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HD는 남자아이 질병” 편견에 소외 된 여성들
남성과 증상 같아도 기분장애, 불안장애 오진 많아
“여성 특성 고려한 진단 기준, 도구 부족”
버스를 타면 제대로 내릴 때보다 잘못 내릴 때가 더 많다. 책을 읽으면 앞 문장이 기억나지 않아 몇 번이고 되돌아가야 한다. 학창 시절, 친구들이 2주 전부터 시작하는 시험공부를 한 달 전부터 시작했다. 남들만큼 성과를 내려면 그들보다 몇 배의 시간을 쏟아 부어야 했기 때문이다. 항상 덜렁대고, 산만하고, 불안하고…. 일상이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큰 문제라는 생각은 안 했다. 서른이 다 돼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진단을 받기 전까지는. ‘나는 오늘 나에게 ADHD라는 이름을 주었다’를 쓴 임상심리학자 신지수 씨(31) 얘기다.
● “내가 ADHD라고? 머릿속 안개가 걷혔다”
신 씨가 진단을 받게 된 과정은 독특하다. 어느 순간 환자들에게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상담 받으러 온 초등학생보다 주의력이 떨어진다는 걸 느꼈다. 신 씨는 “환자들을 기만한다는 생각, 죄책감이 들었다”고 했다. 몇 달 간 진단을 망설이다 2019년 겨울 충동적으로 검사실로 들어가 자가진단을 했다.
‘저하’, ‘억제지속 주의력, 간섭선택 주의력에 문제가 있음을 시사함.’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컴퓨터 화면에 뜬 결과를 보자 숨이 턱 막혔다. 환자들의 첫 반응이 대개 그렇듯이 ‘정상’이나 ‘평균’에서 비껴나 있다는 걸 인정하기 어려웠다. 11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신 씨는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결함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게 쉽지 않았다”며 “스스로도 장애에 대한 편견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병원에서 진단까지 받고나자 안도감과 아쉬움이 교차했다. 신 씨는 “내 행동의 이유를 알게 되면서 머릿속의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아쉬움 혹은 분노는 성인이 돼서야 뒤늦게 ADHD 진단을 받은 환자 대다수가 겪는 감정이라고 한다.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인생이 더 행복하고 효율적이었겠죠. 학창 시절엔 숙제를 잊었거나 딴 짓 한다고 늘 혼났던 기억밖에 없어요. 남들이 4~5시간이면 할 일도 저는 20시간이 걸렸어요. 그렇게 에너지를 다 쏟고 나면 다른 걸 못하죠. 그래서 별다른 취미도 없어요.”
신 씨가 전공을 선택한 과정도 흥미롭다. 학창시절 내내 임상심리학자가 되고 싶었는데 대입 지원 기간에 이를 깜빡하고 즉흥적으로 미디어 관련 학과에 원서를 냈다. 의도하지 않게 관심사가 ‘주의 전환’ 된 탓이다. 신 씨는 “ADHD 환자들의 주요 증상이 주의 조절에 어려움을 겪는 건데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서 그렇게 나타날지 몰랐다”며 웃었다.
● 진료실 밖, ‘조용한 ADHD’ 환자들
진단을 받은 뒤 신 씨는 ADHD가 더 궁금해졌다. 알아갈수록 이상했다. ADHD 연구에서 여성의 존재는 희미했다. ‘ADHD=천방지축 남자아이의 질병’이라는 젠더적 편견 때문이다. 신 씨는 “ADHD는 과잉행동·충동형, 부주의형, 복합형 등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남성에게 주로 나타나는 과잉행동·충동형만 부각되면서 부주의형이 많은 여성 ADHD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일을 시작하기 어려워하고, 업무의 순서나 경중을 파악하는 데 서툰 ‘조용한 ADHD’ 환자들이다. 이들은 진단 기회조차 얻지 못하거나 기분장애, 불안장애 등 다른 질환으로 오진되기 일쑤였다.
그는 책에서 이런 젠더적 편견을 지적한 다양한 연구를 소개한다. 미국에선 정신과를 찾은 ADHD 아동의 남녀 성비가 10대 1이었는데, 지역사회 조사에선 3대 1로 격차가 줄었다는 연구(2002년)도 있었다. 남성 ADHD 환자 중 46%가 약물 치료를, 38%가 심리 치료를 받는 반면 여성은 각각 6%, 8%에 그친다는 연구(2007년)는 여성 ADHD 환자들이 진단과 치료에서 얼마나 배제돼 왔는지 보여준다. 신 씨는 “진단받기 전까진 ADHD를 반쪽만 알았던 셈”이라고 말했다.
그나마 해외에선 이처럼 젠더적 편견을 극복하려는 연구가 지속되고 있지만 한국은 아직 변화가 더디다. 국민건강보험공단 통계를 보면 2017년 ADHD 진료 인원은 5만2994명. 남성 환자(4만2398명)가 여성의 4배에 이른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홈페이지엔 ‘성별 주의질병 정보’를 안내하며 ADHD를 ‘남성이 조심해야 할 질병’으로 분류하고 있다.
정신과 진단을 두려워하던 예전과 달리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알고 싶어 하는 여성이 늘고 있지만 현장에선 이를 다 수용하지 못하는 한계도 있다. 여성의 ADHD 유형을 파악할 진단 도구나 기준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신 씨는 “검사와 진단 기준이 학업이나 직장생활에서의 어려움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다”며 “가사나 대인 관계, 정서 조절의 어려움 등 여성 ADHD 환자들이 주로 겪는 어려움을 놓치기 쉽다”고 지적했다.
● 병원 문 두드리는 여성 ADHD 청소년들
앞으로도 환자들을 마주해야 하는데 질환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데 부담은 없었을까.
“특별히 용기를 내거나 불이익을 감수할 일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어요. ADHD는 다른 정신질환보다 일상 복귀가 쉽고, 치료를 받으면 호전될 수 있는 질환이니까요. 또 여성 ADHD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데 학자이자 직업인으로서 화두를 던져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었죠.”
그가 ADHD 경험을 털어놓은 유튜브 영상에는 공감한다는 댓글이 줄을 이었다.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주를 이룬다. 어딘가 부족한 스스로를 다그치기만 했던 지난날을 반성하는 독자들도 있다.
신 씨는 여성 ADHD 환자에 대한 관심이 단순히 여성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질병을 더 입체적으로 들여다봐야 배제되는 환자들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 남성 ADHD 환자의 댓글을 소개했다.
“저 역시 조용한 ADHD라 진단이 늦었습니다. 처음엔 작가님이 왜 이를 여성만의 문제로 여기는지 화가 났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니 배제되는 여성 ADHD를 논의하는 것이 같은 유형의 남성 ADHD 환자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긍정적인 변화도 감지된다. 여성 ADHD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콘텐츠가 많아지면서 부모를 설득해 병원을 찾는 여성 청소년이 늘고 있는 것. 신 씨는 “초등학교나 학원 선생님들 중에도 여자 아이들을 더 세심하게 관찰하게 됐다는 얘기를 해 줄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 스마트폰 멀리하고, 줌 열고 청소
책에는 1년 동안의 투약일기도 담겨 있다. 약 복용을 깜빡해 우울증을 겪기도 했고, 복용량을 의사와 상의 없이 무리하게 늘렸다가 후회한 적도 있다. 좌충우돌 투약일기를 가감 없이 공개한 건 다른 환자들은 그런 시행착오를 줄였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신 씨는 “처방받은 양만큼 먹고 컨디션이 좋아지면 복용량을 늘리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나중에는 더 먹어야 하는 이유까지 억지로 만들 정도로 약에 더 의존하게 된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주의력이 분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신 씨는 스마트폰을 멀리한다. 일부러 충전을 안 하거나 이불 속에 넣어두기도 한다. 검색이나 각종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주의를 빼앗겨 7~8시간씩 스마트폰을 붙들고 있던 경험이 있어서다. 대신 적절한 자극을 위해 음악을 자주 틀어 놓는다.
일에 시동을 거는 방법도 터득했다. 책상 옆에 낮고 폭신한 소파를 둬 일단 침대 밖으로 몸을 끄집어내는 것, 논문을 써야 하는데 시작이 힘들다면 파일이라도 띄워 놓는 것, 주의가 쉽게 분산되는 것을 고려해 거실과 방에 컴퓨터를 따로 두고 작업 환경을 바꾸는 것 등이다.
하기 싫은 일의 동기부여를 위해 줌(Zoom)도 활용한다. 설거지나 청소를 너무 하기 싫을 때 친구들과 줌을 켜놓고 집 정리를 하는 식이다. 신 씨는 “누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것 때문에 각성도 되고, 웃고 떠들며 집안일을 하면 하기 싫다는 감정도 덜 느껴진다”고 말했다.
“상담하러 온 여성 중에는 스스로 감정을 억누르다 증세가 악화된 분들이 많아요. 여성의 정신건강을 무너뜨리는 요소 중에는 본인의 기질도 있지만 사회적 억압, 고용 불평등 등 외부적 요인도 큽니다. ‘내 탓’만 하며 스스로 고립되기 전에 전문가를 찾아야 하고, 의사와 상담가들도 젠더적 편견에 갇힌 게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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