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수사 지연 더 심해질 가능성 커
“성폭행 피해 35시간 만에 고소하자 고소 늦었다고 경찰이 무혐의 결정”
경찰 소극적 수사 더 늘어날 수도… 변호사들 “경찰서별 수사력 큰 편차
지방은 신종금융범죄 대응 떨어져”
“심지어 피해자는 사건이 발생한 지 35시간이 경과한 시점에야 고소장을 제출했으며….”
올 1월 성폭행을 당한 후 가해자를 고소한 피해자 A 씨는 지난달 경찰로부터 이 같은 내용의 불송치 결정서를 받았다. “회사 대표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며 고소했는데, 경찰이 무혐의 결정을 내리고 사건을 종결한 것. 현행법상 공소시효(10년) 내에만 고소하면 되는데 경찰은 피해자가 고소를 늦게 했다는 점 등을 이유로 ‘혐의 없음’ 판단을 내렸다.
A 씨를 대리하는 법무법인 온세상의 김재련 대표 변호사는 “35시간이면 만 이틀도 안 지나 고소한 건데, 이게 왜 불송치 결정 근거가 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며 “검찰에 보완수사를 요청하는 이의신청서를 작성 중”이라고 했다. 김 변호사에 따르면 피해자 휴대전화에는 가해자가 범행 사실을 인정하며 ‘한 번 봐달라’는 취지로 말하는 녹음 파일이 있었지만 경찰은 이를 확인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 박원순 시장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자 측을 대리했던 김 변호사는 3일 대한변호사협회에서 진행한 변호사-시민 필리버스터에 참석해 “교대 근무를 하고 승진을 위한 공부에 몰두하는 수사관이 사건을 맡으면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통화 자체가 어려울 정도”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단순 데이트폭력도 1년간 수사 안 돼”
민생 사건을 주로 맡는 변호사들은 지난해 검경 수사권 조정 이후 경찰의 부실 수사 및 수사 지연이 심각한 상황이라고 입을 모은다. 3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친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이 9월부터 시행되면 상황이 더 심각해질 것이란 우려가 많다.
법무법인 혜명의 오선희 변호사는 “피의자가 피해자를 한 차례 때린 데이트폭력 사건이 있었는데 지난해 6월 고소한 이후 1년 가까이 처리가 안 되고 있다”며 “검수완박 이후엔 검찰이 직접 수사하는 대신 보완수사를 요구하는 경우가 늘면서 경찰의 사건 적체가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법률사무소 심앤이의 이지훈 변호사도 “검경 수사권 조정 전에는 성범죄 피해 사건의 경우 의뢰인에게 기소까지 3∼6개월 정도 걸린다고 했는데 지금은 6개월에서 1년 이상 걸린다고 안내한다”고 했다.
실제로 대한변협이 1일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국 변호사 73.5%(1155명 중 849명)는 ‘경찰 수사 단계에서 조사가 지연되거나 연기된 사례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 “금융범죄는 강남 경찰서에 접수 유도”
경찰서별 수사력 편차도 크다. 특히 사기, 횡령, 배임 등 거액의 돈이 관련된 범죄의 경우 수사 경험이 많은 경찰서와 그렇지 않은 경찰서 간의 수사력 차이가 극명하다고 한다.
변호사 B 씨는 “가상화폐 사기 등 신종 금융범죄의 경우 지방 경찰서의 대응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2년 전 경북의 한 경찰서에 가상화폐 피해자가 고소장을 접수시켜 사건을 대리한 적이 있는데, 경찰서에서 전혀 다뤄보지 않았다고 해서 수사관에게 세부 내용을 하나하나 설명해줘야 했다”고 했다.
그는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금융범죄 등은 피고소인의 거주지와 회사 주소지 등을 꼼꼼히 뒤져 어떻게든 수사 경험이 많은 강남경찰서나 서초경찰서에 접수시키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밝혔다.
변호사들은 검수완박법 시행으로 검찰 보완수사가 ‘동일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로 한정되면 민생사건 피해자들의 고충이 더 커질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오선희 변호사는 “수사 과정에서 추가 피해자가 드러날 가능성이 큰 성폭력 사건의 경우 검찰 보완수사를 통해 추가 피해자를 찾아낼 수 있는 가능성이 봉쇄된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편 김창룡 경찰청장은 3일 검수완박 법안 국무회의 의결 직후 “지난해 수사권 조정 이후 현장 부담이 가중돼 있음을 잘 안다. 인력, 예산 등 수사 인프라를 확충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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