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수영의 대표작 ‘풀’에는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의 강인한 저항정신이 담겨 있다. 그는 초기에 서정시를 많이 썼지만 6·25전쟁과 4·19혁명 등 굴곡진 현대사를 거치면서 저항시인으로 거듭난 것으로 평가된다. 23일 그를 기리는 서울 도봉구 방학동 ‘김수영 문학관’을 찾았다. 아파트 단지 안에 외딴섬처럼 자리한 이곳은 도봉구 ‘한글역사문화길’의 시작점이다.
○ 길을 걷다 시인을 만나다 ‘김수영 문학관’
지하 1층, 지상 4층의 문학관은 시인이 보낸 삶 전반의 궤적을 충실히 담고 있다. 시와 평론 중심의 1층 전시실에서는 그가 직접 쓴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등의 원고와 일대기를 감상할 수 있다. 낱말 자석으로 시도 지을 수 있고, 직접 낭독한 김수영의 시를 녹음하는 것도 가능하다.
2층에는 그가 즐겨 앉던 테이블 등의 일상 소품이 놓여 있다. 3층은 도서관, 4층은 강당인데 학술행사가 많이 열린다. 도봉구 관계자는 “아이들과 나들이 겸 역사교육을 하려는 학부모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문학관을 나와 1분 정도 걸으면 연못과 정자를 마주하게 된다. 물 위에는 푸릇한 이파리들이 잔잔히 떠 있는데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이곳을 지나면 ‘원당샘’과 맞닥뜨린다. 600년 전 파평 윤씨 일가가 모여 살면서 만든 우물이다. 2009년 물이 말랐다가 2년 뒤 복원됐는데 지금까지도 주민들의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다.
550년 된 ‘방학동 은행나무’에 얽힌 재미난 얘깃거리도 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인데 높이가 25m, 둘레가 10.7m나 된다. 고개를 뒤로 젖혀야 겨우 전체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조선 후기 경복궁을 증축할 때 베어질 뻔했지만 마을 주민들이 흥선대원군에게 간곡히 요청해 겨우 살아남았다고 한다. 2013년 서울시 기념물(제33호)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 ‘연산군묘’ ‘간송옛집’…살아있는 역사공간
은행나무 뒤편에는 ‘연산군묘’가 있다. 연산군은 폭정 끝에 중종반정으로 폐위돼 1506년 유배지인 강화군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부인 신씨의 요청으로 1512년 지금의 도봉구로 묘를 옮겼다. 서쪽에는 연산군, 동쪽에는 신씨의 묘가 있다.
맞은편에는 세종대왕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와 사위 안맹담의 묘가 있다. 위는 용, 아래는 거북 형태로 이뤄진 커다란 비석이 눈길을 끈다. 조선 전기 사대부가 무덤 양식을 연구할 때 좋은 사례가 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동진 구청장은 “한글역사문화길에는 조선시대부터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역사적 공간들이 자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묘역을 지나 10분 정도 걸으면 아담한 고택인 ‘간송옛집’을 마주하게 된다. 간송 전형필(1906∼1962)의 양아버지 전명기(1870∼1919)가 별장으로 지은 집인데, 지금은 간송의 제사를 모시는 ‘재실’ 등으로 쓰인다.
간송은 일제강점기 훈민정음 해례본 등 외국으로 유출될 뻔한 문화재를 지켜내기 위해 일생을 바친 인물이다. 이 집은 간송이 거주했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건물이다. 성북동 북단장 한옥은 소실됐고, 종로4가 본가 건물은 재개발로 사라졌다.
본채의 유리문과 함석으로 만든 지붕 물받이가 근대 한옥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마당에서 보는 풍경이 아름다워 방송 프로그램에 단골로 등장한다. 도봉산 둘레길을 즐긴 등산객들이 들르거나, 한옥 데이트를 하려는 커플들이 많이 찾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전에는 다도회나 음악회가 열리기도 했다. 집 뒤편 언덕에 간송 부부의 묘가 있다. 이미실 간송옛집 실장은 “근대 한옥이기도 하고 우리 문화유산을 보호했던 간송의 얼이 서려 있어 건축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보존 가치가 높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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