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0년 전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가 뒤늦게 소송을 청구했더라도 가해자가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손해배상 청구권 유효 기간의 시작은 ‘성폭행으로 입은 피해’가 현실적으로 나타난 시점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취지다.
대법원 3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19일 ‘체육계 1호 미투’ 김은희씨가 A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김씨는 지난 2018년 A씨가 자신을 과거 성폭행했다고 주장하며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했다. 그는 체육계에서 벌어진 성폭력을 가장 처음 폭로해 이른바 ‘체육계 1호 미투’로 불렸다.
테니스 코치였던 A씨는 2001~2002년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인 김씨를 여러 차례 성폭행한 혐의를 받는다. 김씨는 성인이 된 2012년에서야 미성년자 성폭행의 공소시효가 폐지된 것을 알고 A씨를 고소하려 했으나 증거수집 등이 어려워 좌절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던 중 김씨는 2016년 한 테니스 대회에서 A씨를 다시 만났고, 성폭행 피해 당시 기억이 떠오르며 충격을 받아 결국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진단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이후 2017년 다른 피해자의 증언 등을 확보해 고소를 진행했고, A씨는 2018년 징역 10년이 확정됐다. 또 김씨는 PTSD 등을 이유로 1억원을 지급하라며 소송을 냈다.
이 사건의 쟁점은 오랜 시간 전 성폭행을 당해 그 피해가 뒤늦게 발생했을 경우, 손해배상 청구에 관한 권리가 언제까지 인정되는지였다.
민법 766조 1항은 피해자가 불법행위로 입은 손해를 알게 된 날부터 3년 이내에 손해배상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같은 법 2항에는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10년까지 권리가 존재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1심은 A씨가 답변서를 내지 않아 무변론으로 이뤄졌고 법원은 김씨에게 1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항소심 과정에서 A씨는 김씨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이미 소멸됐다고 주장했다. 범행이 발생한지 10년이 이미 지났다는 이유에서다.
10년의 소멸시효에 관한 규정에서 ‘불법행위를 한 날’은 사실상 ‘손해가 현실적으로 발생한 때’로 봐야 한다는 게 그간의 대법원 판례다. 잠재돼 있던 손해가 비로소 객관적이고 구체적으로 드러난 시점부터 10년의 장기소멸시효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2심은 지난 2016년 김씨가 PTSD 진단을 받았을 때부터 10년까지 손해배상 청구권이 인정된다고 했다. 김씨는 10년이 지나기 전인 지난 2018년 소송을 청구해 문제가 없다며 1심 판단을 유지했다.
대법원은 성범죄에 따른 PTSD가 뒤늦게 발생하는 등의 특성을 고려해 손해배상 청구권의 유효시점을 따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성범죄로 인한 PTSD가 뒤늦게 나타나거나 직후 증상이 발생해도 당시에는 어느 정도로 진행되고 질환으로 진단될 수 있지 예측하기 어렵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범죄 당시나 일부 증상의 발생일을 손해가 현실화된 시점으로 보면 피해자는 손해 발생 여부가 불확실해 배상을 청구하지 못한다”라며 “장래 손해가 발생한 시점에선 소멸시효가 완성돼 부당한 결과가 초래된다”고 했다.
특히 재판부는 미성년자를 상대로 한 성폭행의 경우 가해자와 가까운 관계인 사례가 있어, 실질적인 손해가 언제부터 발생했는지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당시 아동이었거나 가해자와 친족관계를 비롯한 피보호관계에 있었던 경우가 있다”며 “법원은 전문가로부터 성범죄로 인한 정신적 질환이 발현됐다는 진단을 받기 전에 PTSD로 인한 손해의 발생이 현실적인 것으로 됐다고 인정하는 데 매우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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