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FT 원조 ‘크립토펑크’, 고양이 수집 게임 ‘크립토키티’ 흉내 내
“캐릭터 사면 토큰 주겠다” 속이고 잠적
‘제 2의 코인 대박’ 기대 투자자, 사기당하기 쉬워
디지털 파일 ‘등기부등본’ NFT, 실물 자산과 투자 본질 같아
2015년 소더비 경매에선 한 고양이 그림이 82만6000달러에 팔렸습니다. 우리 돈으로 10억 원이 넘는 가격입니다.
1891년 샌프란시스코의 백만장자 케이트 버즈올 존슨(Kate Birdsall Johnson) 씨의 집에는 고양이가 350마리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경마 그림으로 유명하던 화가 칼 칼러(Carl Kahler)가 그중 42마리를 가로 260㎝, 세로180㎝의 캔버스에 그린 그림입니다. 제목은 ‘내 아내의 연인들’. 유명 화가가 정성들여 그린 단 한 점뿐인 그림이니 10억 원이란 가격이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고양이 그림을 팔아 돈을 번 사람들이 또 있습니다. 이들은 ‘캣슬(CatSle)’ 시리즈라고 이름 붙인 고양이 그림 5000장을 300여 명에게 총 2억7000만 원에 팔았습니다. 벽에 걸어두고 감상할 수 없는 디지털 파일에 불과한데다, 그림도 매우 조악합니다. 이 그림을 판 A 씨(26)와 공범 4명은 최근 사기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대체 이 그림들은 왜 2억7000만 원이나 했을까요? 사기 혐의를 받는 건 조악한 그림을 비싸게 팔아서였을까요?
● “이걸 왜 돈 주고 사?”
이들은 고양이 그림들을 ‘대체불가능토큰(NFT·Non-Fungible Token)’으로 만들어 팔았습니다. 디지털 파일은 복사해서 내 컴퓨터에 저장하면 그만인데, 투자자들은 대체 NFT가 뭐라고 돈을 주고 구입한 걸까요.
NFT는 ‘블록체인’을 활용해 디지털 파일 원본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기술입니다. 쉽게 말해 디지털 세상의 ‘등기부등본’입니다.
NFT가 등장하기 전에는 디지털로 그린 그림의 저작권을 주장할 순 있어도, 소유권을 입증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마우스 클릭 몇 번으로 복제가 가능한 디지털 세상에선 원조와 복제품을 구별할 수 없으니까요.
NFT가 생기면서 모든 게 달라졌습니다. 원본의 소유권을 증명할 수 있는 디지털 등기부등본이 생겼으니, 복제품이 쏟아져도 원본의 가치를 유지할 수 있게 됐습니다. 만일 내가 컴퓨터로 그린 그림을 NFT로 만들면 그 소유권을 증명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소유권을 다른 사람에게 팔 수도 있게 된 겁니다.
● “NFT 자산 가치 오르려면 역사성과 상징성 필요”
그렇다면 NFT 자산의 가치를 어떻게 결정되는 걸까요? 블록체인 전문가 김승주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실물 자산과 똑같다고 보면 된다”고 답합니다.
칼러의 그림 얘기로 돌아가 봅시다. 칼러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고양이들의 성격과 습관을 공부하며, 스케치하는 데만 3년을 보냈습니다. 독일에서 유명 미술 대학 중 하나인 뮌헨 미술대를 나온 칼러는 이미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활동하며 경마 장면을 그린 화가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작가는 1906년 3000명 이상이 사망한 샌프란시스코 지진 때 사망했지만, 그림은 살아남았습니다. 단 한 점뿐인 그 그림을 갖길 원하는 사람은 많았고,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높은 가격에 거래된 거였죠.
NFT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김승주 교수는 “미술 작품의 가치가 높아지려면 작품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 NFT 자산 역시 가치가 올라가려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싶어 하는 대상이어야 하고, 그러려면 역사성과 상징성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NFT 자산 중 대표적 히트 상품은 2017년 발행된 ‘크립토펑크’입니다. 1만 개만 만들어진데다 ‘NFT의 원조’라는 역사성과 상징성이 더해지면서 점점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습니다. 외계인이 마스크를 쓰고 있는 형상인 크립토펑크 7523번은 지난해 6월 소더비 경매에서 약 140억 원에 거래되기도 했습니다.
● 고양이 캐릭터 갖고 있으면 가상화폐 준다?
고양이 캐릭터 NFT인 ‘캣슬’ 시리즈는 지난해 11월 처음 발행됐습니다. 당시는 NFT 투자 열풍에 힘입어 이름 모를 수많은 NFT가 쏟아진 뒤였습니다. 고유의 역사성과 상징성 같은 건 없었습니다. 캣슬 시리즈를 만든 운영자들은 NFT의 가치를 높이려 다른 방법을 찾았습니다. 이들은 “이 NFT를 사면, 구입한 양만큼 가상화폐로 교환할 수 있는 토큰을 주겠다”고 홍보했습니다. 쉽게 말해 ‘배당’을 미끼로 내건 겁니다.
독자 여러분은 “고양이 캐릭터를 사면 매달 현금 배당을 주겠다”는 말이 믿어지시나요? 캣슬 운영자의 말을 믿고 이 NFT를 산 사람은 300여 명에 달했습니다. 김승주 교수는 이를 두고 “NFT 자산의 본질이 실물 자산과 같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업계 전문가들은 캣슬 운영자들의 수법이 꽤 치밀했다고도 합니다. 조악한 픽셀 이미지로 만들어진 캐릭터는 위에서 설명한 ‘크립토펑크’를 모방한 것이고, 다른 동물이 아닌 고양이를 택한 것은 NFT 업계에서 가장 성공한 프로젝트로 꼽히는 가상 고양이 육성 게임인 ‘크립토키티’를 벤치마킹했단 겁니다.
크립토키티는 가상공간에서 고양이 캐릭터를 수집하고 교배시켜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고 이를 사고파는 게임입니다. 모든 고양이 캐릭터의 생김새는 서로 다르게 만들어져 게임 유저들은 전 세계에 단 하나뿐인 고양이를 갖게 됩니다. 고양이가 얼마나 귀한지에 따라 가격이 매겨집니다.
이해하기 어렵다면, 유명 모바일 게임 ‘포켓몬고’를 떠올리면 됩니다. 포켓몬고 게임 유저들의 목표는 ‘전설의 포켓몬’으로 불리는 희귀 포켓몬을 많이 수집하는 겁니다.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건 기본이고, 행운까지 따라줘야만 가능한 일이죠.
크립토키티의 게임 방식도 유사합니다. 다만 희귀 포켓몬을 다른 유저에게 팔 수 없는 포켓몬고와 달리 크립토키티에선 유저들끼리 고양이 캐릭터를 가상화폐로 자유롭게 사고 팔 수 있습니다. 게임 속 고양이 캐릭터로 돈을 벌 수 있는 ‘마법’을 부린 거죠.
캣슬 운영자들은 투자자들에게 “캣슬 NFT를 활용한 게임을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실제 크립토키티와 같은 성공 사례가 있었으니, 투자자들에게 꽤 그럴싸한 계획처럼 들렸을 겁니다. 게다가 투자자들에게 믿음을 주고자 운영자들은 학력과 경력도 부풀렸습니다. 자전 거래로 시세를 띄우며 ‘대박 프로젝트’인 것처럼 투자자들을 속였습니다.
그러나 약속한 첫 배당일이 다가오자 이들은 메신저 단체 대화방에 “메인 계정이 해킹당했다”는 말을 남기고 돌연 잠적했습니다. 물론 거짓말이었죠. 가상자산 개발자가 프로젝트를 중단하고 투자금을 가로채는 일명 ‘러그풀(rug pull)’ 사기를 벌인 겁니다. 투자자 9명이 입은 피해액만 약 2억1000만 원에 이릅니다. 서울경찰청이 지난달 주범 A 씨를 구속하고 범행을 도운 4명을 입건한 이유입니다.
● 실제 수익 창출 가능한지 따져야
이번 NFT 사기범죄가 가능했던 이면엔 수년 전부터 이어진 가상화폐 광풍이 있다는 게 경찰 관계자들의 말입니다. 가상화폐 열풍 초기에 투자로 큰 돈을 번 사람들의 성공담은 투자 기회를 놓친 사람들의 마음에 ‘제2의 가상화폐 열풍’에 대한 열망을 싹틔웠습니다. 열망에 사로잡힌 투자자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가상자산에 투자하면서 막연한 행운을 기대하며 장밋빛 미래부터 그립니다. 그 달콤함에 빠져들면 “섣부른 가상자산 투자는 위험하다”는 전문가들의 경고는 잊게 되는 법이죠.
A 씨와 공범들은 이런 심리를 꿰뚫고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이들은 화려한 허위 경력과 전문 용어들을 앞세워 자신들의 범행 계획을 장밋빛 투자로 포장했습니다.
전문가들은 가상자산에 투자할 때 반드시 이것만큼은 따져보라고 당부합니다. NFT 자산이라고 해서 실물 자산엔 없는 신묘한 수익 창출 방법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요. 실물 미술 작품이 높은 가치를 가지려면 많은 투자자들로부터 인정받을 만한 고유 가치를 증명해야 하듯, NFT 자산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미술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는 데에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듯 NFT 자산의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을 키우는 방법은 NFT 자산이 가진 속성을 공부하고, 어떤 자산이 NFT 생태계에서 높은 가치를 갖는지 꼼꼼히 살피는 수밖에 없습니다.
‘투자하면 정기적으로 배당을 주겠다’는 말만 믿고 투자해선 안 됩니다. 실제 수익 창출이 가능한지 직접 꼼꼼히 따져봐야 합니다. 프로젝트의 운영진들이 믿을만한지도 스스로 확인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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