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오후 3시 40분경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의 왕복 2차선 도로. 흰색 카니발 차량이 골목길에서 우회전을 해 나오더니 순식간에 속도를 높여 20m가량을 내달렸다. 이 차량은 횡단보도를 건너던 60대 여성을 발견하고는 급정거했다. 여성은 빠른 속도로 돌진해오는 차량을 보고도 너무 놀라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이 도로는 동대문구가 지정한 노인보호구역으로 시속 30km로 제한된 곳이다. 도로 바닥에 30km가 큼지막한 글씨로 명시돼 있었고, ‘노인보호구역’이라고 쓰인 노란색 표지판이 도로 전봇대에 설치돼 있었다.
지자체가 복지·의료시설 등 인근에 지정하는 노인보호구역은 주행 속도가 시속 30∼50km 이내로 제한되며 무단횡단방지봉 등이 설치된다. 고령자의 보폭에 맞춰 보행 신호등의 주기가 5∼7초 늘어나는 곳들도 있다.
○ 고령 보행자 느는데 안전인식은 제자리
고령 보행자의 교통안전을 위한 각종 제도가 도입되고 있지만 운전자들의 인식 부족으로 현장에선 위험한 상황이 자주 벌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인구 고령화에 대비한 노인보호구역 등 고령 보행자 안전대책을 강화하고 운전자와 노인의 교통안전 의식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율은 올해 16.5%에서 2025년에는 20.3%까지 늘 것으로 예상된다. 고령인구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지만 노인의 교통안전은 취약한 실정이다. 지난해 보행자 교통사고 사망자는 65세 이상 고령자의 경우 10만 명당 7.7명. 전년보다 약간 줄어들긴 했지만 고령 보행자 사망률은 전 연령 사망률의 3.7배 수준이다. 부상률 역시 전 연령층 대비 1.6배 높다.
행정안전부, 도로교통공단, 경찰청, 각 지방자치단체, 대한노인회 등은 8∼12일 노인 보행자 교통사고가 빈발하는 전국 27곳을 대상으로 특별점검에 나섰다.
전문가들은 고령 보행자의 교통사고를 줄이기 위해서는 교통 약자인 고령 보행자에 대한 인식 개선과 배려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현재 노인복지관 앞 등 일부 지역을 노인보호구역으로 설정하고 교통 신호등 시간을 길게 설정하고 있지만 아직 교통약자로서 노인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라며 “노인은 일반 성인에 비해 보폭이 좁고 청력이나 시력도 약해 전방을 주시하거나 반응하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사회적 배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노인 무단횡단 사고를 막기 위해 무단횡단 방지봉을 설치했을 때 인근 상인들이 ‘방지봉이 없을 땐 노인들이 도로를 쉽게 건너와 가게를 이용했는데 방지봉이 생긴 뒤에는 횡단보도를 통해 돌아와야 해 손님들의 발길이 줄었다’는 민원이 쏟아졌다”고 했다.
○ 고령 보행자 대상 안전교육도 병행해야
무단횡단 등 고령자의 취약한 교통안전 의식도 개선되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9일 오후 3시 35분경 서울 동대문구의 한 왕복 2차선 도로에서는 70대 노인이 무단횡단을 하면서 좌회전을 하던 차량과 부딪칠 뻔한 일이 발생했다. 노인보호구역이었던 이곳에는 무단횡단 방지봉이 도로 곳곳에 있었지만 이 노인은 방지봉이 설치되지 않았던 유턴 신호등 앞 부근에서 무단횡단을 감행했다. 좌회전 차량이 그 노인을 발견하고 급정거를 하면서 주변 차량 5, 6대가 뒤엉켜 인근에 교통 혼잡이 빚어졌다.
도로교통공단 관계자는 “현재 노인보호구역의 경우 내비게이션 업체들이 아직 관련 정보를 제공하지 않아 운전자들이 30km 제한 속도를 준수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면서도 “고령자들을 대상으로 무단횡단의 위험성 등 안전교육을 병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걷는 속도 개념’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독일의 경우 노약자 등 교통약자들이 자주 통행하는 지역에서 차의 속도를 사람이 걷는 속도에 맞추도록 시속 10km 정도로 제한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노인과 어린이가 많은 지역에서는 보행자의 환경에 맞는 속도 제한이 필요하다”며 “아이는 도로로 뛰어들 수 있고 노인은 늦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보행자 중심 문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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