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과극이 만나다 시즌2 〈2〉국민연금 개혁
30년 넘게 연금 낼 25세 대학생 심태은씨 vs 3년뒤 남편 연금 받을 57세 주부 박경옥씨
“국민연금은 손해가 날 게 뻔한 투자 상품 같아요.”(심태은 씨·25)
“국민연금만큼 안전한 노후 대비책이 없죠.”(박경옥 씨·57)
대학생 태은 씨는 졸업 후 취업하면 국민연금 보험료를 내야 한다. 경옥 씨는 은퇴한 남편이 3년 뒤부터 국민연금을 받게 된다.
2057년이면 국민연금 잔액이 고갈될 것으로 전망된다(2018년 4차 국민연금 재정추계). 출산율이 줄어들고, 기대수명이 늘어나면서 연금을 낼 사람은 줄고 받을 사람은 늘고 있다. 그렇게 생기는 적자는 다음 세대 가입자의 몫으로 넘어간다. 지금과 같은 구조가 유지된다면 세대가 거듭될수록 가입자들이 내는 돈은 많아지고 받을 돈은 줄어든다. 태은 씨와 경옥 씨의 대화처럼 국민연금을 두고 세대 간 시각차가 큰 것도 이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보험료를 더 내고, 연금은 늦게 받는 방향의 개혁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늦어질수록 미래 세대 부담은 커진다. ‘더 내고, 늦게 받는’ 국민연금 개혁은 가입자 대다수에게 달갑지 않은 얘기다. ‘낼 세대’인 태은 씨는 국민연금 보험료율을 늘리면 월급이 줄어든다. ‘받을 세대’인 경옥 씨는 수령 시기가 늦어지면 그만큼 일을 더 해야 한다.
MZ세대(밀레니얼+Z세대)끼리도 의견이 갈린다. 학자금대출 수천만 원을 안고 변호사가 된 이용익 씨(34)에겐 국민연금이 믿을 만한 노후 대책이다. 젊은 나이에 스타트업 대표가 된 선강민 씨(26)에게 국민연금은 매달 쏟아지는 고지서 중 하나일 뿐이다.
대선 민생 공약을 놓고 시민들 간 토론을 벌이는 ‘극과 극이 만나다 시즌2’의 두 번째 주제는 국민연금 개혁이다. 대부분의 대선 후보들은 표를 의식해서인지 아직 대안을 내놓지 않고 있다. 기다리다 못한 시민 4명이 토론 무대에 올랐다. 서로 다른 처지에 의견이 팽팽히 갈렸지만 “국민연금 개혁을 더 이상 미뤄선 안 된다”는 데는 한목소리를 냈다.
“치열하게 일하는 윗세대를 믿고 연금 분담할 용의” “자식세대 짐 덜게 연금 받는 나이 65→70세 올리자”
국민연금 못믿겠다던 25세 대학생 “연금 내는 대신 주식-펀드투자… 윗세대 양보땐 보험료율 인상 수용” 재취업 경쟁 시달리는 57세 주부 “언제 수입이 끊길지 늘 불안해… 상호부조 성격 연금이 버팀목”
#심태은(25): 전남대 4학년. 취업 준비생. 40대 은퇴를 꿈꾸는 파이어족. 군대 월급 모은 돈 300만 원을 주식에 투자해 4년 만에 2000만 원으로 불림. 국민연금이 수십 년 안에 고갈될 것으로 믿고 있음. 받지도 못할 국민연금 납입할 돈으로 주식·펀드에 투자해 개인적으로 노후 준비를 하고 싶음.
#박경옥(57): 집필, 강의, 경로식당 설거지 등 ‘N잡러’. 책 ‘오늘, 남편이 퇴직했습니다’의 작가. 3년 뒤 남편이 받게 될 국민연금이 부부 생활비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할 것으로 전망됨. 국민연금은 필수적 공공 안전망이라고 생각.
한국연금학회는 6월 학술대회에서 “국민연금 때문에 미래 세대의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출산율이 줄고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서 돈 낼 사람은 줄고 받을 사람은 늘어난다. 국민연금 체계를 현행대로 유지하면 미래 세대는 보험료를 지금보다 곱절 이상 내야 하고, 받을 땐 훨씬 적게 받는다.
연금 전문가들은 더 내고, 늦게 받도록 개혁해야 국민연금이 지속가능하다고 강조한다. 보험료율을 점차 올리고 수급 개시 연령을 늦춰야 한다는 것이다. ‘낼 세대’와 ‘받을 세대’가 모두 양보해야 할 문제다. 개혁의 골든타임은 2차 베이비붐 세대(1964∼1974년생)가 은퇴하기 전까지다. ‘한 해 신생아 100만 명 세대’의 보험료율을 1%포인트 올리는 게 한 해 30만 명이 태어난 세대의 보험료율을 1%포인트 올리는 것보다 3배 이상 효과적이다. 1964년생은 올해 57세. 차기 정부 5년 안에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국민연금 문제의 두 당사자가 7일 서울 종로구 동아일보 본사에서 마주 앉았다. 앞으로 30년 넘게 연금을 내야 할 태은 씨와 3년 뒤부터 연금 수혜자가 되는 경옥 씨다.
○ “우리 땐 연금 바닥날 것” vs “노후 안전망”
▽태은=한 번도 국민연금으로 노후 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차라리 주식 투자로 노후를 대비하고 싶어요. 보험료로 나갈 돈으로 투자를 하면 더 좋은 수익이 날 것 같거든요.
▽경옥=그래도 국민연금처럼 안전한 노후 대비도 해두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저는 주부라 고정 수입이 없었지만 추후납입을 해서 6년 뒤부터 매달 22만 원을 받죠. 큰돈은 아니지만 반찬 몇 가지 사먹을 돈은 돼요. 나이 들면 그거라도 큰 도움이 되는 거죠.
▽태은=저는 국민연금이 다단계 사기처럼 느껴져요. 국민연금이 곧 고갈된다는 얘기도 있고요.
▽경옥=국민연금은 국가에서 하는 큰 사업이잖아요. 우리 사회가 국민연금을 착실히 낸 사람들이 못 받게 내버려두진 않을 거예요.
▽태은=글쎄요. 고갈될 거라는 건 기정사실인 것 같아요. 고갈을 막기 위해 보험료율을 올리든, 국가 재정을 투입하든 결국 우리 세대가 부담하는 거잖아요.
▽경옥=국민연금은 상호부조(相互扶助)의 성격도 있거든요. 제가 아는 60대 후반 남자분은 평생 비정규직으로 일해서 국민연금을 못 받을 줄 알았는데, 일하던 곳 한 군데에서 가입이 돼 있어서 지금 매달 22만 원을 받는대요. 그 얘기를 하면서 얼굴이 너무 밝아지는 거예요. 그분에겐 그 돈이 안전망이라는 생각을 했죠.
○ “차라리 개인 투자”vs “은퇴 후 정말 험난”
▽태은=친구들과 ‘월급 300만 원을 모아서 집 사고 결혼할 수 있겠냐’는 얘기를 하곤 해요. 한 푼이라도 아껴서 그걸 종잣돈 삼아 노후를 대비하려다 보니, 국민연금으로 나가는 돈도 아까운 거죠. 보험료율을 올리면 더욱 반감이 생길 것 같고요.
▽경옥=그럴 수도 있겠네요. 사실 저와 남편은 그냥 내라고 하니까 냈거든요. 태은 씨처럼 이걸 낼지 말지를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
▽태은=월급 받아서 열심히 모으면 집 사고 가정을 꾸릴 수 있는 세대셨으니 덜 민감하셨던 것 아닐까요?
▽경옥=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죠. 하지만 우리도 미래가 불확실한 건 마찬가지예요. 50대에 재취업하는 게 얼마나 경쟁이 치열한데요. 제가 하는 경로식당 설거지 일이 정부 지원 일자리인데 하도 경쟁이 세서 삼수 만에 들어갔어요. 대기업 임원까지 지냈던 남편은 택배업체에서 일용직으로 일해요. 일이 늦게 끝나서 택시가 안 잡힐 땐 따릉이(공공 자전거)를 타고 귀가하기도 하죠. 남편이 ‘왜 이렇게 살아야 하냐’고 짜증낼 때도 있는데, 우리는 언제 수입이 끊길지 모르니까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벌어야죠.
▽태은=50, 60대 분들이 이렇게 열심히 사시는 줄은 몰랐어요. 은퇴하면 편하게 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네요. 저는 얼른 취직해서 부모님을 제가 모셔야 해요. 두 분은 지금 직장이 없으셔서 가끔 주식 투자 수익이 많이 나면 제가 용돈을 조금씩 드리고 있어요.
▽경옥=20대도 참 삶의 여유가 없어 보이네요. 그렇게 고군분투해서 일자리도 찾아야 하고, 또 젊은 나이부터 다른 돈 주머니를 만들어서 노후를 또 대비해놔야 하고…. 연애할 시간도 없을 것 같아 안타깝네요.
○ “서로 양보해 부담 나누자”
▽경옥=젊은이들 부담이 그렇게 크다고 하면, 우리가 국민연금을 받는 연령을 조금 높이는 건 어떨까요? 지금 65세라고 하면 한 70세쯤에 받는 걸로요.
▽태은=(놀라며) 정말 5년 늦게 받게 돼도 괜찮으세요?
▽경옥=물론 좀 힘들긴 하겠지만(웃음), 그래도 열심히 일하는 게 젊게 사는 비결이기도 하고…. 뒷방 늙은이 되는 것보다 활력 있게 일하는 게 좋잖아요. 5년 정도 더 열심히 일 해보죠 뭐.
▽태은=이런 말씀을 들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경옥=부모 세대도 20대의 고통에 공감하고 양보하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할 것 같아요.
▽태은=연령 상한을 높이는 방식으로 양보를 해주신다면 저희 세대에서도 윗세대를 믿고 보험료율을 올리는 것에 큰 반감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국민연금은 아랫세대가 윗세대 연금을 부담한다. 내가 받을 돈은 다음 세대가 부담해야 한다. 수십 년 후 적립금이 고갈되면 수급자가 받을 몫은 온전히 가입자의 부담이 된다. 내가 성실히 연금을 부으면 다음 세대가 내가 받을 몫을 내줄 것이라는 세대 간의 신뢰가 국민연금을 지탱하는 기둥인 것이다.
이날 대화 전까지 “국민연금을 못 믿겠다”던 태은 씨는 “자식 세대를 위해 양보하겠다”는 경옥 씨의 말에 “윗세대를 믿어보겠다”고 했다. 동아일보가 여론조사업체 칸타코리아와 시민 600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민연금 납입액을 늘리는 방안을 두고 50대 이상은 48.3%가 찬성(반대 29.6%), 2030세대는 48.5%가 반대(찬성 21.1%)할 정도로 세대 간 이견은 여전히 크다. 두 사람이 서로 마음의 문을 연 것처럼 우리도 연금개혁의 사회적 합의를 이룰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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