린 마음으로 접근했다.
“빈곤 청소년이 스스로 대물림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선 자존감을 회복시켜줘야 했습니다. 상실한 자존감은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회복하는 데서부터 시작했습니다. 대학생 형을 통해 롤모델을 찾도록 했습니다. 축구 선수, 경찰관, 의사 등 다양한 꿈을 아이들은 꾸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 2때 진로를 단정 짓지 말고 살면서 여러 가지 길이 있다는 점도 일깨워줘야 했습니다.”
● 폐교 위기 학교가 혁신학교가 되다
대학생들의 헌신적인 멘토링을 통해 학교를 바꿔놓는 사례도 있었다. 경기도 외곽의 한 중학교는 마치 1960년대에 멈춘 듯한 마을에 자리 잡고 있었다. 희망도, 미래도 찾기 어려운 그 곳에서 아이들이 하나 둘 떠나면서 폐교 위기에 빠지게 됐다. 무너진 가정과 폭력과 비행, 무기력만이 학교에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어느 날 변화가 찾아왔다. 대학생 멘토들이 2009년 ‘씨드스쿨’이란 이름으로 찾아온 것이다. 당시 그 곳 학생들은 존중을 받은 경험이 별로 없었고 자아 존중과 학습동기도 매우 낮았다. 결손 가정과 조손(祖孫) 가정이 많고 가정형편이 어려워 공부는 뒷전이고, 빨리 돈을 벌고 싶다는 아이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이 곳에 대학생 멘토들이 찾아가 조건 없는 헌신과 응원을 하면서 아이들이 자존감을 점차 회복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의욕이 생기면서 교실이 변했고, 어두웠던 학교에 생기가 돌면서 마을도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대학생들의 헌신적인 멘토링 덕분에 지금 이 학교는 아이들이 떠나는 학교에서 가장 가고 싶은 학교로 변했다. 교육부에서 혁신학교로 선정했다.
‘씨드스쿨’은 나를 발견하는 1학기 ‘상상코칭(12주)’과 꿈에 다가가는 2학기 ‘비전코칭(12주)’으로 1년 동안 운영된다. 이 기간 동안 청소년들은 정체성 발견과 자존감 형성, 재능 개발 등 내면의 성장을 경험하고 변화하게 된다. 중학생은 씨앗을 의미하는 ‘씨드(Seed)’라고 부르고 멘토는 선생님의 준말로 ‘티(T)’라고 칭한다.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2588명의 씨드와 3153명의 T가 활동했다. 2020년 현재 서울에선 북서울중학교 등 2개, 경기에선 덕양중 모현중 의여중 경민여중 일산중학교에서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강원도 고한중과 단구중학교, 경북의 문화중학교에서도 프로그램을 운용하고 있다. 대부분 공교육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교육 사각지대에 있는 학교들이다. 제주도에서도 ‘씨드스쿨’ 요청이 들어왔지만 운영상 애로로 아직 못하고 있다. 지난해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줌으로 온라인 프로그램을 진행해 참여한 멘티가 95명, 멘토는 112명에 달한다.
기초생활수급 대상자와 차상위 계층, 한부모 가정 등 사회적 배려 대상자 및 담임교사 추천 학생들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한라그룹과 GS칼텍스 하나금융그룹 SK(주) 롯데그룹 등이 후원하고 있다.
윤 이사장은 “폐교 위기에 빠진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 씨드스쿨 덕분에 학교가 되살아났다며 고맙다고 할 때 이 모든 게 대학생들의 헌신적인 노력 때문이라고 얘기했다”면서 “교장 선생님이 관심을 가지면 이 프로그램의 효과도 높아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신문과 TV에서 청소년 사건, 사고 뉴스가 보도되면 암울하지만 멘토를 하는 대학생을 보면 우리 사회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다”고 토로했다.
멘토링이 끝날 즈음 T들은 씨드가 쓴 편지를 읽고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나중에 군대에 간 멘토에게 편지를 보내는 아이들도 있고, 멘토링을 한 학교에 정식 교사로 발령 받게 된 대학생 사연도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일부 대기업들의 후원을 받고 있다. 한 대기업에서 많은 돈을 내놓고 이 사업을 직접 운영하고 싶다고 제안했지만 정중히 사양했다고 한다. 특정 대기업이 운영할 경우 기업의 영향력이 너무 커질 경우 풀뿌리 운동으로 되는 것에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 한미FTA 성공을 이끌다
기획재정부에서 잔뼈가 긁은 경제 관료 출신인 윤 이사장은 노무현 정부의 한미 FTA(자유무역협정)를 성사시킨 주역이기도 하다. 노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서 경제정책수석비서관을 맡으면서 한미 FTA 협상을 막후에서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진보 정권에서 한미FTA를 체결하는 데 대해 비판이 많았지요. 미국과 FTA를 맺으려고 한 나라가 무려 25개국이나 됐어요. 노 대통령은 ‘우리 경제가 한 단계 점프하려면 글로벌 스탠더드로 가야 한다’며 ‘한미 FTA를 꼭 성사시켜야 한다’고 주문했습니다. 청년들에게 질 좋은 일자리를 주려면 금융 회계 법률 물류 등 서비스업을 활성화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시장경제에 가장 앞선 나라인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는 것이 중요했어요. 김현종,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협상무대에 있었고, 한덕수 총리와 권오규 경제부총리, 그리고 변양균 정책실장과 제가 뒤에서 지휘를 했습니다. 청와대에 야전침대를 놓고 24시간 모니터링하면서 밤잠을 못자고 협상팀을 독려했습니다. 그 때 FTA를 성사시키지 못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합니다. 청년들에게 보다 좋은 직장을 주려면 서비스업을 활성화하는 것이 급선무였고, 그러기 위해선 한미 FTA는 필수적이었습니다.”
윤 이사장은 경제 관료에서 물러난 후 대한민국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주역들의 생생한 경험과 육성을 듣고 책자로 기록한 ‘코리안 미러클(Korean Miracle)’ 편찬위원으로 활동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과 재경회(경제기획원과 재무부 출신 모임)의 공동 프로젝트로 한국경제의 역사를 후대에 전하고, 개발도상국에 공유하기 위해 2010년부터 발간 작업을 시작했다. 2013년 2월 코리안 미라클 1편 탄생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6권을 시리즈로 냈다. 이 가운데 1편과 외환위기 극복 과정을 담은 3편은 영문판으로도 발간했다. 베트남 우즈베키스탄 에티오피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개도국을 대상으로 경제발전경험공유사업(KSP) 단장을 맡아 한국의 경제발전 경험을 전수하고 정책자문도 했다. 30년 넘는 경제 관료로서의 경험을 후대와 개도국에 전수하는 일에 팔을 걷어 부친 것이다.
● 신보 마포 구사옥을 청년창업 둥지로 내놓다
2018년 6월 신용보증기금 이사장에 취임한 그는 서울 마포의 구사옥을 청년들 창업 공간으로 선뜻 내놨다. 20층 건물에 연면적 1만1000평 규모의 국내 최대 스타트업 사무실이다. 유럽 최대 스타트업 인큐베이터인 프랑스의 ‘스테이션F’가 1만평인 것에 비하면 더 넓은 공간이다. 지금 이곳엔 100여개 스타트업 기업들이 입주해 창업을 불태우고 있다. 스타트업 보육 경험이 있는 금융회사와 벤처캐피탈 엑셀러레이터 등이 입주해 금융 지원과 교육 컨설팅 해외진출 등을 돕고 있다.
윤 이사장은 “스타트업과 관련 기관들이 물리적으로 한 공간에서 만나 서로 네트워킹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면서 이 곳을 ‘프론트원(Front1)’으로 이름 지었다. 신보는 입주기업에 대해 ‘특화보증 프로그램’을 마련해 보증을 서 주고 컨설팅과 민간 투자유치도 주선해 주고 있다.
공공기관인 신보는 본사를 대구로 옮겼다. 윤 이사장은 주민등록지를 서울에서 대구로 이전하고 많은 시간을 대구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고 있다. 지난해 코로나19라는 유례없는 팬데믹 상황을 맞아 집무실과 자택에서 틈날 때마다 신보의 도전 과정과 성과, 앞으로의 포부 등을 담은 ‘신용보증기금 혁신금융의길’이라는 300여 페이지의 책을 직접 집필했다. 윤 이사장은 스타트업 전담부서인 ‘4.0 창업부’와 전국 10개 거점지역의 전담 영업조직인 스타트업 지점에서 보증과 보험 투자컨설팅 등 원스톱 서비스를 졔공하고 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신보는 기획재정부의 2020년도 공공기관 경영실적평가에서 최고 등급인 A를 받았다.
“고교 동창회장을 맡아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주려고 동문들이 1인당 매달 1만원씩 내는 프로그램을 활성화했습니다. 회장은 10만원 내겠다고 하니까 주변에서 말렸어요. 모두가 참여하려면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해야 더욱 활성화된다는 것이죠. 지금 이것이 전국 최고 규모 장학회로 발전했습니다. 씨드스쿨도 이사들이 주위에 기부를 권유하는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확대해나갔습니다. 어떤 사업이든 잘 되려면 ‘그래스루트(grass root·풀뿌리)’ 운동이 돼야 합니다. 청년들에게 희망을 불어넣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윤 이사장의 청년들을 위한 봉사활동은 오늘도 씨드스쿨에서, 그리고 프런트1에서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다. 많은 경제 관료들의 귀감을 살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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