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암산 등 정상석·로프 훼손한 대학생
아르바이트 스트레스가 범행으로 이어져
수락산 1~2시간 완주, ‘날다람쥐’ 같은 등산 실력
“언론 보도 보며 재범 충동”
경찰, 증거 찾으려 주 3일 등산
최근 서울과 경기 남양주시 등에 걸쳐 있는 수락산, 불암산 봉우리 5곳의 정상석과 안전로프 1개를 잇달아 훼손한 사건은 대학생 A 씨(20)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받은 스트레스를 풀려고 벌인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달 31일 붙잡힌 A 씨는 경찰 조사에서 “사람들이 산 정상에 올라 정상석 옆에서 사진을 찍으며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 배가 아팠다”며 범행을 모두 시인했다.
●훼손 보도 보며 “기분 좋았다”… 충동적 재범
남양주 북부경찰서에 따르면 그의 첫 범행은 지난해 12월 말 서울 노원구 수락산 도솔봉에서 벌어졌다. A 씨의 취미는 등산. 여느 때처럼 산에 오른 그는 도솔봉 정상에서 정상석과 함께 사진을 찍는 등산객들의 모습을 봤다. 당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상태였던 A 씨는 정상석 옆에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는 등산객들의 모습이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어떻게 해야 저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A 씨는 잠시 등산객이 없는 틈을 타 도솔봉 정상석을 슬금슬금 밀었다. 생각보다 쉽게 ‘탁’하며 정상석이 쓰러지자 그는 산비탈 아래로 정상석을 굴려버렸다. 경찰에 따르면 그는 범행 당시 “묘한 희열을 느끼며 한결 기분이 나아진 상태였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범죄심리학자인 배상훈 경찰대 외래교수는 “사회성과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박탈감을 느끼면서 이것이 물건을 향한 공격성으로 나타난 것”이라며 “이것이 반복되다 보면 대인 공격성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는데, A 씨는 그 단계로 가기 전에 잡히게 돼 오히려 다행”이라고 분석했다.
두 번째 범행은 더 대담했다. 첫 번째 범행을 저지르고 약 한 달이 지났을 무렵인 올 1월 말. 그는 접이식 톱을 챙겨 수락산 기차바위의 안전로프 6개를 잘라 끊어버렸다. 기차 바위는 약 30m 높이 가파른 경사의 암벽이어서 안전 로프를 잡고 오르내려야 하는 구간이다. A 씨는 이 범행 역시 “등산객들이 정상에서 기뻐하는 모습이 보기 싫어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이어 그는 2월말 수락산 도정봉 정상석을, 3월 중순 수락산 주봉 정상석을 흔들어 빼낸 뒤 비탈 아래로 굴렸다.
이웅혁 건국대 범죄심리학 교수는 A 씨의 범행에 관해 “다른 사람들의 행복감을 방해하고 차단했다는 성취감과 범행 당시 느낀 좋은 기분에 어느 정도 중독이 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수락산 정상석이 없어졌다는 사실이 처음 알려진 건 3월 17일 언론보도를 통해서였다. 경찰 조사에서 A 씨는 언론에 보도된 자신의 범죄를 보며 “기분이 좋았다”고 진술했다. 방에 가만히 있을 때도 이따금씩 정상석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리며 재범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동시에 “이러다 잡힐까 걱정이 돼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범행 발생 전 정상석의 사진을 지우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범인은 이어 3월 22일 불암산 애기봉 정상석과 3월 27일(추정) 수락산 국사봉 정상석을 훼손했다. 정상석 ‘실종’ 사태가 반복되면서 사건에 대한 사회적 주목도 더 커져갔다.
●시민 제보가 검거의 결정적 단서
경찰에 따르면 A 씨는 ‘날다람쥐’ 같은 등산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조사 결과 일반인이 3~4시간가량 걸리는 수락산 등산 코스를 그는 1~2시간 만에 완주할 정도였다. 그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주로 이른 아침과 같은 시간대를 노렸다. 겨울철에는 등산객들의 하산 시간대가 이른 점을 이용해 늦은 오후에 범행을 저지르고 빠르게 내려오기도 했다.
범행에 사용한 장비는 노루발못뽑이(빠루)와 접이식 톱이었으며, 하산 중 산 중턱에 버려 증거를 인멸했다.
경찰은 꽤나 골머리를 앓았다. 범행 장소는 넓은 지역에 걸쳐 있는 여러 봉우리였고, 등산로나 산봉우리 주변엔 폐쇄회로(CC)TV도 흔치 않았다. 경찰은 수차례 현장을 조사했지만 뚜렷한 단서가 없어 수사에 난항을 겪었다.
그러던 중 한 시민이 경찰에 결정적 단서를 제보했다. 3월 21일 경찰은 ‘노랑머리를 한 사람이 불암산의 애기봉 정상석을 끌어안고 수상한 행동을 한다’는 신고를 받았다. 경찰은 현장에 출동해 A 씨를 추궁했지만 A 씨는 혐의를 모두 부인했다. 당시엔 애기봉 정상석도 큰 이상이 없었다. 경찰은 일단 A 씨의 신원을 파악한 뒤 돌려보냈다.
경찰을 비웃기라도 하듯 A 씨는 다음날인 22일 다시 불암산에 올랐다. 이윽고 애기봉의 정상석이 사라졌다는 신고도 접수됐다. 경찰은 전날 파악한 인적사항을 토대로 A 씨의 동선을 추적했다. 등산로 초입 도로 인근부터 그의 거주지까지 폐쇄회로(CC)TV 영상 등을 며칠에 걸쳐 샅샅이 뒤졌다.
조사 결과 A 씨는 집에서 나갈 땐 노루발못뽑이를 들고 나갔다가 돌아올 땐 빈손인 경우가 많았다. 또 엘리베이터 CCTV 영상에 녹화된 A 씨는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모습이었는데, 엘리베이터 후면 거울에 반사된 그의 휴대폰 화면에서 정상석 사진 등을 검색하는 듯한 모습이 비쳐졌다.
경찰은 A 씨가 범인임을 확신하고 바로 영장을 받아 압수수색에 나섰다. 31일 오전 A 씨는 범행을 모두 시인했다. 등산이라는 건강한 취미를 가진 줄로만 알았던 아들이 정상석 실종사건의 범인으로 밝혀지자 함께 사는 A 씨의 부모님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고 한다.
●경찰, “평생 할 등산 이번에 다해”
증거물 확보는 여전히 숙제다. A 씨의 자백이 있다 해도 증거가 확보돼야 혐의를 더 확실히 입증할 수 있다.
경찰은 범행에 사용된 노루발못뽑이와 접이식 톱, 아직 회수하지 못한 정상석 1개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정상석이 어디까지 굴러 떨어졌는지도 알 수 없는데다 몇 개월 동안 쌓인 낙엽과 흙이 정상석을 덮고 있을 소지가 크다.
남양주북부경찰서 관계자는 “일주일에 3일씩, 갈 때마다 6시간씩 산을 살펴보는데 증거물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며 “일반 강력범죄보다도 증거물 찾기가 더 어렵다”고 토로했다. 담당 수사관들은 “평생 할 등산을 이번에 다 하고 있다”면서도 “증거를 정 못 찾으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최선을 다해 찾아볼 것”이라고 했다.
경찰은 모방범죄 발생을 우려하고 있다. 여전히 등산로, 산 정상 주변에 CCTV가 없는 곳이 많아 사실상 모방범죄에 무방비라는 지적도 나온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날이 풀려 등산객들이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등산로 입구와 정상 부근에는 CCTV를 설치한다면 비슷한 범죄를 예방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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