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행자에 진심인 사회로]〈4〉학교앞 불법 주정차 여전
인도위 차량 피해 차도로 걷기도
“단속-과태료 부과 제대로 안 이뤄져… 새 법규 시행됐지만 현장은 그대로”
4일 거제 초등생 사고 “예견된 사고”… 후문엔 단속카메라 없어 무법지대
3일 오전 8시 반 서울 송파구의 한 초등학교 앞.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에 승용차 한 대가 정차했다. 운전석에서 내린 여성은 딸을 교문 안까지 데려다준 후 차량으로 돌아왔다. 이 여성은 “학교 앞에 차를 세우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면서도 “아이의 안전이 걱정돼 교문 바로 앞에 내려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동아일보 취재팀이 집계한 결과 학생들이 등교하는 오전 8시 반부터 20분간 교문 앞에 정차한 차량은 15대에 달했다. 일부 운전자는 아예 인도까지 침범해 차를 댔고, 아이들이 차를 피해 차도로 걸어가야 하는 상황도 연출됐다. 매일 걸어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준다는 김주영 씨(38)는 “차를 이용하면 훨씬 편하지만 너도나도 차를 가져오기 시작하면 아이들의 안전이 위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 걸어 다닌다”며 “아침마다 학교 앞에 몰리는 차량들을 보면 걱정부터 든다”고 했다.
○ 스쿨존 주정차 금지 6개월, 현장은 “그대로”
지난해 10월 21일 도로교통법 시행령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스쿨존의 모든 도로에서 차량 주정차가 금지됐다. 이를 위반해 적발되면 승용차 12만 원, 승합차 13만 원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스쿨존에서 차량을 세우면 어린이 보행자가 차량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등 교통사고 위험이 높아진다는 지적에 따른 조치다.
새 법규가 시행된 지 6개월을 훌쩍 넘었지만 현장에선 버젓이 불법 주정차가 이어지고 있었다. 4일 서울 서대문구의 한 초등학교 앞에서도 학생들이 몰리는 아침 30분 동안 11대의 차량이 스쿨존에 버젓이 정차하고 아이들을 내려줬다. 3일 송파구에서 교통지도를 했던 장주영 서울녹색어머니연합회 수석부회장은 “구청 단속이 자주 이뤄지지 않는 데다 단속 권한이 없는 교사나 보안관 등이 주정차를 못 하게 하면 항의하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6개월 동안 현장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며 한숨을 쉬었다.
서울시에 따르면 개정안 시행 이후 지난달까지 모두 8만4238건의 스쿨존 불법 주정차 차량이 단속됐다. 올해도 매달 1만1196∼1만4238건씩 단속되고 있다. 1분기(1∼3월) 기준으로 단속 건수는 올해(2만876건)가 지난해(2만2020건)보다 1144건(5.2%) 줄어든 수준이라 현장에선 “시행령 개정 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는 목소리가 많다. 천경숙 녹색어머니중앙회장은 “단속이나 과태료 부과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어 불법 주정차가 반복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 “스쿨존 주정차 어린이에게 심각한 위협”
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한국의 인구 10만 명당 보행 어린이 교통사고 사망자는 0.34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0.23명)보다 50% 가까이 높다. 특히 어린이 보행 사고 가운데 초등학교 저학년(1∼3학년) 사상자 발생 비율이 62%에 달한다. 하교 시간대인 오후 4∼6시와 외부 활동이 늘어나는 5월 교통사고가 가장 많다. 경찰청 집계 결과 스쿨존 사고 역시 2018년 418건, 2019년 532건, 2020년 464건 등으로 크게 줄지 않고 있다.
4일 발생한 경남 거제 초등학생 스쿨존 사고 역시 예견된 사고였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고를 당한 A 군(7)이 다닌 초등학교는 4면이 도로로 둘러싸여 있지만, 정문 앞 왕복 4차로에만 단속카메라가 설치돼 있었다. 학부모와 학원 차량들은 단속을 피해 주로 학교 후문 쪽으로 다녔고, 이 구간에서 A 군은 사고를 당했다.
특히 후문 쪽 도로는 왕복 2차로로 좁고 급경사인 데다 곡선 구간도 있어서 운전자 시야의 ‘사각지대’를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왔다고 한다. 거제시와 시의회는 무인 단속카메라 추가 설치, 도로 개선 등을 뒤늦게 추진하기로 했다.
전문가들은 “스쿨존 안전의 첫 단계는 불법 주정차 금지”라고 입을 모았다. 박무혁 도로교통공단 선임연구원은 “초등학생들은 차체보다 키가 작아 운전자 시야에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이런 상황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불법 주정차한 차량 운전자에게 손해배상 책임이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이윤호 안전생활실천시민연합 본부장은 “일부 학교에서 운영되고 있는 ‘안심 승하차존’을 모든 학교에 설치하되 보행자 출입 공간과 철저히 분리되도록 정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美 뉴욕주, 스쿨존서 제한속도 넘을 경우 벌금-징역형
日, 오전7시반~8시반 차량통행 금지 인근 회사서 차 빼는 것도 금지돼 뉴욕시, 단속카메라 2000개 설치 차량들 대부분 ‘거북이 속도’ 주행
어린이 교통안전 선진국으로 꼽히는 일본과 미국은 스쿨존(어린이보호구역) 내 교통법규와 이를 위반했을 때 가해지는 처벌이 매우 강력하다.
일본의 스쿨존은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반경 500m 내 통학로에 설정된다. 2일 오전 7시 반 일본 도쿄 시나가와구의 한 초등학교 앞. 학교 앞 일방통행 도로에 ‘차량통행 금지’가 적힌 바리케이드가 설치됐다. 학생들의 등교가 끝나는 오전 8시 반까지 이 도로에선 허가받은 차량을 제외한 모든 차량의 통행이 금지되는 것. 이 도로에 정문을 접하는 조난(城南)소학교의 한 교사는 “주민들이 다소 불편할 수 있지만 아이들의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철저하게 시행 중”이라고 말했다.
도쿄 내 상당수 기초자치단체는 이처럼 오전 7시 반부터 1시간 동안 스쿨존 내 차량 통행을 제한하고 있다. 이 시간에는 스쿨존에 접한 주택, 회사 등에서 차를 빼거나 주·정차를 하는 것도 금지된다. 부득이하게 차량 출입이 필요하면 관할 경찰서에 자동차등록증, 통행 이유를 소명하는 자료 등을 제출한 뒤 통행 허가증을 받아야 한다. 이조차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되도록 통행을 삼가 달라’는 조건이 따라붙는다.
학교와 맞닿아 있지 않더라도 반경 수백 m 지역은 최고 속도를 시속 30km 이내로 제한하는 ‘존(zone) 30’으로 묶는다. 이에 더해 도로 폭을 줄이거나 도로를 일부러 굴곡지게 해 감속을 유도하는 ‘존30 플러스’도 최근 도입됐다. 일본 경시청은 “보행자 충돌 차량의 속도가 시속 30km를 넘으면 보행자 치사율이 급격히 높아지는 것을 감안한 것”이라고 했다.
미국 뉴욕주는 학교 반경 0.25마일(약 400m)이 스쿨존이다. 주중 오전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차량의 속도는 시속 20마일(약 32km)을 넘기면 안 된다. 제한속도를 시속 10마일(약 16km) 이내로 초과하면 최대 300달러(약 38만 원), 시속 30마일(약 48km) 이내로 초과하면 최대 600달러(약 76만 원), 초과 속도가 시속 30마일을 넘으면 최대 1200달러(약 152만 원)의 벌금을 납부해야 한다. 스쿨존 내 주행 속도가 제한속도보다 시속 11마일(약 18km) 이상 넘을 경우 운전자는 벌금 외에 15일 이상의 징역형도 받을 수도 있다.
뉴욕시는 750개 스쿨존에 약 2000대의 단속 카메라를 설치했다. 올해 안에 200여 대를 추가하고, 카메라 작동 시간도 대폭 늘릴 계획이다. 지난해 스쿨존에서 벌어진 치명적인 교통사고의 3분의 1이 단속 카메라가 꺼진 시간 동안 발생했다는 걸 감안한 조치다. 이 때문에 뉴욕의 스쿨존에선 차량들이 대부분 ‘거북이 속도’로 지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뉴욕주 교통 규칙에 따르면 스쿨버스가 적색등을 깜빡이며 멈춰 있을 경우 양방향에서 진행하던 다른 차량들은 스쿨버스에서 6m 이상 떨어진 곳에 정지해야 한다. 이후 학생들이 모두 승·하차를 하고 적색 점멸등이 꺼진 다음에야 다시 진행할 수 있다.
특별취재팀
▽ 팀장 강승현 사회부 기자 byhuman@donga.com ▽ 김재형(산업1부) 정순구(산업2부) 신지환(경제부) 김수현(국제부) 유채연(사회부) 기자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