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참사 공론화 11년 만에 가까스로 마련된 피해자와 가해기업 간 조정안이 좌초 위기에 처했다. 가장 많은 피해자를 낸 기업이 조정안에 반대해 조정위원회의 설득 작업에 관심이 쏠린다.
가습기살균제 피해 조정위는 11일 오전 10시 서울 광화문 변호사회관에서 그간 조정 경과를 보고하는 기자간담회를 열 예정이다. 간담회에는 헌법재판관을 지낸 김이수 위원장이 참석한다.
이날 기자간담회에서는 최종 조정안이 마련되기까지 협상 과정과 더불어 최종안에 ‘부동의’ 의사를 밝힌 옥시레킷벤키저(옥시)와 애경산업에 대한 향후 설득 방안에 초점이 맞춰질 전망이다.
조정위는 참사 공론화 10년을 계기로 지난해 10월5일 정식 출범했다. 옥시, 애경산업, 이마트, 롯데쇼핑, 홈플러스, SK케미칼, SK이노베이션, LG생활건강, GS리테일 등 9개 가해기업과 피해자단체 20여개가 조정에 참여했다.
조정위는 출범 6개월 만인 지난 3월 최종 조정안을 확정했다. 피해 연령이 낮을수록, 피해 등급이 높을수록 더 많은 금액을 지급하는 것이 골자다. 예를 들어 초고도 등급 피해자의 경우 최대 8392만(84세 이상)~5억3522만원(1세)을 지급받는다. 조정대상 피해자(7027명) 중 과반이 동의해야 효력이 발생한다.
최종안을 두고선 분류 기준, 금액을 놓고 반발한 일부 피해자단체의 삭발·단식농성이 잇달았다. 다른 한편에서는 피해구제를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만큼 조정안이 미흡하더라도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는 엇갈린 반응이 나왔다.
피해자 간 이견과 별개로 조정안은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옥시, 애경산업이 금전 부담 및 경영난을 이유로 ‘부동의’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다. 나머지 7개 기업은 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법(피해구제법) 34·35조에 따라 무기한 지급해야 하는 기업의 피해구제분담금을 종결해 달라는 조건부 동의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구체적인 배경에는 재원 마련 비율을 둘러싼 기업 간 ‘눈치싸움’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조정위는 기업 간 협상을 통해 재원 비율을 정하지 못할 경우 피해구제법상 산정 방식을 채택하도록 했는데 이 경우 옥시가 약 9200억원으로 추산되는 전체 구제지원금의 60%를 내야 한다. 옥시 측은 과거 405명에게 자체 보상을 했던 만큼 비율 조정을 희망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구제지원금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옥시가 불참할 경우, 옥시의 참여를 위해 다른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비율 조정에 나서지 않는 한 조정은 사실상 무산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옥시를 제외한 조정안은 구제 대상·지원액이 대폭 축소돼 무의미하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조정 무산 시 피해구제가 더욱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최종 조정안에 따르면 피해판정 생존자(922명) 가운데 70세 이상은 103명, 60대는 111명이다. 중증 만성질환 외에 합병증으로 투병하는 피해자도 적지 않다. 피해자들은 시간이 흘러 참사 자체가 잊혀질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참사 피해자·유족들은 활동 기한에 제한이 없는 조정위가 최대한 기업을 설득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피해자 고(故) 박영숙씨의 남편 김태종씨는 지난 6일 기자회견에서 “‘조정위가 깨지면 피해자들만 손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피해자들을 협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조정위는 가해기업을 설득해 조정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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