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연연 않고 내려놓는 삶 모색… 인생의 의미 찾는 노력 계속[서영아의 100세 카페]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2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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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이런 인생 2막’ 주인공들의 근황
박수천씨, 마을공동체 만들기 여전… 박경옥씨 부부, 서로 친구-교사 역할
고성춘씨, 세법 관련 방송 꾸준… 최학배씨, 노화 비밀풀기에 앞장
최영아씨, 취약층 고용사업 의욕

왼쪽부터 고성춘 조세전문변호사, 작가 박경옥(왼쪽)-강찬영 씨 부부
왼쪽부터 고성춘 조세전문변호사, 작가 박경옥(왼쪽)-강찬영 씨 부부
《‘100세 카페’는 1월 24일 동아닷컴의 온라인 기사로 시작됐다. 100세 시대라지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시니어세대, 이들이 조명받는 코너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매주 일요일 아침 기사를 올렸다. 시니어 문제는 인구 문제나 사회복지, 실생활과 연결돼 있고 결국에는 정치 경제의 문제이기도 하다. 8월 21일자부터 동아일보 토요일자 지면에 기사가 실리면서 일요일 온라인에는 같은 소재를 좀 더 길고 상세하게 쓴다. 원고지 18장, 사진 2컷으로 한정된 종이신문 분량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근 1년간 많은 분이 100세 카페의 내용을 풍요롭게 해주셨다. 2021년을 마감하며 그분들의 근황을 전해본다.》

○2막에도 멈추지 않는 ‘인생의 의미 찾기’

8월 1일 100세 카페에 ‘이런 인생2막’ 코너를 시작했는데 그 첫 회는 온라인판에만 나갔다. 공교롭게도 기사가 나간 후에 100세 카페의 지면 게재 방침이 결정됐기 때문이다. JW중외제약, 한국콜마 대표이사를 거친 뒤 예순 넘어 바이오벤처기업을 창업한 최학배 하플사이언스 대표가 주인공이었다. 평생 제약맨이던 그가 ‘사서 고생한다’는 소리 들으며 창업에 나선 이유는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였다. 인터뷰 뒤에도 간간이 이 회사가 개발한 피부노화개선제가 미국에서 특허를 취득했다는 소식(9월)이나 유명 제약회사에서 최고의료책임자를 영입했다는 소식(11월)이 들려온다. 최 대표는 100세 카페 애독자로 카톡으로 의견도 보내온다.

직원 출신으로 조직의 최상부에까지 올라갔던 분들에게서 느껴지는 공통된 정서가 있다. 평생 몸 바쳐 일했던 회사 일이 현역에서 물러난 순간 내 것이 아니더라는 자각에서 오는 허망함이다. 이런 깨달음의 과정은 인간이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과 유사해 보인다. 임종전문 정신과 의사인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인간이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이라는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했다. 사실 ‘언젠가는 떠날 것을, 왜 몰랐느냐’ 말하면 그뿐인데,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일본에서는 ‘정년 소설’이 하나의 장르가 되다시피 했다. 1980년대에 나온 ‘겨울의 불꽃’이나 2016년 나온 ‘끝난 사람’은 모두 대기업에서 승승장구하다 어디선가 삐끗해 나락으로 떨어진 엘리트 샐러리맨이 주인공이다. 이들은 끝까지 업무에서의 실적과 성과에 집착하고, 실적이 최고조인 상황에서 잘려버린 현실을 이해할 수 없어 괴로워한다. 그러다가 큰 그림은 그게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다. 큰 조직은 리더 한두 사람의 성과로 이뤄지지 않고,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가도 유사한 성과를 얻어낼 수도 있다.

비슷한 얘기를 한진해운 임원에서 퇴직해 몇 년간의 방황 끝에 택배회사에 취업한 강찬영 씨(60), 롯데마트 임원 퇴임 후 충격에 빠졌지만 서둘러 작가의 길로 들어선 정선용 씨(54)에게서도 들을 수 있었다. 임원이란 게 ‘임시직원’의 준말이라지만 이처럼 본의 아니게 그만둔 케이스는 훨씬 많고, 이런 분들은 마음에 맺힌 얘기를 어디에 내놓기도 어렵고 이해해줄 사람도 많지 않아 더욱 외로울 것이다. 기억할 것은 높이 올라갔을수록 추락의 충격은 크다는 점이다. 경험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마음의 하산을 미리미리 시작하라고 충고해준다.

반면 기업 오너인 한 지인은 기사가 나간 뒤 “그래도 수십 년간 함께 성장하며 가정을 일궈낸 것에 대해서는 회사에 고마운 마음도 있지 않겠느냐”고 물어왔다. 이런 관점을 포함해 새해에는 고용주의 인생 2막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도 소개해보고 싶다.

○저마다의, 작지만 씩씩한 인생2막

왼쪽부터 최학배 하플사이언스 대표, 최영아 서울시립 서북병원 진료과장, 박수천 시니어서포터 회장
왼쪽부터 최학배 하플사이언스 대표, 최영아 서울시립 서북병원 진료과장, 박수천 시니어서포터 회장
전직 고위공무원 박수천 시니어서포터 회장(71)은 여전히 과천에서 마을공동체 만들기에 힘쓰고 있다. 마침 11일 그간 제작해온 유튜브 방송 ‘손잘(손주 잘 키우자)TV’ 시리즈 25회분을 책으로 묶어 출판기념회를 가졌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어른의 일생을 스토리텔링하며 삶 자체를 양육의 관점에서 녹여낸 테마형 자서전이 됐다고 한다.

대기업 임원에서 택배회사 노동자가 된 남편을 지켜보며 ‘오늘, 남편이 퇴직했습니다’를 써낸 작가 박경옥 씨(57)도 바쁜 한 해를 보냈다. 박 씨는 지역 도서관이나 평생교육관에서 요청이 있으면 은퇴교육이나 동의보감에 대한 강의를 하고 프리랜서 마켓 ‘크몽’ 판매대에 자신이 쓴 전자책을 올리기도 한다. 두 아들이 결혼과 취업으로 집을 떠난 뒤 둘만 남은 부부는, 서로에게 친구이자 엄마이자 교사 역할을 해주며 행복하다고 한다.

‘상속세는 더 이상 부자만의 세금이 아니다’라며 50대부터 절세대책을 세울 것을 권고해 큰 반향을 얻은 고성춘 조세전문변호사(57)는 유튜브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세금과 인생’이라는 다소 대중적이지 않은 주제임에도 구독자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고 한다. 5년간 국세청 법무과장으로 일한 특이한 경험을 바탕으로, 조세법률주의적 관점에 입각해 우리 세법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열심이다. 법이란 민에 대해 ‘규제’가 아니라 ‘구제’의 마인드로 접근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한국 은퇴 및 투자교육의 개척자라 할 수 있는 강창희 트러스톤자산운용 연금포럼 대표(74)는 유튜브와 강연을 오가며 100세 시대를 맞이한 시니어들의 노후설계를 돕느라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2020년 정계은퇴한 뒤 웰다잉문화운동에 전념해온 원혜영 전 의원(70)은 11월 중순 더불어민주당 인재영입위원장을 맡아 여당 외연 확장에 나섰다.

지난해 8월 위례에서 새로 인생학교를 연 백만기 위례인생학교 교장(69)은 학교의 기초 다지기에 여념이 없다. 7년간 키워온 분당아름다운인생학교는 다른 분에게 넘겼다. 한국에 인생학교가 100개쯤 생겼으면 좋겠다는 꿈을 갖고 있으니 아직 갈 길이 멀다.

‘거리 위의 의사’라 불리는 최영아 서울시립 서북병원 진료과장(51)은 지난달 25일 아산사회복지재단이 수여하는 아산상 의료봉사상을 받았다. 20여 년 동안 노숙인들의 질병 치료에 힘쓰고 주거와 재활 지원을 통한 삶의 질 개선을 위해 노력한 공로다. 상금 2억 원으로 취약계층의 재활과 회복을 돕는 활동에 힘을 쏟을 계획이다. 또 하나, 기사에도 소개한 ‘빼빼유니짜장’의 스마트스토어 사업이 5일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취약계층 직원을 직고용해 운영하는 스마일박스에서 만든 짜장소스를 즉석 냉동해 판매하는데, 많이 팔리면 더 많은 직원을 고용할 수 있고 그들에게 성공 경험을 안겨줄 수 있다며 의욕을 다지고 있다.

갑작스러운 퇴직 1년도 안 돼 작가로 변신한 정선용 씨는 저술활동과 강연, 유튜브 방송 준비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낸다. 인생 2막 1년 차로 모든 게 낯설지만 트라우마를 빠르게 극복하는 중이다. 그의 기사가 나간 뒤 하도 부정적인 댓글이 많아 걱정스러웠다. 공연히 기사를 써서 열심히 살려는 분 상처만 받게 한 건 아닌가…. 다행히도 정 씨는 “댓글들을 모두 읽었다”며 “상처보다는 자신을 뒤돌아보게 하는 채찍이 됐다”고, 무관심보다는 악플이라도 관심이 더 좋다는 ‘쿨’한 생각을 보내왔다.

○“낙엽, 떨어진 게 아니라 내려놓은 거예요”

평균연령 62.3세. 100세 카페를 통해 만나온 시니어들의 공통점은 무언가 많이 내려놓은 가운데서도 작은 역할을 찾고 있다는 점이다. 살아온 분야도, 앞으로 갈 길도 제각각이지만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현실에 겸손하게 발 딛고 서서 주어진 삶을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떨어진 게 아니라 내려놓은 거예요. 그게 인생이에요. 낙엽이 씀.’ 얼마 전 서울시청에 붙어있던 시구를 되새겨보며, 새해에는 더 다채로운 인생 2막 주인공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런 인생 2막#주인공#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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