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유족, 자살 고위험군에서 자살예방교관 되기까지
12년 동안 자살예방교육 4000회, 70만 명 이상 수료
“사망자의 90%가 보내는 자살 위험 신호 놓치지 말아야”
“힘든 것보다, 힘들 때 위로 못 받는 게 더 위험”
‘부모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에 시달리던 자살 유족, 남편의 사업 실패와 교통사고로 빚더미에 올라 극단적 선택을 생각하던 자살 고위험군, 12년 동안 70만 명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전파한 군 최초 자살예방교관.’
한 사람이 걸어온 길이라곤 믿기 어렵지만 권순정 공군본부 자살예방교관(48)의 삶을 요약하면 이렇다. 미끄러지면 다시 오르고 무너질 뻔한 순간마다 악착같이 버텼다. 어느 날 걸려온 전화 속 “괜찮느냐”는 한마디에서 희망이 싹텄다. 살아갈 힘이 생겼고, 그 힘을 같은 위기를 겪는 장병들과 나누기로 했다.
권 교관은 1년 중 약 200일을 전국을 순회한다. 지난해 교육 횟수가 4000회가 넘어가자 세는 것도 포기했다. 하루 3차례 교육도 마다하지 않는다. 군뿐만 아니라 경찰, 공공기관, 기업에서도 교육 요청이 들어온다. 왜 그렇게 무리하느냐고 묻자 “장병들의 자살 위험 신호를 놓칠까봐 거절을 못한다”고 했다. 회의 차 잠시 서울에 온 권 교관을 2일 종로구 동아일보에서 만났다.
● 자살 우려자에게 쏟아진 구조 요청
2009년 권 교관은 매일 생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3년 전 부도를 맞은 남편이 같은 해 교통사고까지 당하면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가해자가 보험에 들지 않은 탓에 자비로 3년 동안 병원비를 냈다. 월세방에는 압류 딱지가 붙었고 부대까지 빚쟁이들이 찾아왔다. 딸이 들을까봐 방 안에서 숨죽여 눈물을 훔치던 어느 날 전화벨이 울렸다.
“단장입니다.”
당시 공군 제20전투비행단장이던 정재부 예비역 공군 준장이었다.
“요즘 힘들어 보여 걱정이 돼 전화했습니다. 출근하면 차라도 한 잔 해요.”
전화를 끊고 펑펑 울었다. 권 교관은 1999년 항공 장비를 고치는 군무원으로 군에 들어왔다. 장교도, 사병도 아닌 그는 최고 상관인 단장과 말 한 마디 나눈 적 없었다. 권 교관은 “내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힘이 됐다”고 그 날을 회상했다.
그 무렵 권 교관은 매일 글을 쓰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공군 소모임 게시판과 자살예방 홈페이지에 신문에서 찾은 좋은 글을 올리고, 본인 얘기도 썼다. 권 교관은 “살아 있다는 신호”라고 했다. 글을 본 이들의 구조 요청도 쏟아졌다. 한 장교는 모르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와 자살을 고민 중이라 털어놓기도 했고, “죽고 싶다”는 장병들의 상담 메일도 쌓여갔다.
어떻게 응대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부대의 권유로 국방부의 자살예방교육을 받았다.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의 90% 이상은 위험 신호를 보낸다는 강사의 말이 권 교관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 순간 간절하게 하고 싶은 일, 꼭 해야 하는 일이 생겼어요. 무엇보다도 살고 싶어졌어요.”
● 장병들이 건넨 쪽지 “살려 주세요”
자살예방교관이 된 권 교관은 2011년 공군부대로 소속을 옮겼다. 교육 대상이 넓어지면서 일과와 휴식의 구분도 없어졌다. 주말이나 새벽에도 장병들의 상담 전화와 문자가 끊이지 않았다. 그는 교육 때마다 연락처를 알려준다. 밤늦게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는 권 교관을 보며 남편은 “맨날 24시간 당직이냐”며 웃곤 한다.
권 교관이 짧은 문자 하나라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데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자살예방교육을 막 시작한 무렵 한 장병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매일 아침 글 잘 읽고 있어요. 우리 부대에도 한 번 와 주세요”라는 내용이었다. 권 교관은 지금도 그 때 ‘너 지금 자살 생각하니’라고 묻지 않은 걸 후회한다. 그 장병은 한 달쯤 지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권 교관은 “누군가 부를 때 바로 달려갈 수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내가 더 공부하고 준비돼 있어야 한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두 시간 남짓한 교육이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교육 중 동료의 손을 꼭 잡는 장병도 있다. 지금처럼 군에서 외부 통화가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 교육이 끝나면 몇몇 사병들은 초조한 얼굴로 권 교관에게 와 쪽지를 건네곤 했다. 부모님에게서 ‘자살 위험 신호’를 봤다며 권 교관에게 대신 연락을 부탁하는 내용이다.
권 교관의 휴대전화에는 아직도 이들이 준 쪽지와 편지가 저장돼 있다.
“아버지가 예전에 죽고 싶다는 얘길 많이 했어요. 위험 신호인 걸 이제야 알았어요.” “어머니가 많이 힘든 것 같아요. 저 대신 좀 물어봐 주세요.”
몇 년 전 한 신병이 건넨 쪽지를 권 교관은 잊지 못한다.
“아빠 많이 힘드시죠? 이젠 제가 지켜드릴게요. 수료식까지 꼭 기다려 주세요.”
권 교관은 돌아오는 길에 신병이 남긴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아들이 많이 걱정하고 있다는 권 교관의 말에 아버지는 한동안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권 교관은 “아버지가 실제로 자살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아들 덕분에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고 했다.
● “군에선 자살 피폭 범위가 더 넓다”
자살예방만큼 중요한 게 남은 이들의 마음을 돌보는 일이다. 권 교관은 누구보다도 그 아픔을 잘 안다. 부모님은 권 교관이 10대 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가정사로 힘들었던 2008년에는 동료를 자살로 떠나보내기도 했다. 운동을 좋아하고 늘 밝았던 동료였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라며 평소와 다른 인사를 남긴 다음 날, 그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위험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아직도 권 교관의 마음 한 구석에 짙게 남아 있다.
많은 자살 유족들도 이 때문에 힘들어한다. 지난해 국내 자살사망자는 1만3195명. 사망자에게 가족 4명, 친한 지인 2명이 있다면 자살유족은 약 8만 명에 이른다. 집단생활을 하는 군에서는 휴유증이 더 크다. 권 교관은 “같은 처지의 동료의 죽음은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부대 전체가 자살유족, 자살생존자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자살유족에게는 ‘네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30여 년 전 권 교관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기도 하다. 권 교관은 “자살유족의 70%는 외부에 가족의 사망 원인을 말하지 못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들도 제대로 위로를 받아야 또 다른 죽음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 권순정을 만든 ‘임세원’
권 교관은 지난달 대한신경정신의학회와 대한신경정신재단이 수여하는 제 1회 임세원상을 수상했다. 2018년 12월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숨진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를 기리기 위해 만든 상이다. 임 교수는 한국형 표준 자살예방교육 프로그램인 ‘보고 듣고 말하기’를 개발한 주역이다.
이 프로그램을 국내에서 가장 많이 교육했고, 개정 과정에도 참여한 권 교관에게 수상의 의미는 남다르다. 일반인 대상 프로그램을 군에 적용시키는 데 임 교수와 동료들은 아무 대가도 없이 참여했다. 군에서 발생한 사고를 분석해 장병들이 처한 위험 요인을 찾고, 육해공군 등 각 군 특성에 맞는 교육 과정을 만들었다. 권 교관은 “교수님들 자녀도 군에 와서 모두 이 교육을 받고 사회로 나갈 테고, 그러면 60만 명의 생명 지킴이를 양성하는 효과가 있다고 하니 모든 교수님들이 적극 도와주셨다”고 했다.
20여 년 전 찢어진 비행복과 낙하산을 고치던 공군 군무원은 이제 군 최고의 ‘마음 수선공’이 됐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보다 자살률(인구 10만 명당 자살자)은 낮아졌지만 마음 건강 적신호는 더 짙어졌다는 게 권 교관의 생각이다. 권 교관은 “수년 씩 취업 준비를 하느라 스스로 고립되거나 SNS에서 다른 이의 행복을 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젊은층이 많다”며 “자살예방을 위해선 사회적 유대감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힘들어서 죽는 게 아니라 힘들 때 위로받지 못해서, 세상에 내 편 하나 없다는 생각에 죽는 것 같아요. 답은 교육에 있어요. 학교에서 성 인지 교육이 일반화 된 것처럼 자살예방교육이 의무화 된다면 더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요.”
인터뷰를 마칠 무렵 권 교관은 주위의 자살 위험 신호를 잘 관찰해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위험 신호는 크게 3가지로 나뉜다.
언어적 신호는 죽음에 대한 직접적 표현이나 절망감을 자주 드러내는 경우다. ‘난 모두에게 짐만 될 뿐이야’ ‘내가 없어지는 게 훨씬 낫겠어“ 등의 말이 들리면 즉각 개입해야 한다. 행동적 신호는 과도한 음주나 대인 기피, 자해 흔적, 자살 수단 마련 등의 행태로 나타난다. 아끼던 물건을 나눠 주며 주변을 정리하는 경우도 있다. 상황적 신호는 실직·낙방·이별 또는 만성 질환으로 인한 스트레스 등을 잘 살펴야 한다.
지난해 보건복지부가 중앙심리부검센터를 통해 2015~2019년 자살사망자 566명과 유족 683명을 조사한 결과 사망자의 93.5%가 위험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주위에서 이를 알아챈 경우는 22.5%에 그쳤다. 가장 흔한 위험 신호는 죄책감, 무기력감, 과민함 등의 감정상태 변화(321명·복수 응답)였다. 290명은 수면 상태가 달라졌다. 자살이나 살인 등 죽음에 관한 언급(247명), 식사 상태 변화(246명) 등이 흔한 신호였다.
가족의 자살 이후 유족이 같은 선택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자살 사망자의 45.8%는 가족 중 자살을 시도하거나 사망한 구성원이 있었다. 자살유족의 62.6%는 중증 이상의 우울감을 보였다. 71.2%는 사회의 부정적 인식과 유족에 대한 비난을 우려해 가족의 자살 사실을 주변에 알리지 못한 대상이 있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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