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공정하기만 하면 정의(正義)롭다고 여깁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공정이 정의의 필요충분조건이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선천적·후천적 조건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능력주의가 강조되다 보면 집단 내에서 누군가를 배제하는 것을 당연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숭이와 코끼리가 나무 오르기 시합을 할 때 코끼리가 이길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원숭이는 공정하게 주어진 기회를 자신이 이용했으니 성공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라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코로 공굴리기 시합을 했다면 어땠을까요. 결과는 달라졌을 겁니다. 코끼리에게 나무 오르기는 기울어진 운동장입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시정하기 위한 다양한 제도가 존재합니다. 사회적 약자를 우대하는 ‘적극적 우대 조치’가 대표적입니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두 같게 취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하는 것’이 분배적 정의에 부합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신화 율법의 여신 디케(Dike)의 모습은 ‘정의’가 단순하지 않음을 암시합니다. 디케를 형상화한 여신상의 눈은 가려져 있고 오른손에는 저울, 그리고 왼손에는 칼이 들려 있습니다. 어쩌면 정의의 본질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공평무사함’과 맞닿아 있을지 모릅니다.
마이클 샌델 미 하버드대 교수(68·사진)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와 온라인 화상 대담을 가졌습니다. 샌델 교수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 ‘공정하다는 착각’ 등은 이미 우리나라 청소년들도 즐겨 읽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21일 서울 정동아트센터에서 1시간가량 진행된 대담에서 샌델 교수는 “기득권 계층이 자신들의 성공을 노력의 결과로 믿고 자만심을 갖는 것이 빈부격차 심화의 원인”이라며 “이런 현상을 ‘공정하다는 착각’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후보는 “저성장 늪에 빠지면서 청년층은 기회가 적어 경쟁이 전쟁이 되고 친구는 적이 되는 상황”이라며 “공정성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고, 오로지 ‘시험 결과만으로 해야지 왜 소수자나 약자를 배려하느냐’는 생각까지 빠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샌델 교수는 한국 드라마 ‘스카이캐슬’과 ‘오징어게임’을 언급하며 ‘한국의 입시경쟁’과 ‘능력주의 결함, 체제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패배감’을 잘 보여준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아이비리그 대학의 경우 미국 상위 1% 가정에서 자라난 자녀의 입학생 수가 하위 90% 출신 자녀의 입학생 수보다 훨씬 많다”고 덧붙였습니다. 국내에서도 최근 반복적으로 불거지고 있는 ‘아빠 찬스’ 문제는 공정과 정의를 모두 거스르는 볼썽사나운 일입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 것은 정의에 부합합니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능력과 노력이 가볍게 여겨져서도 안 됩니다. 능력주의 자체가 문제일 리 없습니다. 뭐든 과유불급이겠지요. 자칫 낙오되거나 소외된 자들에 눈감아 버리는 매몰찬 능력주의를 돌아보는 성탄절 이브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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