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 컵 대안
‘렌털-반납’ 시스템 구축
친환경 붐 타고 찾는 기업 늘어
우리가 쓰는 일회용 컵은 몇 개나 될까요? 환경부에 따르면 2018년 기준으로 연간 25억~28억 개로 추산됩니다. 환경단체 그린피스가 2019년 발간한 ‘플라스틱 대한민국’ 보고서를 한 번 볼까요. 한 명이 연간 사용하는 일회용 플라스틱 컵은 65개에 달한다고 하네요. 이 양이 얼마 정도인가 하니, 컵들을 모두 한 줄로 쌓으면 지구에서 달까지 닿을 수준이라는 분석입니다.
한 번 쓰고 쓰레기통으로 버려지는 일회용 컵은 그대로 쓰레기가 돼 소각되거나 매립되는 것이 대다수입니다. 재활용률은 20개 중 하나꼴(5%)에 그치죠. 그렇다고 텀블러와 같은 개인 컵을 매번 들고 다니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을 시작으로 만들어진 다회용 컵 렌털 기업이 ‘트래쉬버스터즈’입니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고요? 네, 맞습니다. 유령을 박멸하는 영화 ‘고스트버스터즈(Ghostbusters)’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하네요. 유령을 퇴치하듯 일회용품 쓰레기를 격퇴하겠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다시 쓴 것도 다시 쓰자.’
지난달 8일 찾은 서울 성북구 트래쉬버스터즈의 물류허브 출입문에 붙은 문구입니다. 여기 직원들이 매일 보고 머릿속에 떠올리는 문구겠죠. 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20여 명의 사람들이 위생모자와 위생장갑, 앞치마로 무장한 채 분주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고온에 살균 세척된 컵의 물기를 털고, 건조기에 넣고, 자외선(UV) 소독하고, 파손 여부를 검수하고 포장하는 작업을 하는 중입니다. 이 컵들은 각 대기업 사내 카페와 탕비실 등에 보내져 일회용 컵 대신 사용됩니다.
이곳을 포함한 3곳의 물류허브에서 하루에 내보내는 다회용 컵은 약 2만 개. 그만큼 일회용 컵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현장을 함께 둘러본 곽재원 트래쉬버스터즈 대표는 “경기 안양에 스마트세척 공장을 새로 짓고 있다”며 “공장이 완공되면 시간당 2만5000개의 다회용 컵을 씻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트래쉬버스터즈가 줄일 일회용 컵이 더 늘어난다는 소리입니다.
● ‘축제 쓰레기 해결사’로 출발
트래쉬버스터즈의 출발점은 축제였습니다. 곽 대표의 원래 직업은 공연기획자였습니다. 공연기획자로 축제를 준비하고 열어 온 곽 대표는 쓰레기 문제로 늘 마음이 불편했다고 합니다. 축제 후 버려지는 일회용품 쓰레기가 너무 많아서죠.
음악 축제건 지역 축제건, 축제에서 음식은 빠질 수 없는 요소입니다. 축제 부스에서는 일회용 컵과 식기를 활용해 관객에게 음식을 팝니다. 관객들이 사용하고 버린 일회용 컵과 식기는 음식물이 묻은 채 버려지기 일쑤라 분리배출을 건너뛰고 곧바로 쓰레기봉투로 들어가죠. 문화체육관광부에 등록된 지역 축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기준으로 900여 건에 달합니다. 민간 축제까지 더하면 이보다 훨씬 많을 겁니다. 나오는 쓰레기의 양이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는 얘기입니다.
2019년 8월, 곽 대표는 서울 난지한강공원에서 열린 ‘서울인기 페스티벌’ 축제에서 다회용 식기 세트를 나눠주고 회수하는 시범 사업을 벌여봤습니다. 관객들이 보증금을 내고 다회용 컵과 식기로 구성된 세트를 받아가 음식 판매대에서 음료와 음식을 사 먹고 식기를 반납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시범 사업은 그야말로 대성공이었습니다. 축제장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곳이 명확해 대여·회수 코너를 운용하기 적합했습니다. 축제 운영자 입장에서는 쓰레기가 적으니 처리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죠. 이때 축제 종료 후 나온 쓰레기는 쓰레기봉투(100L) 8개에 그쳤습니다. 전년도 같은 행사에서는 쓰레기봉투 350개가 배출됐는데 말이죠. 여기에 ‘쓰레기 없이 축제를 즐길 수 있다’는 호평이 인증 사진과 함께 인스타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타고 퍼졌습니다.
그해 9월, 곽 대표는 동료 4명과 함께 트래쉬버스터즈를 세웠습니다. 플라스틱 중 인체에 무해하고 가벼워 식기 제조에 사용되는 폴리프로필렌(PP)으로 다회용 컵과 식기를 만들고 세척·살균·건조기도 구입했습니다. 대여와 반납 시스템으로 일회용품 없이 지속 가능한 행사를 만들겠다는 비전도 세웠죠.
‘서울인기 페스티벌’에서 보여준 성공 덕에 전국 축제에서 트래쉬버스터즈를 찾는 문의가 급증했습니다. 곽 대표는 “식기 제작과 사업 시스템 정비 등으로 실제 사업은 2020년부터 시작했는데, 시작도 하기 전에 연말 예약까지 꽉 차 있었다”고 회상했습니다. 당시 트래쉬버스터즈를 찾은 축제만 300~400개에 달했다고 하네요.
● 사내 일회용품, 다회용품으로 대체
시작부터 탄탄대로일 줄 알았지만, 사업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부터 흔들렸습니다. 코로나19가 직격탄을 때렸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가 2020년 2월부터 전국으로 확산되고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시행되면서 축제들이 도미노처럼 취소됐습니다. 곽 대표는 “채 여름이 오기 전에 모든 예약이 취소됐다”며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망하는 줄 알았다”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직원들 월급 줄 것을 걱정해야 할 상황이 왔지만 새로운 돌파구가 찾아왔습니다. 비대면 일상이 낳은 택배와 배달 음식 포장재가 사회적 문제로 불거진 것입니다. 여기에 기후위기 문제가 글로벌 이슈가 되면서 기업들이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 경영’에 신경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흐름을 타고 트래쉬버스터즈는 지난해 4월 서울 종로구 KT 광화문 빌딩 사내 카페에서 다회용 컵 렌털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사내 다회용 컵 렌털 사업은 축제와 비슷합니다. 입구와 출구가 한정돼 있다 보니 컵을 사용하는 곳과 반납하는 곳이 한정적이기 때문이죠. KT의 경우는 사옥 층마다 다회용 컵 수거함을 설치했습니다. 직원들이 1층 사내 카페에서 음료를 산 뒤 각자 사무실로 가져가 마시며 일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고려한 결과입니다. 트래쉬버스터즈는 각 층에 모인 컵을 하루 한 번 회수해 고온·고압으로 살균 세척한 뒤 다시 공급하고 있습니다. 일회용 컵을 사용하듯 편리하게 다회용 컵을 쓰고, 쓰레기는 줄이는 방식입니다.
KT 사내 카페 도입 이후 곽 대표의 휴대전화는 하루 종일 울렸다고 합니다. “이름만 들으면 아는 대기업 ESG 팀들로부터 다 연락이 왔어요. 어림잡아 100여 군데에서 온 것 같아요. 지금 여력상 다 받을 수가 없을 정도로….” 지금 트래쉬버스터즈 컵으로 사내 카페 일회용 컵을 대체한 기업은 삼성전자 미래기술캠퍼스(경기 수원), 현대그린푸드(경기 용인), GS타워(서울 강남구) 등 30여 군데에 달합니다.
● 다시 쓴 것도 다시 쓰자
사업은 지난해 하반기 급속도로 규모가 커졌습니다. 직원 수는 한 때 창업자 포함 6명까지 줄었지만 지금은 50여 명에 이릅니다. 투자 문의도 지속적으로 들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곽 대표에게 매출을 물으니 “‘제로(0)’에서 늘어났으니까 비교가 어려울 정도”라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최근에는 일반 카페를 대상으로 한 다회용 컵 렌털 사업도 시작했습니다. 이건 6월 시행되는 일회용 컵 보증금 제도와는 별개로, 일회용 컵 사용 자체를 줄이기 위한 시도입니다. 일회용 컵을 사용하고 싶지는 않지만, 다회용 컵을 직접 세척하기에 인력이나 시간이 부족한 카페 사업자들이 주 고객이 될 전망입니다. 수도권에 집중된 다회용 컵 사용 사무실들을 전국으로 넓힌다는 목표도 세웠습니다.
이 외 다회용 컵을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은 무한합니다. 일회용 컵을 사용하는 회사 사무실, 회의나 세미나 등 행사장, 대학 캠퍼스 등. 회수만 용이하다면 어디든 가능하다고 합니다. 여기에 코로나19 확산 전에 검토했던 영화관과 장례식장, 경기장 등에서도 조금씩 다회용 컵을 사용하거나 검토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트래쉬버스터즈 이후 다회용기를 렌털하는 사업체들도 여럿 생겨 시장을 키우는 중입니다.
여러 번 사용하면서 훼손된 다회용 컵은 어떻게 될까요. 세척과 검수 과정에서 오염물질이 묻었거나 파손된 컵들은 일단 한 곳에 모으는 중입니다. 어느 정도 양이 많아지면 다시 만드는 재료로 사용할 수 있어서죠. 곽 대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쓰는 PP 재질의 두꺼운 컵은 300~400번까지 다시 쓸 수 있어요. 그 다음에는 녹여서 다시 컵을 만들 수 있지요. 쓰레기 없이 계속 자원을 쓰는 순환 시스템을 만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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