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만드는 포용국가]〈하〉 학교폭력 예방·근절
법 개정 전엔 무조건 학폭심의위行, 처벌에 초점… 사과 등은 뒷전 일쑤
자체 해결제 도입으로 다른 길 열려…피해 경미하고 지속적이지 않을 때
학교장이 관계 회복 프로그램 운영…은폐-축소 우려엔 ‘예방교육 강화’
경미한 학교폭력 사건의 경우 처벌보다는 학교가 교육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현장 의견이 많다. 한고등학교가 관계 회복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새로운 관계를 연결하자’는 뜻으로 학생들의 손을 모은 모습(왼쪽사진)과 학폭 피해자·가해자가 서로에게 듣고 싶은 말을쓴 관계 회복 프로그램 예시. 경기도교육청·유스메이트 제공
학교 폭력을 둘러싼 피해 학생과 가해 학생 간 갈등을 줄이고 학교의 교육적 해결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도입된 ‘학교장 자체 해결제’가 학교 현장에서 주목받고 있다. 2019년 9월 도입된 학교장 자체 해결제는 경미한 학교폭력 사건을 학교장과 교사가 교육적 차원에서 자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이전까지는 학교폭력을 엄격히 처벌하기 위해 학교폭력으로 신고된 사건은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2020년부터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로 변경)를 열고 처분 내용을 학교생활기록부에 기재하도록 했었다.
현 정부는 포용국가 사회정책의 ‘안전’분야 중 하나로 학교폭력을 예방·근절하기 위해 일정 요건을 갖춘 학교폭력 사안에 대해 학교장 자체 해결제를 추진해왔다. 학교장 자체 해결제가 도입된 지 2년이 넘은 현재 교육 현장에서는 학생들의 관계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긍정적 반응이 나온다.
○ 경미한 학교폭력은 학교가 자체 해결
2019년 초등학생 4학년 민영이(가명)는 친구들로부터 학교폭력을 당했다고 담임교사에게 신고했다. 친구 2명이 갑자기 “예쁜 척한다”, “잘난 척한다”, “재수 없다”는 말을 했다는 이유였다. 담임교사는 학교 내 학교폭력 전담기구에 신고했고, 전담기구는 민영이 부모에게 학교장 자체 해결제를 안내했다. 민영이 부모는 “민영이가 두 친구와 잘 지낸 적도 있고 사건이 더 커지지 않길 바란다”고 동의해 사건은 잘 마무리됐다.
2019년 개정된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은 학교폭력 사건을 무조건 심의위로 보내지 않고 학교장 재량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놨다. 먼저 전담기구가 조사해 네 가지 조건이 모두 충족돼야 한다. 조건은 △피해자(신고자)가 2주 이상의 신체적·정신적 치료가 필요한 진단서를 발급받지 않은 경우 △재산상 피해가 없거나 즉각 복구된 경우 △학교폭력이 지속적이지 않은 경우 △학교폭력에 대한 신고·진술·자료 제공에 대한 보복 행위가 아닌 경우다. 피해 학생과 학부모가 심의위원회 개최를 원하지 않는다는 서면 동의를 하면 학교장은 사건을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개정 이전의 학교폭력예방법은 가해자 처벌에 초점을 뒀다는 지적이 있었다. 친구 간의 사소한 다툼까지 모두 심의위로 가는 바람에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관계 회복 등 정작 필요한 조치는 이뤄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반드시 가해자에 대한 처분이 이뤄져야 했기 때문에 학생부 기재 내용을 두고 소송으로 번지는 일도 잦았다. 가해 학생과 학부모가 학교를 상대로 ‘주홍글씨가 새겨져 입시에 피해를 본다’며 소송을 내는 일도 많았다. 법조계에서 ‘학교폭력이 돈이 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교육부에 따르면 학교장 자체 해결제가 도입된 첫해(2019년 2학기) 자체 해결제로 처리된 사건 수는 1만1576건이었다. 2020년 1학기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등교수업이 줄면서 학교장 자체해결 건수도 7646건으로 줄었다. 그러나 2020년 2학기 9900건, 2021년 1학기 1만6188건으로 점차 늘고 있다. 전체 학교폭력 발생 사안의 약 68%다.
○ 관계 회복 프로그램으로 학교폭력 예방
개정된 학교폭력예방법은 ‘학교장은 학교폭력 사건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경우 학교폭력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고, 필요한 경우 피해학생·가해학생 간의 관계 회복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는 학교장 자체 해결제 정착에 가장 중요하다고 꼽히는 부분이다. 교육부가 2020년 제작한 책자 ‘학교폭력 피해학생 지원 길잡이’의 공동 집필진이자 청소년상담기관 유스메이트의 김승혜 대표는 “피해 학생의 경우 학교장 자체 해결제에 동의하면 가해자가 진정으로 반성하지도 않고, 비슷한 상황이 반복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많기 때문에 쉽게 결정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민영이도 학교가 마련한 관계 회복 프로그램을 통해 가해 학생들과 진솔하게 대화했다. 서로 하고 싶은 말을 써보는 활동지에 민영이는 ‘더 이상 이런 일이 없길 바라’, ‘학교에서 마주쳤을 때 불편하지 않았으면 좋겠어’라고 적었다. 가해 학생들은 ‘미안해’, ‘앞으로 편하게 지내자’라고 썼다. 민영이 엄마는 “사건 이후 아이가 학교에 가는 걸 불안해하고 나도 많이 걱정됐는데 관계 회복 프로그램 이후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했다.
학교 현장도 학교장 자체 해결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한 교사는 “아이들이 싸워서 학교폭력 사안으로 접수시켰는데 그날 종례하기 전에 서로 ‘하하 호호’ 하고 있었다”며 “아이들 사이에서 해프닝이 있을 수도 있는데 학교장 자체 해결제가 없었다면 오히려 (갈등이 생겨) 문제가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교사는 “예전에는 학교폭력 사건 처리가 종결돼도 아이들이나 교사 사이에서 가해 학생에 대한 낙인이 생겼는데, 이제 그렇지 않아 좋다”고 설명했다.
교육부는 앞으로 학부모를 대상으로 학교장 자체 해결제를 더욱 알리고, 교장과 교사의 상담 역량을 높일 수 있는 연수를 늘릴 예정이다. 학교장 자체 해결제가 사건을 은폐하거나 축소하려는 것으로 오해하는 학부모나 학생들이 있어서다.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학생, 학부모, 교원을 대상으로 폭력 예방교육을 강화해 학생들이 피해를 겪기 전에 예방하고 학교, 교육청, 경찰, 지역 전문기관 등과 협력해 아이들이 행복하게 학교생활을 해 나갈 수 있게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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