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오후 3시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이면도로. 보도가 없는 골목길 사이로 걸어가던 김모 씨(31)가 뒤에서 나타난 대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의 경적소리에 깜짝 놀라 급하게 몸을 피했다. 이 차량은 주변에 있던 10여 명의 보행자를 아랑곳하지 않고 빠른 속도로 스칠 듯이 지나갔다.
이날 동아일보 취재팀이 유동인구가 많은 마포구 서교동과 합정동 일대 골목길 4곳을 점검한 결과 보행자를 위협하거나 경적을 울리며 무리하게 주행을 한 차량이 시간당 평균 15대 이상 발견됐다. 골목길을 걷는 보행자의 안전이 4분마다 한 번꼴로 위협받는 것이다.
○ 7월부터 보행자 우선도로 시행
도로교통법 개정으로 이달 20일부터 이면도로를 주행하는 차량의 보행자 보호 의무가 대폭 강화된다. 운전자는 보도와 차도의 구분이 없고, ‘중앙선이 없는’ 도로에서 보행자의 옆을 지나는 경우 안전한 거리에서 서행해야 하며 보행자 통행에 방해가 된다면 일시 정지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보행자가 차량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도로 끝으로 걸어야 했지만 20일부터는 차량을 피하지 않아도 되는 것. 이를 위반하면 승합차 5만 원, 승용차 4만 원, 이륜차 3만 원, 자전거 2만 원의 범칙금이 부과된다.
특히 올해 7월 12일부터는 차량보다 보행자의 통행을 우선하는 ‘보행자 우선도로’가 도입된다. 지방자치단체장은 보행자의 안전이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이면도로 등을 보행자 우선도로로 지정하고 안전표지나 속도저감 시설 등을 설치할 수 있다. 필요에 따라서는 경찰이 차량 속도를 시속 20km 이내로 제한하는 것도 가능하다.
국내 교통사고 사망자 3명 중 1명이 보행자일 정도로 보행자 안전이 지속적으로 위협받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조치다. 지금은 도로 정비가 안 된 이면도로일수록 보행자의 위험도 높다. 이날 대학생이 많이 거주하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한 골목길에서도 시속 30km 이상의 빠른 속도로 달리거나 보행자를 향해 경적을 울리는 차량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대학생 정성희 씨(26)는 “도보로 이동하는 대학생과 고령층이 많은 골목이지만 위험하게 달리는 차량들이 상당히 많다”며 “7월부터 보행자 우선도로가 도입된다고 해도 잘 정착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성렬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차량 운전자는 누구나 보행자 보호의 의무가 있는데 보행자 우선도로는 보도·차도 구분이 없는 이면도로 등에서 이 원칙을 더 강화하는 것”이라며 “당장 모든 도로에서 시행하긴 어려운 만큼 보행자 사고가 많은 골목길을 중심으로 지정되면 보행자 사고 예방에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 보행자 우선도로 지정 후 양보 차량 증가
국토교통부 등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교통사고 사망자는 2900명으로 잠정 집계됐다. 교통사고 사망자가 연간 2000명대에 진입한 것은 처음이다. 하지만 자동차 1만 대당 사망자 수는 1.16명으로, 선진국(0.5명 수준)과 비교하면 여전히 높은 편이다. 전체 교통사고 사망자의 34.8%를 차지하는 보행 사망자(1009명)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19.3%)의 두 배 수준이다.
선진국에 비해 보행 사망자가 많은 것은 이면도로 사고 위험이 높아서다. 송호권 행정안전부 안전개선과 팀장은 “2020년 통계를 보면 보행자 사망자가 발생한 교통사고 대다수가 이면도로에서 발생했다”며 “보행자가 차량을 피해 길 가장자리로 다니는 등 차량 통행이 보행자 안전보다 우선되는 교통문화도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는 보행자 우선도로가 보행자 사고 예방에 효과적일 것으로 보고 있다. 행안부가 서울 영등포구와 마포구, 대전 서구, 부산 북구 사하구, 충북 청주시 등 6개 지역에 시범 조성한 보행자 우선도로의 성과를 분석한 결과 보행자와 차량이 함께 통행하는 상황에서 차량이 양보하는 비율은 2019년 15.4∼50.8%에서 2020년 33.3∼73%로 증가했다. 보행환경 안전성에 대한 설문조사 만족도(10점 만점) 역시 4.9∼6.6점에서 7.5∼8.1점으로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보행자 우선도로가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보행자 보호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제도 홍보는 물론이고 운전자들의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임재경 한국교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적극적인 홍보로 제도 시행을 알려 잘못된 관행을 바꾸는 동시에 보행자 통행이 우선되는 도로임을 알 수 있는 안전시설 등의 설치도 중요하다”라고 지적했다. 오성훈 건축공간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시행 초기 일제 단속 기간을 정해 두고 경각심을 키울 필요가 있다”며 “내비게이션 프로그램을 활용해 보행자 우선도로임을 알려주는 방식도 효과적일 것”이라고 조언했다.
네덜란드 보행자우선도로선 시속 15km 제한
주거지역 운전자-보행자 공존 英 ‘홈존’ 獨 ‘템포30존’ 운영 美 뉴욕선 차도 줄이거나 보도 넓혀
네덜란드 영국 독일 등 ‘보행 선진국’으로 꼽히는 나라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주거지역을 중심으로 보행자 우선도로를 도입해 운영 중이다. 보행 선진국들은 △도보와 차도의 통합 △지그재그형 도로 구축 △조경 및 휴식 공간 조성 등을 통해 차량의 속도가 자연스레 낮아지도록 유도한다.
네덜란드의 ‘보네르프(woonerf)’는 대표적인 보행자 우선도로다. 1960년대 급증하는 교통사고로 골머리를 앓던 네덜란드 델프트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집 앞 도로에 화분 등 방해물을 설치하면서 조성되기 시작됐다. 네덜란드 정부와 의회는 1976년 도로교통법 개정을 통해 보네르프를 아예 제도화시켰다. 지그재그형 도로와 과속방지턱을 도입하고 길 곳곳에 가로수 및 벤치 등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차량의 속도를 낮췄다. 보네르프란 네덜란드어로 ‘생활의 터전’이라는 뜻이다.
보네르프의 핵심은 운전자와 보행자의 ‘공존’이다. 운전자와 보행자는 도보와 차도 구분 없이 모두 같은 도로를 이용한다. 다만 공존의 전제는 ‘차량의 서행’이다. 이곳을 지나가는 차량은 보행 속도(최대 시속 15km)보다 빠르게 운전할 수 없고, 보행자의 이동을 방해해서도 안 된다. 반면 보행자는 불필요하게 차량을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도로 전체에서 마음껏 놀 수 있고 이웃과 앉아서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보네르프는 계속 진화 중이다. 1988년에 주거지역 외에도 상업지역과 도심부, 역사보존지구 등으로 적용 대상이 늘어났으며 설계 기준도 대폭 간소화됐다. 최근에는 자전거 주차시설이나 어린이 전용 놀이터를 확충하는 등 더욱 보행자 친화적 환경을 조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영국은 1999년부터 ‘홈존(Home Zone)’이라는 보행자 우선도로를 시행했다. 오후 기준 최대 통행량이 시간당 100대를 넘지 않고, 총길이 600m 미만의 도로에 한해 차량 속도를 시속 약 16km 이하로 제한한다. 최근 영국에선 주민들이 직접 참여해 보행자 우선도로를 설계하는 ‘DIY(Do It Yourself·손수 만들기) 도로’도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도로 정비 비용을 줄이고 주민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할 수 있어서다.
독일도 1983년부터 차량 제한속도를 시속 30km 이하로 제한하는 ‘템포30존(Tempo 30 Zone)’을 운영하고 있고 미국 뉴욕 맨해튼에선 브로드웨이를 중심으로 차도를 과감히 줄이고 보도를 넓히거나 아예 차량 진입을 금지하는 ‘도로 다이어트’가 시행 중이다.
오성훈 건축공간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과거 주거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던 보행자우선도로가 도심 전체로 확장되는 추세”라며 “안전과 더불어 사회적 교류 등을 통해 보행자의 행복지수까지 높이는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별취재팀
▽ 팀장 강승현 사회부 기자 byhuman@donga.com ▽ 김재형(산업1부) 정순구(산업2부) 신지환(경제부) 김수현(국제부) 이기욱(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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