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아의 100세 카페-‘이런 인생2막’
“내겐 아직 꿈이 있다” 최학배 하플사이언스 대표
‘인류에게 건강하고 행복한 노년을 선물하자’
퇴직후 대학동기와 손잡고 항노화 신약 개발 나서
창업 2년 만에 327억 원 투자유치
“이 나이가 된 지금, 매일 가슴 뛰고 행복하다”
최학배 하플사이언스 대표(64·전 한국콜마 대표)는 평생 제약회사 테두리 안에서 살았다. 삶의 가치를 ‘회사를 가꾸고 사원들을 챙기고 좋은 약을 만들어 사회에 기여하는 것’에 뒀다. 그런데 첫 퇴직을 전후해 마음이 헛헛해졌다. 분명 평생을 열심히, 잘 살아왔는데, 되돌아보니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다 만 장작 같은 불완전연소감이 밀려왔다.
“누구나 한번 태어나서 때 되면 돌아가는 건데, 돌아보니 뭐 하나 뚜렷한 게 없었습니다. 내 존재의 가치를 뭔가 남기고 가고 싶다, 지금 그만두기엔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죠.”
현역에서 물러날 즈음 많은 사람이 느끼는 가장 허탈한 부분이 이것 아닐까. 예순을 앞둔 ‘아재’의 자아 찾기가 시작됐다. 평생의 경험을 살려 스스로를 활활 불사를 그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뒷방 늙은이가 되기 싫어서”
최학배 대표는 서울대 약대 76학번이다. 1985년 JW중외제약에 입사해 개발본부. 마케팅본부, 글로벌사업 담당 등을 두루 거쳤다. JW중외제약과 일본 주가이제약이 합작한 C&C신약연구소 대표이사를 끝으로 2015년 퇴임했다. 현역시절에는 차세대 항암제와 아토피 치료제, 통풍 치료제 연구개발과 임상 및 라이센스 업무를 주도해왔다.
C&C 신약연구소 대표이사에서 퇴임하면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라는 고민이 시작됐다. 당시 본사에서는 고문직을 제안했지만 ‘뒷방 늙은이가 되기 싫어’ 거절했다고 한다.
“5개월 정도 쉬었습니다. ‘갈 곳을 마련해놓고 그만둘 걸’ 하는 후회도 잠시 있었지만, 고문이라는 식으로 2선으로 물러나는 삶 자체가 싫었습니다.”
2016년부터 한국콜마의 제약사업담당 사장을 거쳐 대표이사로 일하게 됐다. 그로부터 퇴임까지의 2년여는 이런 고민을 구체화하고 대안을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그 무렵 제약기업에 근무하는 서울대 약대 동창모임인 ‘관악포럼’에서 패널을 맡게 됐습니다. 외국계회사와 대형제약사에 안주하는 후배들에게 제 심경을 말했습니다. ‘월급쟁이 생활에 안주했더니 이런 아쉬움이 생기더라. 안전한 월급쟁이 삶에만 취해 있지 말고 자신의 사업에 도전하라. 꿈을 크게 갖고 도전하는 주도적인 삶을 살라’고. 그건 저 자신에게 한 말이기도 했지요. 창업에 대한 생각이 많이 정리되고 굳어졌습니다.”
○“후배들아, 월급쟁이에 안주하니 나중에 아쉬워지더라”
바이오벤처와 벤처캐피탈 업체 인력들의 모임(영등포와 구로디지털단지에 있는 바이오벤처들이 중심이 돼 ‘영구모임’이라 불렸다)도 그에게 동기부여를 해줬다. 이들을 접하며 C&C신약연구소에서 진행했던 ‘퍼스트 인 클래스’(계열내 최초의 혁신신약) 개발에 대한 그리움과 갈증이 몰려왔다. 한국콜마는 아쉽게도 제네릭 개발을 통한 위탁생산 사업 중심이었다.
여기 더해 오너 중심 회사가 아닌 임직원 공동체 성격의 회사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욕구도 채워지지 않은 채였다.
-한국콜마 대표이사 임기를 앞당겨 그만뒀다고 하시던데. 이번엔 ‘준비된 퇴직’인가.
“그때 그만두는 게 여러모로 맞았어요. 슬슬 정리해야 할 때다, 이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마침 바이오벤처를 함께 만들어보자는 지인도 있어 사업계획을 논의하기 시작했지요.”
-하플사이언스의 시작인가요.
“먼저 각 대학에서 연구 중인 과제들을 조사해나갔습니다. 혁신적인 새로운 치료제를 개발해 사회에 기여하고 보람을 찾을 수 있었으면 했지요. 사업화까지 할 수 있는 아이템이 좀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서울대 약대 동기인 김대경 중앙대 교수가 노화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연구를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오랜 경험으로 ‘물건’을 찾아내고 다듬는 전문가인 최 대표의 눈이 빛났다.
“연구 성과물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잘 하면 노화의 근원적이고 새로운 치료방법이 될 수 있다고 봤어요. 부족하지만 내가 한번 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김 교수가 10여 년 간 쌓아온 탄탄한 학문적 기반과 연구 성과, 앞으로 추가될 성과까지를 제품개발과 연계시켜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도움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대한민국 최초의 항노화 신약 개발 벤처기업 ‘하플 사이언스’가 2018년 11월 탄생한다. 그의 두 번째 퇴직 뒤 8개월만이다.
○서울대 약대 동기가 의기투합, 공동창업
하플사이언스의 공동창업자이자 CSO(최고과학책임자)를 맡은 김대경 교수는 연구 외길을 걸어온 인물이다. 서울대 약대 졸업 후 도쿄대 대학원에서 생명약학 박사를 받았다. 포항공대와 하버드대 등을 거쳐 1994년부터 중앙대 약대에 적을 뒀고 지난해 8월 정년퇴임했다.
이들이 꿈을 건 신약후보물질은 하플(HAPLN1·Hyaluronan And Proteoglycan Link Protein)이란 유전자재조합 단백질이다. 김대경 교수는 인간의 노화현상을 극복할 해답이 인체 내에 있다고 보고 노화에 따른 혈액 성분 변화에 주목했다. 젊은 쥐와 늙은 쥐의 혈액이 서로 통하도록 ‘병체결합’했을 때 늙은 쥐의 피부조직이 젊어졌고, 그것을 유도하는 물질이 하플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체내에 존재하는 단백질 하플이 항노화에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콜라겐, 히알루론산을 생성해 노화로 손상된 조직을 복구시키는 것이다.
하플이 제대로 작동하면 연골이 퇴화돼 일어나는 골관절염이나 폐포가 나빠져 생기는 만성폐쇄성 폐질환(COPD) 등에서 조직을 재생시켜 원상태로 되돌릴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현재 가능성을 확인한 신약 파이프라인(연구개발 프로젝트)은 골관절염, 만성폐쇄성폐질환, 모발, 피부 등 4가지. 회사는 우선 골관절염과 폐질환 두 가지에 집중하기로 했다.
○“제 평생 요즘처럼 가슴 뛰고 즐거운 때는 없었습니다.”
최 대표가 근무하는 하플 사이언스는 경기도 성남시 판교동에 자리해 있다. IT기업을 비롯한 신생 첨단기업들이 들어선 판교밸리 내 빌딩에 10층 사무실, 3층에 연구소가 들어서 있다. 세련되고 깔끔한 건물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대부분이 젊고, 옷차림도 가볍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도 날 기다리는 다이내믹한 일이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뜁니다. 더러 ‘뭘 그렇게 악착같이 살려 하느냐’는 분들이 있지만 이 맛을 몰라서 그러시는 겁니다. 젊은이들 틈에서 호흡하고 있으니 마음도 젊어집니다. 오늘은 이런 복장이지만 평소에는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일 때가 많습니다.”
현재 회사 인력은 31명. 이중 연구개발 인력이 24명이다. JW중외제약과 한미약품, 녹십자 등에서 근무하던 인력이 임원진으로 영입됐고 연구개발 인력은 김대경 교수가 배출한 박사 5명 중 4명이 합류하는 등 전문가들이 포진했다.
○판교밸리에서 첫 발, 2년 만에 총 327억 원 투자유치
여느 회사가 그러하듯 2018년 11월 창업초기 가장 큰 어려움은 인재와 자금이었다. 그러다가 창업 반년 여만인 2019년 7월 시리즈A로 100억 원, 지난해 12월 시리즈B로 227억 원의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시리즈A, B, C는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방식인데 시리즈 A는 최초 투자금이 되는 시드머니, B는 기술이 본격적으로 상품화되는 단계의 투자, C는 시장을 늘리는 단계의 투자를 말한다.
업계에서는 설립 2년만에 330억 규모 대규모 자금유치는 극히 이례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만큼 투자가치를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투자유치에 성공하니 저절로 인력 확보에도 숨통이 트였다. 회사의 장래에 기대하는 투자가들이 많다는 점에 더해 연구 인력에 대한 대우도 강화할 수 있었다.
“요즘 벤처 기업은 꿈만 먹고 사는 건 아닙니다. 제대로 대우해줘야 젊은 연구 인력이 오더군요. 어찌됐건 하루빨리 고통받는 환자들을 근본적으로 치료하는 약제를 개발하고, 소중한 돈과 시간을 우리 회사에 바쳐준 임직원과 투자자들에게 확실한 보상이 이뤄질 수 있도록 성장하고자 합니다.”
○인류 노년의 삶 바꾸는 신약 ‘내 손으로’
지난 5월 회사가 학회를 통해 발표한 그간의 동물실험 결과를 보자. 가장 앞서가고 있는 것은 골관절염 치료제(HS-101)다. 치료제를 주사한 염소에서 연골이 재생되고 관절염 증상이 개선되는 결과를 확인했다<그림1>. 만성폐쇄성 폐질환 치료제(HS-401)를 주사한 쥐에서는 손상된 폐포의 기능이 개선된 모습이 보였다<그림2>.
“두 파이프라인 모두 폭발적인 성장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골관점열 발병률은 전 세계 인구의 9%에 육박하지만 연골 재생에 명실상부하게 인정받은 약물은 없는 실정입니다. 만성폐쇄성 폐질환도 전 세계에 3억 명이 넘는 환자가 있지만 시장에 유통되는 약은 점액 분비나 기관지 확장을 억제해 증상을 완화하거나 진행을 지연시키는 데 불과하죠.”
지난해 하반기부터는 세포치료학회에서 ‘올해의 가장 우수한 재생의약품 파이프라인’ 상을 받았고 글로벌 전문지 ‘스타트업 시티’가 선정한 ‘올해의 바이오테크 스타트업(아태지역)’에 선정되는 등 해외로부터도 주목받고 있다.
회사는 올해 말 미국 FDA에 골관절 치료제 임상시험계획을 신청할 계획이다. 폐질환 치료제도 2022년 임상 1상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임상에 들어가면 천문학적 투자가 필요하므로 아예 준비단계에서 글로벌 제약사를 파트너로 하기 위해 뛰고 있다. 2024년에는 기업공개(IPO)에 도전할 계획이다.
○“75세까지는 현역으로 일할 생각”
21세기는 전 세계에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노인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다. 노인성 질병을 근본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약물의 수요는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반면 본래 신약 개발의 세계는 ‘모 아니면 도’다. 일반적으로 임상시험에 들어간 바이오의약품의 성공률은 15%에 불과하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신약 개발의 길. 예기치 않은 난관을 만나 생각대로 일이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까. “제약사는 한 가지만 만드는 곳이 아닙니다. 신약개발에 매진하는 한편으로 꾸준하고 안정된 먹거리도 반드시 마련해둬야죠.”
이런 그는 75세까지는 현역으로 일하고 싶다고 말한다. “CEO니 대표니, 자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 넘겨주고 고문으로 일하며 다른 바이오벤처들의 출범을 돕고 여력이 있다면 투자도 할 수 있겠죠.”
사실 그는 조건이 매우 좋은 편이다. 명확한 전문성을 갖추고 평생 해오던 일에서 쓸모를 찾아냈으니 말이다. 한국의 시니어 중에는 평생 자신을 갈아넣으며 열심히 해온 일이 막상 사회에서는 별 쓸모없었다는 현실을 뒤늦게 깨닫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도 그는 열심히 말한다.
“제 좌우명은 ‘인생은 언제나 지금부터’입니다. 정년이라 해서 사회적으로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을 너무 빨리 포기하는 것 아닌가요. 우린 주로 직장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살아와서 그 틀을 벗어나면 할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지만, 실제 도전해보면 다릅니다. 필요한 건 상상력과 호기심, 용기일 뿐이죠.”
○“인생의 의미 찾기 위해 창업했다”
6월 경 ‘100세 카페’에 노화에 대해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이라 규정짓고 도전하는 세계 의학계의 움직임을 모아 소개한 일이 있다(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210606/107286720/1). 기사가 나간 날 “한국에도 그런 연구를 하는 곳이 있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기사에 나오는 미국 대학처럼 자신들도 젊은 쥐와 늙은 쥐의 ‘병체결합’을 통해 노화를 이길 방법을 연구하고 있노라고…. 최학배 하플사이언스 CEO였다.
그에게 “죄송하지만 잘 몰랐다. 관심을 갖고 공부해보겠노라”고 답장을 보낸 뒤 홈페이지와 관련기사들을 검색했다. 국내 최초 항노화 신약 개발기업, 골관절염·만성폐쇄성폐질환 치료제 개발 박차…. 솔직히 연구내용의 성패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기자가 판단할 수 없다. 다만 출범 만 2년 만에 누적 327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고 중외제약, 한국콜마 등 내로라 하는 제약회사의 개발자 겸 최고 경영자로 일한 분이 바이오벤처 창업에 나섰다는 점은 놀라웠다. 여기에 김대경 CSO까지, 환갑을 넘긴 대학 동기들이 아무도 도전하지 않던 분야에서 신약을 개발하겠다는 것 아닌가.
더욱 매료시킨 것은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라는 그의 창업 동기였다. 인류의 노년을 바꾸겠다는 꿈에 도전해 자신이 살아온 보람을 찾고 싶다는 것이다. 60대에 이르기까지 순탄한 길을 걸어온 그가 ‘왜 사서 고생하느냐’는 핀잔을 들어가며(그 스스로도 ‘공연히 노년의 삶이 피곤해지는 것 아닌가’라는 걱정이 들었다고 한다) 도전장을 던지는 그 마음을 잘 알 것도 같았다. 100세 카페 내에 ‘이런 인생2막’ 코너를 신설하자는 생각도 그를 비롯한 몇몇 분들을 보고 굳어졌다.
두려움을 딛고 내딛는 그들의 도전이 부디 좋은 성과로 이어지길 빈다. 그의 꿈이 실현된다면 한국의 바이오벤처 시장에도, 우리 모두의 노년의 삶에도 또다른 풍요로움을 안겨줄 테니까. 퇴직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그가 증명해줬듯, 다시 한 번 꽃피울 그 무언가를 준비하는 시니어들에게 더 큰 희망을 줄 수도 있을 테니까.
※알립니다.
100세 카페에서는 ‘이런 인생 2막’ 제하에 멋진 인생 2막을 만들었거나 준비하는 독자 사례를 소개하는 코너를 만들고자 합니다. 살아온 길과 경력은 제각각이지만 나름의 보람을 갖고 열심히 사시는 분, 멋진 노후라고 박수 받을만한 분, 다른 분들의 노후 설계에 참고가 되거나 공유하고 싶은 분들의 사연을 소개해주십시오. 자천타천 모두 좋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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