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정년 논란
산토리 사장, 종신고용 모델 비판 “성장산업으로 인재이동 허용돼야”
“실컷 부려먹고 자르나”여론 반발… 정부 70세 취업 ‘노력의무’ 부과에
기업들, 경쟁력 상실 위기감 반영… 美-英, 정년 없애 고용 유연성 강조
최근 일본은 유력 경영인이 화두를 던진 ‘45세 정년제’ 논란으로 뜨겁다. 지난달 9일 니나미 다케시(新浪剛史·62·사진) 산토리홀딩스 사장은 “45세 정년제 도입으로 직원이 회사에 의존하지 않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3대 경제단체 중 하나인 경제동우회가 주최한 세미나에서였다. 그는 “종신고용이나 연공임금제 등 일본의 과거형 고용모델에서 탈각할 필요가 있다”며 “45세 정년제를 도입하면 인재들이 성장산업으로 대거 이동할 수 있고 회사 조직의 신진대사에도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다.
○“45세면 잘리는 거냐” 여론 거센 반발
거두절미 ‘45세 정년’이라는 단어에 충격을 받은 여론은 엄청나게 반발했다. “젊을 때 부려먹고 45세면 자르겠다는 거냐” “45세에 이직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 “인건비를 줄이고 싶은 기업 입장을 대변한 것” 등 부정적인 반응이 이어졌다. 이날 관련 뉴스를 다룬 포털사이트 야후에는 수만 개의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이에 놀란 니나미 사장은 이튿날 기자회견에서 “정년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잘못일 수 있다”며 “45세는 직장인 생활에서 한 매듭이 되는 시기로 이때쯤 자신의 인생을 다시 생각해보는 것은 중요하다. 스타트업 기업으로 옮기는 등 사회가 여러 옵션을 제공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면서 “해고하겠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고 거듭 해명했다.
일본 정부도 즉각 “국가로서는 70세까지 기업에 고용을 의무화할 것을 부탁하고 있다(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 관방장관)”며 불 끄기에 나섰다. 일본 최대 경제단체인 경단련(經團連)의 도쿠라 마사카즈(十倉雅和) 회장은 “노동시장 유동화가 일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힘을 실어줬다.
그러나 “회사가 보장하는 것이 45세까지라고 한다면 젊은이들은 의욕을 잃을 것”이라거나 “스타트업은 무슨 죄냐”는 등 부정적 반향은 여전했다. “인생 플랜이 불투명해지면 젊은이들이 결혼과 출산부터 기피할 것”이라는 뼈아픈 지적도 있었다.
○‘70세까지 고용연장’이 던지는 불안감
이처럼 논란이 일파만파 번진 이유는 우선 니나미 사장의 사회적 영향력 때문이다. 그는 일본 총리 직속 자문기구인 경제재정자문회의 민간위원으로 평소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해 정책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쓰비시상사 출신으로 44세 때 일본 편의점 업계 2위인 로손의 사장으로 발탁됐고 이후 산토리홀딩스 사장으로 자리를 옮기며 승승장구한, ‘샐러리맨 신화’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4월부터 시행된 ‘70세 고용 연장’ 정책이 주는 불안감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고용형태가 자신들에게 끼칠 부작용은 없는지 의구심을 가진 젊은 세대에게 툭 던져진 ‘45세 정년론’은 이들의 막연한 피해의식을 자극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실제로 전문가들은 “니나미 발언의 배경에는 일본 정부가 정년을 70세까지 늘리려고 하는 흐름에 대한 기업 측 위기의식이 들어가 있다”고 지적한다. 심지어 “(정부 방침에 침묵하는) 경영자들 들으라고 한 발언”이란 해석도 나온다.
○4월부터 모든 기업에 70세까지 취업 확보 ‘노력의무’ 부과
흔히 ‘일본의 정년이 70세로 연장됐다’는 말이 회자되지만 엄밀히 말해 현재 일본의 법적 정년 연령은 60세다. 2013년 고령자고용안정법을 개정하면서 60세 미만 정년을 금지하고 65세까지 근로자가 원할 경우 기업 측이 고용하도록 ‘의무화’했다. 정식으로 정년이 65세가 되는 시기는 2025년으로 정했다. 또 올해 4월부터는 65세 고용 이후로도 근로자가 원한다면 70세까지 취업을 보장할 것을 각 기업에 ‘노력의무’ 형태로 부과했다. 방법은 65세까지 적용해온 3가지 고용연장 조치를 70세까지로 연장하거나 취업 알선, 프리랜서 계약, 재교육 등을 지원하는 형태도 가능하다(표 참조). 이런 조치를 두고 고령자 부양을 국가가 기업에 떠넘기는 것 아니냐’는 평가가 나온다.
일본 인구에서 65세 이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28.7%(지난해 9월 현재)다. 정부 입장에서는 인구의 3분의 1이 일하지 않고 부양받는 입장이 된다면 재정이 버텨낼 수 없다. 하지만 경영자 입장에서는 한번 직원이 되면 본인이 원할 경우 65∼70세까지 보살피라고 강요받는 셈이 된다. 한 이코노미스트는 “직원 노후 보장도 좋지만 회사가 망해버리면 모두 끝” “차라리 정년을 철폐하고 각 회사 사정에 맞는 고용을 보장하는 게 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9년 전 등장했다가 사라진 ‘40세 정년제’
정년 단축 논의는 사실 이번에 처음 나온 게 아니다. 2012년 당시 민주당 정권하에서 열린 ‘국가전략회의’ 분과회에서 ‘40세 정년제’가 제안됐다. 기업의 고용의무를 65세로 연장한 현행 고령자고용안정법 개정을 1년 앞두고 관련 논의가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당시 로손 사장이던 니나미는 이때도 분과회 위원으로서 정년 연장에 반대하고 “45세 정도부터 제2의 인생을 생각하게 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고 한다.
위원회는 보고서에서 “모든 국민이 75세까지 일할 수 있는 사회를 형성하려면 정년제 개념을 바꿀 필요가 있다. 현 60세 정년제는 기업에 인재가 고정돼 신진대사를 저해하고 있다. 정년이 65세로 연장되면 젊은이의 고용 기회가 더욱 줄어든다. …평생 2, 3번 정도 이직이 보통인 사회를 지향하려면 오히려 정년 연령을 내려야 한다. …정년 후 새로운 지식을 얻은 뒤 같은 기업에서 일할 수도 있고 창업 등을 상정할 수 있다”고 했다. 최근의 니나미 사장 발언과 그 취지가 유사하다.
이는 린다 그래튼 런던경영대 교수의 지론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는 저서 ‘100세 인생’에서 한 사람이 평생 여러 개의 직업을 갖게 되고 이를 위한 리커런트(recurrent) 교육이 활성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100세 시대에는 60세, 혹은 65세까지 일한 수입(저축 혹은 연금)으로 평생을 먹고살 수 없다”며 “인생은 과거와 같은 교육, 취업, 은퇴의 3단계가 아니라 더 긴 탐색기와 중간 휴식기를 가지며 직업을 바꾸는 과정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본 정부는 2017년 총리 산하 직속기관으로 ‘인생 100세 시대 구상회의’를 설치하고 그래튼 교수 등을 위원으로 초빙한 바 있다.
○해외의 경우, 한국의 경우
미국은 1986년에 정년제를 없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퇴직시키는 것은 또 하나의 차별’이라는 이유에서다. 영국도 2011년 같은 이유로 정년을 폐지했다. 독일은 현재 65세인 정년을 2029년까지 67세로 연장할 계획이다. 연금 등 국가 재정 부담을 완화하고 숙련공의 기술 노하우를 더 활용하기 위해서다. 이들 서구권은 고용에 유연성이 있다는 점이 한국이나 일본과 다르다.
정년 연장은 연금 수급 시기와 맞물려 사회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프랑스는 2010년 정년을 60세에서 62세로 늦추고 연금 수령 시기를 65세에서 67세로 연장하려 했지만 반대 여론에 부닥쳐 원점으로 돌아갔다. 러시아도 은퇴와 연금수급 연령을 2028년까지 순차적으로 늦추려다가 반발이 커지자 여성만 상향했다.
한국은 2016년부터 법적 정년이 60세로 연장됐다. 현실에서는 대부분의 직장에서 40대 중반만 돼도 떨려나는 양상이다. 급격한 저출산 고령화에 따라 정년 연장이건, 노동시장 유연화건 논의될 법하지만 최고 수준의 청년실업률과 강경한 노조활동 앞에서 진전을 보지 못했다. 정년이 보장되는 일본식도,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있는 미국식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서 베이비붐 세대들이 정년을 맞이하고 있다.
정년제 논의는 개인이 몇 살에 일을 그만두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경제를 어떻게 발전시키고 고용을 어떻게 지키느냐 하는 국가전략 차원의 이야기다. 100세 시대의 정년, 정답은 없지만 지금의 형태가 지속가능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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