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게 이기는 거고 이기는 게 지는 거예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아셨죠? 어쩌고 했던 말을 떠올리며 그는 유식이 견강부회할 수 있는 범위의 무한함에 구역질을 느꼈다.”
박완서의 소설 ‘침묵과 실어’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견강부회(牽强附會)’, 가당치도 않은 말을 끌어와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는 것을 뜻합니다. 중국 남송의 역사가 정초의 ‘통지 총서’에 나오는 고사성어입니다.
가령 어떤 동물의 개체 수가 ‘―10’이라면 어떨까요. 생명과학의 이론과 현실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는 전제입니다. 이런 전제 속에서 답을 구하라는 문제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이를 오류라고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기관에서 출제한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습니다. 더구나 실증성과 엄밀성을 중시하는 과학의 영역에서 말입니다. 논란이 된 생명과학Ⅱ 20번 문항은 주어진 지문을 읽고 두 동물 종 집단 가운데 특정 유전적 특성을 분석해 진위를 가려내는 문제입니다. 조건에 따라 계산하면 개체 수가 음수가 나옵니다. 절차에 따라 이의신청이 있었지만, 수능을 출제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스스로 오류를 바로잡을 기회를 날렸습니다.
“문항 속 조건이 완전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교육과정 성취 기준을 준거로 학업성취 수준을 변별하기 위한 평가 문항으로서 타당성은 유지된다.”
평가원은 해괴한 말로 자신들의 과오를 덮으려 했습니다. 궁색한 변명으로 견강부회한 셈입니다. 이 문제를 접한 수험생들은 자신의 풀이가 잘못되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을 테고 풀이를 반복하다가 시간 부족에 봉착했을 겁니다. 누구나 이런 상황이면 멘털이 붕괴됩니다.
결국 이 문제의 정답은 사법부의 판결로 뒤집혔습니다. 20번 문항은 ‘정답 없음’, 즉 모두 정답으로 처리됩니다. 판결 직후 강태중 평가원장(65)은 “재판부의 판결을 무겁고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수험생과 학부모님 그리고 선생님을 포함한 모든 국민께 충심으로 사과드린다”는 말과 함께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지금까지 수능 출제 오류가 인정된 것은 9차례나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평가원장 사퇴로 마무리됐습니다. 검토위원장직을 두고 검토 기능을 대폭 강화했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생명과학Ⅱ 20번 문항의 오류를 검토 교사들이 몰랐을 리 없습니다. 온당한 문제 제기가 권위에 의해 묵살되지 않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이번 수능에서 국어 난이도 조절에 실패한 것도 이런 사정과 맞닿아 있을 수 있습니다.
구조적 병폐를 도려내야 유사한 문제가 재발하지 않습니다. 교육부가 뒷짐 지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출제기관이 스스로 오류를 바로잡을 기회를 놓친 것은 못내 아쉽습니다. 평가원장이야 물러나면 그만이지만, 소송까지 가야 했던 수험생의 상실감은 어떻게 치유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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