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클릭! 재밌는 역사]극심한 빈부격차 시달리던 조선 후기… ‘흥부식 공존’을 꿈꾸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2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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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부가 고리대금업으로 부 늘릴때… 흥부, 소작농으로 살며 수탈당해
제비에 선행 베풀어 부자 되지만 혼자 잘사는 것 아닌 ‘공존’ 선택
가난 구제와 정당한 부의 분배 등 현대사회 공존 추구는 국가의 몫

흥부전 내용을 재해석한 영화 ‘흥부’(2018년)의 한 장면. 흥부전은 권선징악을 다룬 이야기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놀부와 흥부 
가족의 삶에서 조선후기 농민과 지주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가난한 흥부의 모습은 흉년과 질병, 세금으로 땅을 잃고 
전락한 소작농들이 처한 당시 사회의 모순과 맞닿아 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흥부전 내용을 재해석한 영화 ‘흥부’(2018년)의 한 장면. 흥부전은 권선징악을 다룬 이야기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놀부와 흥부 가족의 삶에서 조선후기 농민과 지주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가난한 흥부의 모습은 흉년과 질병, 세금으로 땅을 잃고 전락한 소작농들이 처한 당시 사회의 모순과 맞닿아 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흥부전은 판소리 계통의 한글 소설로 형제간의 우애와 권선징악을 다룬다고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놀부를 부자 농민 혹은 지주의 상징, 흥부를 가난한 농민 혹은 몰락한 양반의 상징으로 놓고 해석하면 조선 후기 농민의 계층 분화와 삶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 됩니다.

○ 놀부가 재산을 불린 과정은
소설에서 놀부와 흥부의 아버지는 본래 양반집 노비이거나 머슴이었는데, 주인이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서울에 가자 재산을 훔쳐 도망쳤다고 합니다. 놀부의 아버지는 훔친 재산을 밑천으로 삼아 더 재물을 모아서 부자가 되었고 양반과 사돈을 맺기까지 했습니다. 아버지는 놀부에게는 어려운 일을, 흥부에게는 공부하는 일을 시켰습니다. 아마 놀부는 일을 시키는 아버지가 미웠을 것이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재산도 나누어주지 않고 흥부를 내쫓았습니다.

놀부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바탕으로 더 많은 부를 쌓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우선 놀부는 고리대업으로 이익을 챙겼습니다. 고리대업은 쌀이나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높게 받는 것입니다. 조선 후기 이자율은 50%에 달했습니다. 또 머슴이나 소작인을 믿지 않고 철저하게 부려먹었습니다. 철저하게 ‘갑질’을 하면서 아랫사람을 괴롭혔습니다. 게다가 ‘놀부 심보’를 부려 남이 잘되는 일을 방해했습니다. 남이 부자가 되는 것을 철저히 막았고 돈을 모으는 과정에서 예의와 체면을 차리지 않았습니다.

놀부의 재산 규모는 얼마나 되었을까요? 소설 속 놀부가 제비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돈 3만 냥을 빌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3만 냥이면 전답 1결당 300냥 정도만 치더라도 100결에 해당합니다. 조선 후기 1호당 토지 평균 면적을 0.7결 정도라고 할 때, 놀부는 140호가 경작할 만한 토지를 소유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 후기 100결의 소출량은 평균 약 4000석 규모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만석꾼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상당한 재력을 지닌 지주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 사회 구조적 모순으로 가난해진 흥부
반면 흥부가 가난해진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장자상속제가 일반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재산은 큰아들에게만 물려주고 나머지 자식에게는 분가할 때 재산을 물려주지 않았습니다. 둘째, 흥부가 현실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흥부의 삶을 보면 무능이나 현실 부적응만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흥부는 굶어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먹던 밥을 주고, 얼어서 병든 사람에게 입었던 옷을 벗어주었습니다. 병들고 약한 사람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고, 주변 사람을 도우면서 살았습니다. 아마 흥부는 아버지 집에 살 때도 머슴이나 소작인의 편을 들어주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흥부는 사회·경제적으로 가난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조선 후기 농촌에서 좁은 땅을 소유하고 농사짓는 농민은 흉년과 질병, 세금 등으로 소유지를 지키기 어려웠고, 결국에는 농지를 팔아 소작농으로 전락했습니다. 소작 농민은 지주에게 높은 소작료를 납부하고 근근이 살아가기도 빠듯했습니다. 여기에다가 삼정 문란 같은 각종 농민수탈은 농민의 생존을 극한으로 몰아갔습니다. 따라서 흥부의 가난은 사회구조적 모순으로 설명할 때 가장 설득력이 있습니다.

흥부 가족이 살아가는 모습은 가난한 사람들의 다양한 직업 세계를 보여줍니다. 29명의 자식을 거느린 흥부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오로지 자신과 처의 노동력에만 의지했습니다. 흥부는 농번기에 김매기, 가래질, 모내기, 밭매기 등 품팔이로 노동을 시작했습니다. 흥부는 남의 집에 가 일을 한 후 약간의 곡식을 받아 식구를 먹여 살렸습니다. 농사일 외에 축성 공사, 방 뜯고 담쌓기, 초상 난 집 부고 전하기, 대장간에 풀무 불기. 부잣집 어린 신랑 장가갈 때 기러기 들고 신랑 앞에 가기 등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습니다. 흥부의 아내도 오뉴월 밭매기, 구시월 김장하기, 방아 찧기, 삼 삶기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농촌에서 임금을 받고 하는 노동의 특징은 원할 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그 임금도 고정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궁지에 몰린 흥부는 죄지은 사람 대신 매를 맞는 일까지 찾아다니기에 이르렀습니다.

○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공존할 수 있을까
흥부전에는 부자와 지주층이 부를 독점하는 과정과 이 과정에서 희생당하는 농민의 삶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또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는 두 계층이 서로 공존을 모색하는 장면도 등장합니다.

욕망의 끝을 모르던 놀부는 제비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린 일로 벌을 받고 파멸에 이르렀습니다. 놀부는 박통 속에서 나온 사람들에게 재산을 빼앗기고 봉변을 당합니다. 박통 속에서 나온 왈패들이 놀부를 벌주는 장면은 조선 후기 빈번했던 농민봉기를 연상케 합니다. 놀부 같은 지주층을 벌주고 응징하는 일은 농민봉기 아니면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흥부는 박을 타면서 엄청난 부를 획득합니다. 흥부는 놀부에게 빼앗긴 재산, 남을 도와준 대가보다 훨씬 많은 보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흥부는 그 많은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심지어 형 놀부에게도 나누어 줍니다. 흥부식 삶은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렵지만, 공존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흥부식 공존은 가능할까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대표적인 흥부식 공존은 ‘국가의 제도와 법’에 의해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국가가 가능한 범위에서 부를 분배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한 복지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국가가 ‘부익부 빈익빈’을 통제하지 못하면 구성원이 살기 어려워지고 국가는 점차 파멸로 나아갑니다. 오늘날 국가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겠지요.

#조선후기#빈부격차#흥부식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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