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행자에 진심인 사회로]동아일보-채널A 2022 교통안전 캠페인
〈1〉위험한 우회전, 이제는 바꿔야
15일 오전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역 오거리.
흰색 승용차가 시속 50km 이상으로 진입하더니 우회전을 시도했다. 앞에 남성 2명이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지만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결국 보행자까지 불과 2∼3m를 남겨두고서야 ‘끽’ 소리를 내며 급정거했다. 하마터면 인명사고가 날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현행법상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무조건 차량을 멈춰야 한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횡단보도 사고가 빈번한 서울 시내 사거리 등 10곳을 점검한 결과 우회전 차량 10대 중 3대가 횡단하는 보행자를 보고도 차를 멈추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7월 12일부터는 새 도로교통법이 시행된다. 횡단보도에선 통행을 기다리는 대기자만 있어도 차량을 일단 세워야 한다. 신호등이 없는 어린이보호구역 내 횡단보도에선 사람이 없어도 일시정지를 해야 한다.
하지만 현행 법규조차 안 지켜지는 상황에서 새 규정이 얼마나 실효성을 가질지 의문이라는 전문가들이 상당수다. 임재경 한국교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우리나라는 여전히 보행자보다 운전자 중심의 교통체계가 작동되고 있다”고 했다.
차량 ‘거친 우회전’에 깜짝… 보행자 벌벌 떠는 횡단보도
보행자 아랑곳 않는 우회전 빈번… 우회전 사망사고 59% 횡단중 발생 “녹색불에도 보행자가 눈치 보게돼”… 7월부턴 ‘대기자’ 있으면 멈춰야 적색신호땐 대응 규칙도 곧 마련… “보행자 중심으로 인식 전환 절실”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안국동 사거리.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빠르게 진입하더니 우회전하면서 곧장 횡단보도로 진입했다. 횡단보도 주변에는 10여 명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운전자는 개의치 않았다. 마침 녹색등이 켜지고 사람들이 길을 건너기 시작했지만 차량은 오히려 속도를 높여 횡단보도를 통과했다.
사거리에는 ‘우회전 시 일단 멈춤’ 권고 표지가 있었다. 반대편에서도 사람들이 건너오고 있었지만 차량의 브레이크등은 끝내 켜지지 않았다. 보행신호가 켜진 걸 보고 건너려다가 멈칫하고 차량이 지나길 기다린 한 남성은 “차가 멈추지 않을 것 같아 발을 떼기가 무서웠다”고 말했다.
○ 횡단 보행자 보면서도 버젓이 주행
올해 7월 12일부터 보행자 보호 의무를 강화한 도로교통법 개정안이 시행된다.
기존에는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통행하고 있을 때’만 차량이 정지하면 됐지만 앞으론 횡단보도에 진입하지 않고 ‘통행을 하려는 때’에도 차량을 멈춰야 한다. ‘대기자’가 인도에 서 있어도 일단 차량을 세워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동아일보 취재팀이 횡단보도 사고가 빈번한 서울 종로 성북 강남 동대문 일대 사거리 등 현장 10곳을 둘러보니 ‘보행자 횡단 시 정지’라는 현행 법 규정도 안 지켜지는 경우가 많았다.
15일 찾은 중랑구 화랑대역 교차로의 경우 우회전하면 바로 신호 없는 횡단보도가 나온다. 30분 동안 지켜봤는데 보행자가 길을 건너고 있거나 건너려는 상황에서 차를 멈춘 우회전 차량은 40대 중 단 1대에 불과했다.
○ 우회전 사상자 4년간 1만3362명
전문가들은 차량이 우회전할 때 사고 위험이 특히 높다고 입을 모은다. 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교통사고 보행 사상자 중 우회전 교통사고로 발생한 비율은 2018년 9.6%에서 2020년 10.4%로 증가 추세다.
최근 3년간(2018∼2020년) 우회전 교통사고로 사망한 보행자는 212명, 부상자는 1만3150명에 달했다. 사망자 절반 이상(59.4%)은 도로 횡단 중 사고를 당했다. 특히 횡단보도 사망자는 94명으로 횡단보도 밖 사망자와 3배 가까이나 됐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양정훈 도로교통공단 사고조사연구원은 “우회전 시 차량이 보도 측에 인접하여 회전하는데 자동차 구조상 사각지대가 발생해 보행자를 인식하기 어렵다”며 “특히 화물차 버스 등 대형 차량의 경우 회전 반경이 크기 때문에 더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현장에선 대형 차량으로 인한 아찔한 순간이 적잖게 목격됐다. 16일 찾은 성북구 하월곡동 종암 사거리에선 보행신호에 한 여성이 길을 건넜는데 흰색 트럭이 그대로 우회전해 횡단보도로 진입했다. 여성은 놀라 그 자리에서 멈췄고 뒤늦게 트럭이 급정거했다. 평소 이곳을 자주 통행한다는 장모 씨(37)는 “이 도로는 항상 무섭다”며 “녹색 신호에도 오히려 보행자들이 눈치를 보며 건너야 한다”고 했다.
○ 보행자 중심으로 인식 전환을
경찰청은 개정 도로교통법상 ‘통행을 하려는 때’라는 문구에 대한 명확한 지침을 조만간 정할 방침이다. 신호등이 있는 횡단보도에서 인도에 대기자가 있고 보행신호가 적색일 때 일시정지를 의무화할지 등 상세한 내용이 조만간 정해진다.
다만 전문가들은 이번 도로교통법 개정을 계기로 ‘운전자 중심’에서 ‘보행자 중심’으로 인식 전환을 가속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한상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미국은 이미 1950년대에 보행자 중심으로 교통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논의가 나왔는데 우리나라에선 너무 늦었다”고 지적했다. 이성렬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보행자 보호 의무가 운전자에게 있다고 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잘 보호되지 않았다”면서 “이번 법 개정을 시작으로 보행자 중심으로 패러다임을 바꾼다면 사고 감소 등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美, 교차로 우회전때 ‘일단 정지후 보행자 확인’이 기본
교차로서 직진車-보행자에 우선권… 전방 빨간불땐 우회전 금지한 곳도 ‘방향 반대’ 日, 좌회전 규정 엄격… ‘직진 신호때만 천천히’ 습관화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주재원으로 파견 나온 A 씨는 미국 입국 직후 운전을 하다 당황스러운 경험을 했다.
한국에서 하던 대로 교차로에서 차를 멈추지 않고 핸들을 오른쪽으로 돌린 것이 화근이었다. 슬금슬금 우회전을 하려는데 오른편 횡단보도를 건너던 사람이 멈춰 서더니 정색을 하고 ‘뭐 하는 거냐’고 소리쳤다. 보행자와 스치지도 않았지만 마치 큰 사고를 낸 것처럼 질책을 당했다. A 씨는 그 후 미국에서 어디를 가도 일단 교차로에서는 정지하고 주위를 살피는 습관이 생겼다.
미국은 각 주마다 교통 규칙이 다르다. 우회전할 때 지켜야 할 규칙도 조금씩 다른 데, 대체적으로 보면 한국보다 교차로 우회전에 제약이 많은 편이다.
뉴욕주의 경우 교차로에서 직진 신호가 빨간불이고 따로 우회전 신호가 없을 때는, 일단 차를 교차로에서 멈추고 왼쪽에서 오는 차량 및 횡단보도 보행자에게 우선권을 양보한 뒤에야 천천히 우회전을 할 수 있다. 만일 ‘NO TURN ON RED’(빨간불에 회전 금지)라는 표지판이 있다면 반드시 파란불에만 우회전이 가능하다. 특히 차량 통행이 많은 뉴욕시 안에선 별도 표시가 없는 한 전방 빨간불에서 우회전하면 안 된다.
캘리포니아주에서도 전방 빨간불에 우회전하려면 일단 오른쪽 차선에 붙은 뒤 교차로에서 반드시 정지해야 한다. 보행자나 자전거, 다른 차량들이 모두 지나간 뒤에야 천천히 우회전을 할 수 있다.
신호등이 없는 교차로의 경우 ‘STOP’(정지) 표지판에 따라 무조건 일단 정지해야 한다. 가장 먼저 교차로에 도착해 정지한 차량에게 우선권이 있다. STOP 표지판 앞 정지는 미국 어디서나 지켜야 하고, 운전자 사이에서도 체화돼 있다.
일본은 한국 미국과 주행 방향이 반대라 한국의 우회전은 일본에선 좌회전에 해당한다. 일본에선 직진 신호가 들어와야 좌회전을 할 수 있고, 빨간불일 때는 좌회전을 하면 안 된다. 일본 도로교통법 34조는 ‘좌회전 시 미리 도로 왼쪽 끝에 붙어서 가능한 한 도로 왼쪽 끝을 따라 서행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좌회전할 때 운전자들이 보행자를 적극적으로 배려하는 것도 한국과의 차이다.
10일 오후 4시부터 한 시간 동안 도쿄 주오구 쓰키지의 교차로에서 차량의 좌회전 상황을 점검해봤다. 차량 153대가 좌회전을 했는데, 모든 차량이 왼쪽 끝 차선으로 이동해 차례대로 좌회전을 했다. 왼쪽 끝이 아닌 차선에서 급하게 좌회전을 하거나, 차량 두 대가 동시에 좌회전을 한 경우는 없었다.
횡단보도에 한 발짝이라도 내디딘 사람이 있으면 차량 대부분은 일단 정지했고,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벗어난 다음에야 움직였다.
특별취재팀
▽ 팀장 강승현 사회부 기자 byhuman@donga.com
▽ 김재형(산업1부) 정순구(산업2부) 신지환(경제부)
김수현(국제부) 이기욱(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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