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A 씨(31)와 B 씨(33)는 한국에서 고향 후배들을 이 같은 말로 꼬드겨 중국 옌볜(延邊)의 한 대학 근처 사무실로 끌어들였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사무실용 건물이었지만 내부는 대형 보이스피싱 조직의 본부였다.
A 씨와 B 씨 역시 다른 지인의 소개를 받아 보이스피싱 조직에 몸담게 됐다. ‘사장’이라고 불리는 총책은 이들에게 매뉴얼과 전화 통화 멘트 등이 적힌 자료를 건넸다. 전화번호 등 범행에 활용할 데이터도 대거 확보된 상태였다. 이들의 지시에 따라 팀원 20여 명이 검사나 검찰 수사관 등으로 사칭해 전화를 돌렸다. 피해자들이 속임수에 걸려들면 가짜 검찰청 홈페이지에 접속하게 해 계좌 정보와 비밀번호 등을 알아낸 뒤 돈을 빼돌렸다. 2017년까지 ‘사장’을 바꿔가며 최소 60여 차례에 걸쳐 11억 원을 가로챘다.
이들은 치밀한 계획 아래 역할을 분담하고 움직였다. ‘사장’ 역할을 하는 중국 국적의 남성은 자금을 조달하고 시설, 장비를 제공했다. 범행 대상 명단이 담긴 데이터베이스도 구해 건넸다. 콜센터 직원들은 A, B 씨의 지시 아래 정해진 매뉴얼에 맞춰 전화를 걸었다. 이들은 ‘김민호 검사’ 등 가명과 자세한 멘트가 담긴 매뉴얼을 받아 범행을 저질렀다.
조직 운영은 일반 기업 못지않게 체계적이었다. 수사관을 사칭하는 하급 조직원에게는 범죄로 가로챈 돈의 8%를, 검사를 사칭하는 상급 조직원에게는 10%를 성과급으로 지급하는 등 수익 배분 체계를 운영한 것으로 전해졌다. 인출책, 환전책, 대포통장 공급책 등의 역할은 다른 전문 조직에 수수료를 주며 외주를 맡겼다.
조직원들은 합숙 생활을 하며 폭력조직처럼 ‘행동 강령’에 따랐다. 조직원이 임의로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중국에 입국하면 여권을 회수하고, 개인 휴대전화와 모바일 메신저도 사용을 금지했다. 검거될 경우에는 범행에 대해 일체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지침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조직원들이 서로의 신원을 알 수 없도록 김민수 검사처럼 범행 때 사용하는 가명을 조직 내에서도 그대로 쓰도록 하는 등 철저하게 관리하는 조직이 많다”고 설명했다.
광주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는 보이스피싱 조직에서 활동한 A, B 씨 등 12명을 구속하는 등 18명을 2일 검찰에 송치했다.
최근 보이스피싱은 조직적인 지능형 범죄로 변모하고 있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지난해 ‘김민수 검사’를 사칭해 20대 취업준비생을 속여 죽음으로 내몰았던 조직처럼 애초에 조직폭력배 출신들이 개입된 경우도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최근 3년간 경찰의 수사 대상에 오른 주요 보이스피싱 조직은 97개에 달한다. 이 조직들 대부분이 여전히 활동 중이며, 조직원이 100여 명에 달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경찰은 파악하고 있다.
경찰청은 이달부터 수사국장을 팀장으로 하는 ‘보이스피싱 해외 총책 등 범죄조직 검거 태스크포스(TF)’를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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