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살, 오디션 프로그램 정상에 올랐지만
아이돌 활동은 데뷔 3년 만에 끝났다.
그 후 13년… 서른세 살이 된 그가
뮤지컬 ‘위키드’ 남자 주인공으로 다시 무대에 섰다
어렵게 데뷔한 뒤에도 늘 ‘그 다음’을 준비해야 하는 게 아이돌의 숙명이다. 쉼 없이 진화해야 하지만 선택지는 넓지 않다. 솔로가수가 되거나 드라마, 뮤지컬 배우로 진로를 바꾼다. 이 역시 인기가 얼마나 더 유지될지 보장되지 않는 길이다. 16년 전 ‘오디션 스타’로 데뷔해 앨범 3장만 남기고 무대를 내려가야 했던 아이돌 가수가 있다. 일본의 무명 밴드로 다시 시작해, 대학로 소극장을 거쳐 유명 뮤지컬의 주연으로 빛나기까지 ‘부러진 날개’로 날았던 그의 13년을 들여다봤다.
99℃:한국산 아이돌 디지털페이지(https://original.donga.com/2021/kpop6)에서 디지털 플랫폼에 특화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보실 수 있습니다.
피, 땀, 눈물로는 부족하다…천운이 필요한 세계
이솔림 SL스튜디오 대표는 2003년부터 18년 가까이 스타를 꿈꾸는 아이돌 지망생들을 위한 아카데미를 운영해왔다. SM 산하 아카데미 시절부터 소녀시대 태연, 샤이니 온유, 엑소 카이 등을 배출해낸 베테랑이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상담을 오는 부모님들에게 그는 아이돌이 되는 건 ‘천운’이 필요한 일이라고 강조한다.
“아무리 비주얼 좋고 실력 좋아도, 본인만 잘한다고 되는 것도 아닌 운명적인 것도 있는 것 같아요. 가능성은 희박하고 경쟁에서 살아남기도 힘들지만, 그래도 원하면 시키시라고 말해요.”
숱한 스타의 탄생을 지켜본 전문가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 세계의 어쩔 수 없는 진실이다. ‘아이돌 고시’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꿈을 이루는 아이들보단 상처받는 아이들이 더 많다. 이 대표는 그런 현실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내 자식이 ‘이걸로 먹고살 수 있을까’를 걱정하는 부모의 심정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옛 제자의 연락을 받고 유독 반가웠던 이유도 그래서다.
“16년 전에 배틀신화라고, 신화가 ‘제2의 신화’를 뽑는 오디션 방송에서 1등을 한 친구가 있어요. 그런데 그 아이돌 그룹이 잘 안되고 솔로도 잘 안되고, 군대 다녀와서 뮤지컬 배우 하다가 이번에 위키드 남자 주인공이 됐다고 해서 (공연) 다녀왔어요. 벌써 서른셋이 됐더라고요. 그때는 열일곱, 열여덟이었으니까 애기였는데…. 지금은 소속된 회사도 없는데 혼자 오디션 봐서 대형 작품을 한다는 게 정말 대단해요.”
‘제2의 신화’로 데뷔한 열일곱 소년, 스무 살에 실패를 마주하다
고등학교 2학년. 열일곱 진태화는 이미 스타였다. 2005년 4월부터 6개월간 방송된 오디션 ‘배틀신화’에서 인기를 얻었다. 데뷔하기도 전에 팬 카페 회원이 1만8000명이었다. 주요 포털사이트 메인에도 얼굴이 걸렸다. 생방송으로 열린 오디션 최종화에서 최종 6인으로 뽑혀 ‘제2의 신화’로 데뷔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대표로 소감을 말해달라는 사회자의 말에 진태화는 웃으며 “신화 형들 존경하고요. 데뷔해서 형들을 꼭 따라잡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해맑은 포부에 신화의 민우는 애정을 담은 쓴소리를 했다.
“지금 선택이 됐다고 가수가 된 건 아닙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고 험하니까 저희가 많이 도와드릴 거고. 결코 순조롭게 가수 생활을 하진 못할 겁니다. 혹독한 훈련 잘 견뎌서 정말 제2의 신화라는 소리 듣게, 멋진 신화가 될 수 있게 저희가 응원하겠습니다.”
그 시절, 자신이 말했던 소감을 다시 들려주자 진태화는 “‘따라가겠다’가 아니고 ‘따라잡겠다’고 그랬어요? 미쳤었네”라며 웃었다.
진태화에게 금방 손에 잡힐 것 같았던 데뷔와 성공은 쉽사리 오지 않았다. 오디션이 끝나고도 계속 미뤄지던 데뷔는 프로그램이 끝난 지 1년이 훌쩍 지난 2006년 12월에야 이뤄졌다. ‘배틀’이라는 팀 이름으로 6명이 데뷔했다. 오디션 당시의 열기는 이미 식었고 일부 팬들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민우가 예고했던 ‘멀고 험한 길’이 실제로 펼쳐졌다. 비슷한 시기 데뷔한 슈퍼주니어(2005년), 빅뱅(2006년) 같은 남자 아이돌 그룹 사이에서 배틀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미니앨범 3집을 끝으로 다음 앨범이 나오지 못했다. 지친 멤버들이 군대를 가기 시작했고 배틀은 사실상 해체됐다. 진태화의 나이 고작 스무 살 때였다.
그룹 해체 후 진출한 일본, 20명 앞에서 공연하기도
“당시에는 스트레스가 컸어요. 거길 계속 두드리느냐, 그 다음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안 들었어요. 뭐 해야 하지? 배운 게 이건데. 할 줄 아는 게 이거뿐인데 뭐하지….”
가수의 꿈을 포기할 순 없었지만, 당장 할 일이 없었다. 다른 회사를 알아보면서 참석하게 된 연예인 축구팀에는 아이돌 활동을 하다 쉬고 있는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 3년 안에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한 아이돌에겐 다음 앨범을 낼 기회가 오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때 진태화에게 일본에서 5인조 그룹 활동을 해보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아예 일본 회사에서 제작하고 일본어로 노래하는 J팝 신인으로 데뷔하는 기획이었다.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일본어를 배우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하지만 “무작정 기다리기보다는 지금이라도 일본에서 활동을 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말에 결심이 섰다.
“무대에 서 있는 게 중요하지. 어디에 서도. 나라든, 뭐든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무대에 서는 게 중요하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진태화는 ‘한류’를 타고 넘어온 가수가 아니었다. 일본에서 진태화가 속한 그룹은 그저 수많은 인디 그룹 중 하나였다. 첫 무대 때는 스무 명 남짓한 관객 앞에서 노래를 했다.
한국 아이돌 그룹은 성공하더라도 대부분 20대 초중반에 활동을 끝낸다. 반면 일본 음악 시장에서는 자리를 잘 잡으면 40대에도 계속 무대에 설 수 있다. 성공하면 큰 돈을 만질 수 있지만 성공하기 전까지는 거의 소득이 없는 한국과 달리 일본은 아이돌 그룹 멤버에게 꾸준히 월급을 준다. 진태화도 일본 활동을 하면서 처음으로 돈을 벌었다. 부모님에게 엔화로 용돈도 드렸다. 진태화의 부모님은 그때 아들이 준 용돈을 차곡차곡 모았다.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쓰지 못했다고 한다.
“아들이 고생할 때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었던 적이 몇 번 있었는데 한 번도 말한 적은 없어요. 제일 힘든 건 본인이니까. 그런데 제가 그 돈을 어떻게 써요. 아들 이름으로 통장에 넣어뒀어요.” (진태화 어머니 홍은경 씨)
스물일곱에 처음 뮤지컬 오디션을 보다
진태화는 조금씩이나마 늘어나는 팬들을 보면서 일본에서 버텨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군 입대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기가 다가왔다. 결국 일본 활동 1년 만에 의경 홍보단에 입대했다. 입대 초반에는 바깥세상 걱정 없이 홍보단 공연에 집중했다.
하지만 전역이 다가오면서 진로 고민이 다시 시작됐다. 일본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때 축구단 활동으로 평소 친분이 있던 김준수가 그에게 뮤지컬에 도전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김준수는 후배인 진태화가 타지에서 다시 바닥부터 가수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제가 활동했던 시기에는 각 그룹 메인 보컬 특색이 제일 중요했거든요. 누가 들어도 ‘아 빅뱅이다’ ‘2NE1이다’ 이런 게 있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었어요. ‘음색은 좋은데 보컬 색이 없다’ ‘네 색을 찾아봐’ 이런 얘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준수 형이 ‘가수로서는 진짜 단점인데 뮤지컬에서는 오히려 네가 할 수 있는 게 많다’고 하더라고요. 튀지 않으니까 오히려 맡을 수 있는 배역이 많다고….”
진태화는 2015년 대극장 뮤지컬 ‘드라큘라’ 첫 오디션을 봤다. 뮤지컬 수록 곡을 연습하면서 녹음해 김준수에게 ‘검사’를 받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했다. 오디션 준비에 집중하던 때 운동을 하다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가 있었다. 진태화는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고 오디션을 봤다. 제작사 대표가 그런 모습을 “열정이 있다”고 평가해줬다. 진태화는 첫 작품에서 조연을 따냈다.
하지만 그는 첫 공연 이후 대학로 소극장의 문을 두드렸다.
“주변에서는 ‘와, 대극장 작품으로 데뷔했네’라고 하는데 스스로는 속이 허전했어요. 뮤지컬은 관객분들이 10만 원 넘는 돈을 내면서 나를 보러 오도록 만들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소극장 공연을 하면서 섬세한 연기를 배우고 성장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소극장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대학로에서 탄탄하게 입지를 쌓은 배우들에게 계속 밀렸다.
“그때 제 인생의 바닥을 본 것 같았어요. 오디션 보는 족족 떨어졌어요. 6개월 동안. 웬만한 작품 한 번씩은 다 떨어져봤어요. 그러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운이 좋게 들어가게 됐어요. 그것도 오디션 때는 안 됐거든요.”
그렇게 한 번 소극장의 문을 열자 두 번, 세 번은 조금은 더 수월했다. 지난해 8월엔 소속사를 나왔다. 소극장에서 진득하게 실력을 쌓자고 생각하니 소속사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지 않았다. 마침 글로벌 유명 뮤지컬인 ‘위키드’ 오디션 소식이 들려왔다. 진태화는 남자 주인공 ‘피에로’ 역에 지원했다. 길어야 10분이면 끝나는 오디션을 30분이나 봤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합격했다’는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더블 캐스팅(한 역할에 두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된 배우는 그보다 10년이나 경력이 많은 서경수였다.
아이돌의 생명은 실패한 아이돌에게만 짧은 것이 아니다. 성공하더라도 7년을 넘기기 어렵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아이돌 전속계약 기간을 최대 7년으로 제한해 대다수가 7년 계약을 맺고 활동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계약이 끝날 때쯤 이들은 ‘아이돌’이라는 타이틀을 달기엔 많은 나이가 된다. 남자라면 입대를 늦추기 어려운 시점이 된다.
“데뷔 3년차부터는 항상 그런 고민을 했었던 것 같아요. ‘팀이 평생 갈 수는 없을 텐데, 헤어지기는 싫다’는 생각을 하면서요. 그런데 그 헤어짐이라는 게 현실로 찾아오니까, 이제 다시 못 보는 것도 아닌데 너무 속상했죠.” (산다라박, 2017년 4월 2NE1 해체 후 인터뷰)
재계약 시점이 다가오면 기획사와 아이돌 간에도, 아이돌 내부에서도 셈법이 복잡해진다. 스타덤에 오른 경우라면 재계약할 때 아이돌 그룹이 ‘갑’이 된다. 두 번째 계약 기간에 기획사가 가져갈 수 있는 수익이 줄어드니 합의가 잘 이뤄지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성공한 아이돌 그룹 내부에서도 인기가 더 높은 멤버와 그렇지 않은 멤버는 원하는 것이 다른 경우가 많다. 연기 등 다른 활동으로 새 길을 찾으려는 멤버는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서 다같이 수익을 나누는 아이돌 활동을 이어가고 싶지 않을 수 있다.
‘위키드’ 주인공 됐지만, ‘오디션 인생’은 계속된다
5월 2일 ‘위키드’ 서울 마지막 공연 날. 마지막 장면이 끝나자 관객석에서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남자 주인공 ‘피에로’ 역을 맡은 진태화는 작별 무대인사에서 울음이 터져서 공연 소감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위키드라는 작품은 소속사 계약을 끝내고 저 혼자 힘으로 배역을 따냈다는 의미가 컸어요. 첫 대극장 남자 주인공이기도 했고요. 안 울려고 했는데 음악 감독님이 저를 바라보시니까. 그 음악 감독님은 제가 아무것도 아닐 때부터, 다른 작품 오디션 때부터 처음으로 절 봐주셨거든요. 그 감독님이 나를 보고 있는 걸 보면서 울컥하더라고요. 대극장 공연에서는 운 적이 없는데….”
2006년 데뷔했던 배틀 멤버 중에서 지금까지 무대에 서는 사람은 진태화뿐이다. 다른 멤버들은 무대 밖에서 삶을 꾸려가고 있다. 연기 레슨을 하거나, 카페를 운영한다. 건설업으로 방향을 튼 멤버도 있다. 멤버들은 지금도 단체 카톡방에서 사는 얘기를 나눈다.
“숙소 생활도 했었고. 연습생 때부터 10, 20대 초중반, 가장 빛날 수 있고 또 힘들 수 있던 시간을 같이한 애들이다 보니까…. 저희 멤버들의 목표는 ’뭘 하든지, 어디서 뭘 하든지, 한 명이라도 잘되자‘예요.”
배틀은 2019년 Mnet의 한 음악 프로그램에서 11년 만에 함께 무대에 섰다. 오래된 팬들에게 추억거리를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이후 잊혀진 가수를 재조명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출연 제안이 오기도 했지만 그 방송은 나가지 않았다.
“멤버들도 경연이라는 말에 좀…. 그냥 우리가 냈던 앨범을 다시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면 괜찮은데 또 그 안에서 치열하게 경연해야 한다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진태화가 지금 발 딛고 있는 뮤지컬이란 세계도 유명 작품의 주연을 했다고 해서 안정적인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계속 무대에 남아있으려면 제작사에서 먼저 찾아주는 배우가 되거나 오디션을 통해 계속 배역을 따내야 한다. 초등학생 시절 지역 KBS 합창단과 톰키즈 아동복 모델 오디션, 고등학생 시절 SM과 배틀신화 오디션에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뮤지컬 오디션까지….
올 4월 취재진과 처음 만난 날, 자신의 시간을 돌아보던 진태화는 “인생이 오디션이네요”라고 말했다. 뮤지컬에 새로 도전하려던 그 무렵, 진태화는 어깨에 “Take these broken wings and learn to fly(부러진 날개로 나는 법을 배워라)”라는 영문 문신을 새겼다. 비틀스의 명곡 ’블랙버드(Blackbird)‘의 한 구절이다.
“꼭 나를 대입시키는 건 아니고 그냥,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이런 걸 영어로 써봤어요. 저는 항상 차악까지는 생각을 해요. 최선과 차선과 차악까지는 생각을 하자. 원하는 대로 되면 좋은데, 안 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자기만족 할 수 있지만 불안함을 항상 갖고 있을 수밖에 없는 직업이에요. 그래도 워낙 많은 걸 겪어서…. 힘들어도 봤고. 지금은 옛날보다 더 힘들지는 않으니까요. 뮤지컬로 분야를 바꾸기는 했지만 꾸준히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스스로 기특하게 생각해요.”
방탄소년단(BTS)이 미국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다는 소식이 더 이상 놀랍지 않은 시대가 저절로 온 것은 아니다. K팝 아이돌을 세계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동력이 무엇인지 찾다 보면 낯익은 표현과 만나게 된다.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
’한국산 아이돌‘은 10대의 젊음을 태워 만들어진다. 열망이 뜨거워질수록 적자생존이 지배하는 냉혹한 이 세계로 어린 지망생들은 계속해 몸을 던진다. 살아남은 소수가 다수의 좌절 위로 한 걸음씩을 내디디며 K팝은 여기까지 왔다. 아이돌을 향한 우리의 시선은 그래서 뜨겁지만 동시에 차갑다. 1996년 H.O.T. 데뷔 이후 25년간 해외 시장을 두드려 BTS 같은 스타를 배출했다는 자부심과 노동집약적 압축 성장을 추구해 온 한국적 상품이라는 비판이 공존한다.
어떻게 바라보든 K팝은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끓는점 100도를 향해 마지막 1도를 끌어올리려 분투하는 ’99도 한국산 아이돌‘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동아일보는 창간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부터 지속적으로 히어로콘텐츠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히어로콘텐츠팀의 ’99℃: 한국산 아이돌‘은 동아일보가 지켜온 저널리즘의 가치와, 경계를 허무는 디지털 기술을 융합한 차별화된 보도를 지향합니다. 기존에 경험할 수 없었던 디지털 플랫폼 특화 보도는 히어로콘텐츠 전용 사이트(original.donga.com)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히어로콘텐츠팀
▽팀장: 김도형 기자 dodo@donga.com
▽기사 취재: 김배중 임보미 위은지 기자
▽사진·동영상 취재: 송은석 기자
▽그래픽·일러스트: 김충민 기자
▽편집: 홍정수 기자
▽프로젝트 기획: 이샘물 이지훈 기자
▽사이트 제작: 디자인 이현정, 퍼블리싱 조동진 김하나, 개발 최경선 박유열
99℃:한국산 아이돌 디지털페이지(https://original.donga.com/2021/kpop6)에서 디지털 플랫폼에 특화된 인터랙티브 기사를 보실 수 있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