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25일. 해안가의 칼바람을 호루라기 소리가 꿰뚫었다. 해병대 교육훈련단 앞은 입소하는 이들과 가족들로 꽉 찼다. 아들과 부모들은 마스크를 쓴 채 서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윤대성 씨(20)는 그 순간까지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인스타그램 라이브 화면 건너엔 인도네시아의 풍경과 친구들이 있었다.
드디어 인도네시아 친구들과의 이별 인사가 끝났다. 그제야 대성 씨 어머니 에코디르미야띠(에코) 씨(50)가 아들을 꼭 끌어안았다. ‘이런 날이 현실이 될 줄이야.’
에코 씨가 그리지 못한 오늘이었다. 대성 씨는 몇 년 전 인도네시아로 떠났다. 인도네시아에선 지원자들만 군대를 간다. 떠났던 아들은 해병대를 가겠다며 다시 한국으로 왔다.
“대성이가 고등학교 때 인도네시아로 간 뒤엔 계속 거기서 살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군대는 가야 한다’ ‘나이 들어서 가면 힘드니 대학 전에 해병대를 가겠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
대성 씨에겐 군대는 필수 코스가 아니었다. 대성 씨는 한국인 아버지, 인도네시아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인도네시아계 한국인이다.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면 인도네시아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는 왜 굳이 해병대를 택했을까.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으면 군대는 가야한다고 생각했어요. 한 번 가는 군대, 멋있게 가자고 생각했죠.” (대성 씨)
“대성이는 진짜 사나이, 자랑스러운 한국인이 되고 싶어 했어요.” (에코 씨)
“대성이는 고등학교 때부터 군대 간다고 했어요. 항상 남자로서 인정받고 싶어했죠.” (누나 송이 씨)
대한민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진짜 사나이가 되려고. 대성 씨가 해병대를 가는 이유다. 인도네시아에서 바삐 살면서도 잊지 않았다. ‘난 한국인이다. 군대에 가야 한다.’
“다녀올게요!”
대성 씨는 교육훈련단 입구 속으로 훌쩍 사라졌다. 새빨간 바탕에 샛노란 글씨가 새겨진 간판 아래로. 간판의 문구는 ‘해병대는 이곳에서 시작된다’. 대성 씨는 속으로 외치지 않았을까. ‘진짜 한국인’은 이곳에서 시작된다고.
내 고향은 안산, 그리고 스마랑
대성 씨는 2002년 경기 광명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직장을 따라 광명시, 필리핀, 안산시 등을 오갔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때부터는 쭉 안산시에서 있었다. 안산이 그의 첫 고향이다.
“대성이 어머니가 인도네시아 분인 건 초등학교 2학년 운동회 때 알았어요. 어떤 애들은 놀라서 대성이한테 어머니가 외국인이었냐고 물었죠. 하지만 덤덤한 애들이 더 많았어요.”
초등학교 동창 이윤재 씨는 대성 씨가 손꼽는 ‘절친’이다. 안산 친구들은 대성 씨가 인도네시아에 있을 때도 수시로 연락했다. “어릴 때부터 ‘다문화 아이’라고 일부러 멀리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좋은 점이 있으면 그걸 보고 사귀죠. 대성이도 그래서 친해졌어요.”
대성 씨에게 변곡점은 중학교 3학년, 2017년에 찾아왔다.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가 부도났다. 아버지는 아내의 나라 인도네시아에서 새 기회를 찾고 싶었다. 우선 대성 씨를 2018년 인도네시아로 보냈다.
“대성이가 운동만 좋아하고 공부를 안 했어요. 한국은 경쟁이 너무 치열하니까 외국어라도 배우라고 먼저 보냈죠. 근데 대성이 누나 송이가 한국에서 대학을 가겠다고 해서 저랑 남편은 한국에 남게 됐어요.” (에코 씨)
대성 씨는 홀로 인도네시아 자와틍아주 스마랑으로 왔다. 인도네시아의 대표 무역도시다. 대성 씨는 무역도시의 국제학교를 택했다. 인도네시아어와 영어를 동시에 배우기 위해서였다. 이제 ‘안산 원일중 3학년 윤대성’은 ‘서머스타고 1학년 윤대성’이 되었다.
“이슬람교인 애들도 있었어요. 처음 갔을 땐 새벽 5시 반에 기도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 깬 적도 많아요. 라마단(이슬람 금식성월) 기간에 같이 금식도 해봤는데 재밌었어요. K팝이나 드라마를 아는 친구들이 한국을 엄청 좋아하더라고요. 덕분에 저도 인기 많았죠.”
서머스타고 선생님들은 대부분 터키, 우즈베키스탄에서 왔다. 기숙사엔 인도네시아는 물론이고 중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온갖 국적의 친구들이 있었다. 대성 씨는 이렇게 3년을 보내며 인도네시아어와 영어에 능숙해졌다. 다양한 문화를 배웠다.
“원래 인도네시아 말은 거의 못해서 맨 땅에 헤딩했어요. 매일 애들이랑 인도네시아어랑 영어로 말하니까 빨리 늘더라고요.”
대성 씨는 한국어와 인도네시아어, 영어에 능통한 인재로 돌아왔다. 이른바 ‘다중정체성’ 세대다. 여러 언어와 문화에 익숙하다. 다른 사람, 다른 문화를 잘 받아들이는 세대다.
다중정체성은 꿈을 위한 ‘스펙’이다.
“돈을 모으면 한국 친구들을 불러서 같이 사업할 거예요. 인도네시아에 K팝 틀어주고 한국 연예인 사진을 걸어놓은 인기 음식점이 있거든요. 근데 사장이 중국인이에요. 한국인인 제가 떡볶이나 불닭 볶음면처럼 유튜브에서 유명한 한국 음식으로 장사하면 더 잘 되지 않을까요?”
‘다중정체성’ 세대
한국다문화교육연구학회에 따르면 다중정체성은 한 사람이 두 가지 이상의 인종과 문화가 만들어낸 여러 요소들을 수용하면서 형성된 정체성이다.
2000년대 초반, 결혼이주여성, 이주노동자 증가 등으로 국내 이주민이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이제 이들이 낳은 자녀들이 성인으로 훌쩍 자랐다. ‘이주민 2세’가 학교 울타리를 넘어 사회로 나온다.
이민자 2세(부모 중 1명 이상이 귀화자이거나 외국인)는 2020년 28만 명이었다. 2040년엔 2.5배로 뛴다. 미국을 한국계, 중국계 미국인이 이끌 듯, 한국을 인도네시아계, 스리랑카계 한국인들이 이끄는 날이 올까.
독백과 고백 사이
“화장품 원료의 성분과 제조과정을 알아야 기획이나 마케팅에서도 경쟁력이 생긴다고 생각했어요. 대기업에 당연히 가고 싶지만 중소기업부터 취업해서 올라가야 할 것 같아요.”
대성 씨 누나 윤송이 씨(22)는 인도네시아에 한국 화장품을 알리는 ‘K뷰티’ 전문가를 꿈꾼다. 피부가 나빠졌을 때 한국 화장품으로 치료하며 K뷰티의 꿈을 키웠다. 그래서 한 대학 바이오화장품과에 다닌다.
“우선 한국 화장품 회사에서 경험을 쌓을 거예요. 그 후에 한국 화장품 시장과 인도네시아 화장품 시장을 연결하는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송이 씨의 또 다른 꿈은 한국에서 계속 살기. 친구들에겐 당연하지만 송이 씨에겐 당연하지 않은 일이다. 가족들이 어머니의 고향 인도네시아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 홀로서기가 힘들지라도 송이 씨는 혼자라도 남을 생각이다.
“인도네시아는 오래 살아보지 않아서 고향이라고 느껴지진 않아요. 제가 한국인이라는 게 자랑스러워요. 한국에서 안 태어났으면 슬펐을 정도로 한국에서 사는 게 너무 좋아요.”
꿈을 이야기할 땐 똑 부러진다. 하지만 연애할 땐 말 못할 고민으로 끙끙 앓기도 한다. 4년 전 남자친구를 사귀기 시작했을 때가 그랬다. 송이 씨는 외모나 말투 모두 평범한 한국인. 남자친구는 송이 씨가 이주민 2세란 걸 몰랐다. ‘우리 엄마, 인도네시아 사람이야.’ 이 말은 계속 독백으로만 머물렀다.
“빨리 말해야 할 것 같았어요. 추억을 더 많이 쌓기 전에…. 남자친구가 싫어할 수도 있잖아요.”
우연히 고백의 기회가 왔다. “나 엄마랑 이모 결혼식에 참석하러 인도네시아에 가.” 송이 씨의 말에 남자친구가 조심스레 물었다. 엄마가 인도네시아인이냐고. 송이 씨는 맞다고 했다. 그렇게 송이 씨는 4년 간 사랑을 키우고 있다.
송이 씨가 고민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같은 인도네시아계 한국인 친구가 이주민 2세란 사실 때문에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3년이나 사귄 사이었는데도 그렇게 남이 됐다. “남자친구가 자기 가족한테 ‘네 엄마 한국 사람이라고 하라’고 강요했대요.” 그래서 더욱 송이 씨는 고백하기가 쉽지 않았다. 독백과 고백 사이를 수없이 오갔다.
송이 씨의 고민은 어릴 때부터 뿌리를 키웠다. 학교 반 친구들에게 당부할 때도 있었다. “우리 엄마 외국인인 거 비밀로 해줘.”
송이 씨는 자라며 자꾸 그렇게 비밀이 생겼다. 아픈 경험이 알알이 마음에 박혔다.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다문화 가정 이야기가 나올 때 물었다. “송이 학생이 다문화 가정이죠?” 반 친구들의 시선이 송이 씨에게 쏠렸다. 송이 씨는 그 선생님이 너무 미웠다. ‘그냥 넘어가면 좋겠는데 굳이 내 이름을 언급해야 하나.’ ‘다문화라고 각인시켜야 하나.’
학교에서 비슷한 이주배경 친구들은 종종 이름을 잃었다. 선생님들은 이름 대신 이렇게 부르곤 했다. “야, 인도네시아!” “야, 중국!”
상처가 쌓이며 입은 닫혔다. “상처가 없었다면 저도 당당하게 말을 했겠죠. 움츠러드니까 바로 말하지 못하고, 돌려서 말하려 하고. 제가 그런 성격이에요.”
엄마 에코 씨는 송이 씨에게 고맙다. 아픔을 딛고 잘 자라줘서. 고등학생 때 용돈을 스스로 벌던 딸이다. 알아서 진로도, 대학도 정했다.
딸에게 비밀인 엄마, 피부색도 언어도 다른 학부모. 쉽지 않은 길이었다. 냉대의 시선이 많았다. 한국인 남편과 사랑에 빠져 합법적으로 한국에 왔을 뿐인데 말이다. “맞벌이를 하면서도 지금까지 송이의 초, 중,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을 모두 기억할 정도로 학교를 자주 찾아갔어요. 친구들을 수시로 집으로 불러 맛있는 걸 해줬어요.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학교에 찾아가 선생님 말이 이해가 안 되면 남편에게 바로 전화해 선생님에게 바꿔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한 선생님은 ‘인도네시아 음식을 싸 와 달라’고 했다. 에코 씨는 부지런히 볶음면을 만들어 송이 씨를 통해 보냈다. 송이 씨에겐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다.
아빠 형관 씨(58)는 아내를 더 아끼고 존중하려 했다. 그게 최고의 교육이라고 여겼다. 아이들이 한글을 배우기 시작할 땐 엄마 이름을 아빠 이름보다 먼저 외우게 했다. ‘엄마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집 사람이 애들을 정감 있게 잘 키워줘서 항상 고마워요.”
다름은 나의 힘
‘다름’을 받아들이는 경험은 이주민 2세가 성장하는 힘이 된다. 다른 사람, 다른 사회를 잘 이해한다. 공감한다. 그리고 돕는다.
‘2016년 신안산대 전자정보통신학과 졸업, 2016년 안양 YMCA 입사. 현 시민사업부 팀장.’ 스리랑카계 한국인 서현식 씨(29)의 스펙이다. 안양시민에게 기후, 환경, 생태 관련 강연과 소모임을 마련해준다. 줌(ZOOM) 활용법, 사진 동영상 편집 강의는 직접 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거리두기 시대, 사람 사이 거리를 좁히는 기술을 가르친다. 그의 지향은 ‘마을 공동체 회복’. 시민들이 공동체 가치에 주목하고 그 가치를 지키는 삶을 꿈꾼다. 지금 당장의 목표는 ‘내적 성장’이다.
“우선 30대 중반까지는 경험으로 내적 성장을 하고 싶어요. 어차피 80, 90대까지 살 텐데 내적으로 성장한다면 30대 중반 이후부턴 알아서 필요한 돈을 벌지 않을까요. 지금 당장은 ‘집 사야 한다’ ‘돈 벌어야 한다’는 생각은 없어요.”
현식 씨는 안양 YMCA의 핵심 인재다. 관리자급 중에선 가장 젊다. 안양 YMCA의 이현주 아기스포츠단 원장은 현식 씨의 소통 능력을 칭찬했다. “유아부터 어머니들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일하면서 모든 세대와 소통하는 유연함을 키웠더라고요.”
현식 씨가 가르치던 한 학생의 학부모는 현식 씨를 ‘까만콩 선생님’으로 기억한다. “먼저 그렇게 불러달라고 했다고 하더라고요. 자기소개도, 프로그램 설명도 선생님들 중 가장 똑 부러지게 해서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한국인 아버지와 스리랑카인 어머니는 현식 씨를 1993년 스리랑카 중남부 지역 웰리마다(WELIMADA) 시의 한 산간 마을에서 낳았다. 2002년 아버지가 다니던 스리랑카의 한국 기업이 철수하며 가족은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현식 씨 나이 9세 때였다. 현지 국제학교를 다니던 현식 씨는 순식간에 ‘안산시 와동초등학교 3학년’이 됐다. 당시 현식 씨가 다니던 학교엔 이주배경 학생이 거의 없었다. 지금의 안산과는 너무도 달랐다.
“우리가 외계행성에서 온 사람처럼, 아주 신기하게 쳐다봤어요. 쉬는 시간에 교실 창문과 문에 저를 보려고 굉장히 많은 친구가 몰려들었죠.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어요. 저도 그런 상황이 신기했죠.”
2002년 월드컵 이후 분 ‘축구 붐’ 덕분에 현식 씨는 몸으로 부딪히며 친구를 사귀었다. 중학교부터 시작한 춤은 그를 ‘인사이더’로 만들었다. 현식 씨는 전문 크루로 활동하며 지역, 학교 축제에 나가기도 했다.
현식 씨는 자신의 배경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살렸다. 고등학교 때는 경기차세대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청소년 정책, 다문화 정책을 제안했다. “이주배경 학생도 한국 사회의 일원일 뿐이고, 남들과 다를 게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인종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면 안 되잖아요.”
현식 씨는 2012년 신안산대에 입학해 전자정보통신학을 전공했다. 정보기술(IT)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IT 기업에 취직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대학 때 참여한 해외 봉사활동이 진로를 바꾼 계기가 됐다. 필리핀의 빈곤 지역에서 6개월간 봉사하며 어려운 사람들과 어울렸다. 대화하며 그들의 상처에 다가갔다. 아픔을 공감하게 됐다. “돈을 많이 벌기 보단 다양한 사람을 편견 없이 만나 소통하는 일을 하고 싶어졌어요.”
현식 씨가 한국 사회를 돕는 봉사자로 성장한 건 어머니 서아이라 씨(50) 영향도 있었다. 서 씨는 안산 외국인주민상담지원센터에서 스리랑카 이주민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서 씨는 이주민들을 돕고 있지만, 이주민들이나 아이들에게 늘 얘기한다. 남들이 우릴 도와주길 바라지 말라고. 스스로 열심히 해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늘 ‘해봐’ ‘안 해보고 포기하지마’라고 말해요. 현식이가 힘들었을텐데 노력을 많이 했죠.”
현식 씨의 동생 샤니 씨(25)도 어릴 적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 있다. 샤니 씨가 한국에 첫 발을 디딘 건 일곱 살 때. 그 때를 어렴풋하게 기억한다. 한국인 아버지와 할머니는 샤니 씨 손을 잡고 유치원을 찾았다. “외국인 아이는 안 돼요.” “한국인이에요. 내가 아빠고, 이 분이 할머니에요.”
“외국인 아이는 무조건 안 된다고 했대요. 길게 얘기도 못했대요. ‘안 되니까 돌아가시라’고 했대요.”(샤니 씨)
결국 동네 한 어린이집만 샤니 씨를 안쓰럽게 여겨 받아줬다. “일곱 살이었는데 4~6세만 다니던 어린이집에 다녀야 했어요. 갈 곳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죠. 아직도 이주 아동을 거부하는 어린이집들이 많다니 신기하네요.”
한국에서의 출발부터 장애물이 있었지만 샤니 씨는 상처만 받고 있지 않았다. 당당하게 맞섰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역사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샤니 씨를 갑자기 일으켜 세웠다. “한국사를 몰라도 되는 샤니가 98점을 받았어요. 본받아야 해요.” 샤니 씨는 당황했다. 수업 내내 기분이 나빴다.
수업 종료 종이 울리자마자 교실을 나가는 선생님을 붙잡았다. “저희 아버지는 한국인이고 저 어렸을 때부터 한국 살았어요. 제가 왜 한국사 몰라도 돼요?”
샤니 씨는 고교 졸업 후 바로 취업했다. 제약회사, 물류회사를 거쳐 비영리 단체에서 일했다. 저소득층 한국인, 난민, 다문화 가정 등에 기업이 후원한 물품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주배경 청소년의 ‘꿈 찾기’를 돕는 강연을 열기도 했다.
최근엔 경기 안양시의 한 병원에 취직했다. ‘싱글 라이프’를 즐기기 위한 안정적인 직장이 필요해서다. 독립 준비도 시작했다. 20대이지만 이미 개인연금에 가입했다. 월급의 절반은 저축하려 아낀다. 수익이 안정적인 종목 중심으로 주식 투자도 한다. “거실 하나, 방 하나 있는 집에서 강아지를 키우며 살고 싶어요. 지금은 부모님이랑 살지만 아파트 청약을 넣어서 독립할 생각이에요.”
그래도 앞으로 남을 돕는 일은 계속 하고 싶다. 스리랑카 이주민 대상 통역과 상담을 하는 어머니처럼 싱할라어(스리랑카 제 1언어)를 더 배워 같은 일을 해볼 생각도 있다.
“비영리 단체에서 일하며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혹시 도와줄 수 있냐’고 하는 이주민들을 많이 봤어요. 저절로 마음이 움직이더라고요. 스리랑카 말은 내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라기보단… 엄마 보니까 통역 요청이 너무 많아 거절할 때가 있을 정도더라고요. 배워두면 전망이 좋을 거 같아요.”
샤니 씨의 이름은 ‘아름답다’는 싱할라어 ‘프샤니’에서 따왔다. 외가에서 지어준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다. “덕분에 ‘샤니빵’이란 별명도 있지만 그래도 전 제 이름이 좋아요.”
그래도, 한국
한국 사회에서 꽃을 피우지 못한 채 떠나는 이주 청년들도 있다. 이주민 2세 부디 씨(가명·26)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 때 부모님을 따라 한국에 와 초등학교, 중학교를 안산에서 모두 다녔다. 언어도, 문화도 한국이 익숙하다. 한국에서 평생 살 생각으로 한국 이름도 지었다.
부디 씨가 고교 1학년이 됐을 때 삶에 갑자기 균열이 생겼다. 부모님이 갑자기 인도네시아로 돌아가야 한다고 통보했다. 인도네시아에 계신 할아버지 지병이 악화돼 부양을 해야 했다. 미성년자였던 부디 씨는 부모님을 따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생 부디 씨에게 인도네시아는 외딴 세계였다. 인도네시아어를 부지런히 배웠지만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가 벅찼다. 한국이 늘 그리웠다.
혼란스런 고교 생활 끝에 결심했다. ‘한국 대학에 돌아가자.’ 부디 씨는 2019년 서울의 4년제 대학에 입학했다. 꿈에 그리던 한국이었지만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짜리 원룸을 겨우 구했다. 대학등록금 외에도 월세, 생활비 등으로 매달 70만 원가량이 나간다. 하지만 부디 씨는 학생비자를 받았기 때문에 규정상 아르바이트를 구할 수 없다.
미래를 생각하면 더 힘들다. 취업에 성공해야만 취업비자를 받아 한국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취업의 길은 한국인 청년에 비해 더 비좁다.
“한국어와 인도네시아어를 모두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그런데 임용고시는 외국인이 응시할 수 없어요. 계약직 교사도 한국인을 선호하더라고요. 안 되면 통역 일을 하려고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을 알아보고 있어요.”
특기를 살려 정보기술(IT) 기업에서도 일하고 싶다. 부디 씨는 초등학생 때 이미 간단한 게임을 만들었을 정도로 IT 실력이 뛰어나다.
부디 씨는 한국이 재능 있는 이주민 청년과 더불어 일할 방법을 찾아주길 고대한다. 정부와 기업이 채용의 문턱을 낮추면 다양한 끼와 자질로 기여할 준비가 돼 있다.
이주민 2세들은 이제 한국 곳곳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 이들은 학교의 울타리에선 몰랐던 사회를 알아간다. 현실을 더 날 것으로 접한다. 아픔이 있지만 희망을 얘기한다. 한국 사회는 노력한 만큼 성공할 수 있는 사회라고.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노력해야 해요. 지원만 바라고 있으면 안 돼요. 이런 노력을 제도가 뒷받침 해주면 더 좋구요.”(샤니 씨)
“안산 밖에서도 이주민 2세들을 지원하는 센터나 기관이 늘고, 프로그램 질도 높아지면 좋겠습니다.” (현식 씨)
이들은 말한다. 공존은 존중에서 시작된다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사회 곳곳에 자리 잡아야 한다고. 20년 뒤, 70만 명의 국내 이주민 2세들은 우리를 어떻게 바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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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취재 : 이새샘 신희철 김재희 남건우 기자 ▽사진·동영상 취재 : 송은석 남건우 기자 ▽동영상 편집 : 남건우 기자 박세진 PD 안채원 CD ▽그래픽 : 김충민 기자 ▽프로젝트 기획 : 위은지 기자 ▽사이트 제작 : 임상아 고민경 뉴스룸 디벨로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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