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두 명 있는데, 찾아오면 오는 거지만 아마 안 만날 듯 싶어요. 이렇게 앉아서 시간 보내다가 오후 5시쯤 넘어서 들어가는 게 유일한 낙이예요.”
추석 연휴 첫날인 18일 늦은 오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후문에서 마주친 서모씨(72·남)가 자신의 연휴 계획을 설명했다. 강서구 방화동에서 홀로 사는 서씨는 이틀에 한 번씩 정오쯤 탑골공원을 찾고, 먼 거리가 버거운 날이면 공항이나 주변 근린공원을 향한다고 했다. 서씨는 남은 나흘 연휴도 이렇게 보낼 생각이다.
서씨는 “예전에는 손자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기도 했는데 이제는 코로나19 때문에 같이 있기 어려워졌다”며 “나도 이해하지만 그게 삶의 낙이었어서 아쉽다”고 말끝을 흐렸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세 번째 명절을 맞았지만 갈 곳도, 만날 이도 없는 노인들이 여전히 길 위에서 연휴를 보내고 있다. 닷새간 황금연휴에 국내 관광객이 늘고, 정부가 이례적으로 가족 간 8인 모임을 허용했지만 이들에겐 남의 이야기다.
노인들의 발길이 주로 향하는 곳은 ‘어르신들의 메카’ 탑골공원이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지난해 2월 폐쇄됐지만 후문과 담벼락을 중심으로 여전히 많은 노인들이 몰린다. 이날 후문 근처에 자리를 잡은 노인들도 100명이 족히 넘었다.
이 곳에서 만난 A씨(78·남)는 “코로나19 때문에 가족들한테 오지 말라고 했다. 연휴에 그냥 전화나 몇 통 하려고 한다”면서도 “심심해서 거의 매일 여기에 오게 된다”고 했다.
서대문구 독립문공원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펼쳐졌다. 공원 내 생활체육시설에 자리를 잡은 B씨(76·여)는 “괜히 젊은 애들이 (코로나19로) 아플까봐 제가 가족들을 피하는 편”며 “원래는 모임도 8개나 나가고 운동도 했는데 아쉽다”고 했다. 이어 B씨는 이 곳을 찾은 다른 노인들과 “추석 잘 보내시라”며 인사와 덕담을 주고받았다.
종로구 동묘시장 안팎에 10여곳 자리잡은 ‘건강식품점’도 많은 노인들로 북적였다. 유통기한이 임박한 음식이나 영양제 등을 헐값에 구할 수 있는 이 곳에서 노인들은 재난지원금으로 연휴 먹거리를 구매했다.
한 노인은 “이만큼 샀는데도 1만원이 안 된다”고 감탄했고, 또 다른 노인은 입구에 놓은 2000원짜리 소금을 가리키며 “유통기한이 7년이나 지났는데 먹어도 되냐”고 묻기도 했다.
이날 6만원짜리 영양제를 1만원에 내놓은 한 가게 사장은 “손님의 80~90%는 남자 어르신들”이라며 “구경하러 오시는 분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재난지원금 들고 오신 분들이 많아서 매출이 지난 명절에 비해 확실히 늘었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명절 풍경이 장기화하는 코로나19로 약화한 노인복지 현실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봤다. 노인들 스스로 고립감을 극복하기 위해 집밖을 나서고 있지만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지원이 필수적이라고 했다.
김범중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독거노인이나 노부부 모두 돌봄의 사각지대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어르신들이 갈 수 있는 복지시설까지 막힌 것”이라며 “만날 가족이나 친인척이 없으면 훨씬 소외감과 고독을 느낄 것”이라고 했다.
이어 “(폐쇄에도 불구하고) 탑골공원 등을 찾는 이유는 서로 이해해줄 수 있는 또래집단이 중요하기 때문”이라며 “방역수칙을 지키는 선에서 이런 분들이 모여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나 인프라를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방역을 위해) 어쩔 수 없는 면이 있기 때문에 전화방문 캠페인이나 어르신 심리상담 체계 강화 등이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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