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연구집단이 생겨야 지역이 살고 대학이 산다.” 이용훈 울산과학기술원(UNIST) 총장이 제시하는 대학을 활용한 지역균형발전 해법이다. UNIST는 개교 13년을 맞은 신생 대학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연구중심대학 가운데 가장 빠른 성장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UNIST는 2022년 영국의 글로벌 대학평가기관 THE(Times Higher Education)의 세계대학평가에서 세계 178위, 국내 5위에 올랐다. 같은 해 THE 신흥대학평가(개교 50년 이하 대학 평가)에서는 세계 11위, 국내 1위였고, 상위 1% 연구자라는 별칭으로 알려진 HCR(Highily Cited Researcher)도 8명을 보유해 서울대 다음으로 많다. 이 총장은 18일 서울 중구 한 음식점에서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UNIST 성장 배경과 연구중심대학 활용 방안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그는 인터뷰에서 해외 선진국의 연구중심대학 육성 정책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소개했다. 》
―UNIST가 빠르게 자리를 잡고 성장한 요인은 무엇입니까.
“엄격한 영년(永年)직 제도(65세까지 정년 보장)와 ‘블록 펀딩(block funding)’ 덕분입니다. 영년제의 목표는 교수들의 세계적인 경쟁력 확보에 있습니다. 연구자가 세계적 수준에 오르면 세계적인 학자들과 네트워킹을 맺고 연구 펀딩도 도움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학교 평판도 올라가고 학내 정치가 발붙일 여지가 없는 등 긍정적인 효과가 많습니다. 임용 8년 후부터 신청할 수 있는데 ‘독하게’ 심사합니다. 세계적 저널에 최소 2∼4편의 논문을 실어야 하고, UNIST 이상 대학이나 기관에 근무하는 해당 분야 세계적 석학 4명, 국내 석학 2명, 학내 석학 2명으로부터 받은 외부평가서를 심사에 반영합니다. 지원자의 60%가 통과하는데 간혹 통과하지 못해 학교를 떠나는 교수님도 있습니다. 블록 펀딩은 꼬리가 붙지 않는 돈입니다. ‘굿 머니’ 성격이 있어 학교 재량껏 쓸 수 있는데 주로 연구기자재를 구입하고 능력 있는 연구자를 모셔오거나 떠나려는 교수님들을 붙잡을 때 씁니다. 울산시와 울주군은 UNIST 설립 초기부터 매년 150억 원씩 UNIST에 블록 펀딩을 10년간 지원했고, 이는 대학 성장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UNIST를 비롯한 연구중심대학의 도약을 위해 필요한 중앙정부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정부의 과학기술 지원을 연구개발 프로젝트에서 우수 연구자 유치도 가능하도록 바꿔 우수 연구중심대학에 지원하는 것입니다. 독일은 2006년부터 ‘엑설런트 이니셔티브’, 일명 엘리트 대학 육성 프로그램을 시작해 10여 개의 대학에 매년 200억 원 규모의 블록 펀딩을 지원하고, 7년마다 심사를 통해 새롭게 선정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대학이 개별 연구개발 프로젝트에서 가져오는 간접비(overhead)를 50% 이상으로 증액해 재정 강화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연구개발 프로젝트가 많은 연구중심대학은 간접비를 통해 재정을 강화하는데 한국은 간접비 비율이 25% 이하에 불과해 재정 강화에 도움이 안 되고 있습니다. 사업 유치에 대학이 일정 비율을 부담하는 매칭 펀드도 개선해야 합니다. ‘병역특례제도’의 유지도 중요합니다. 이 제도는 연구중심대학 박사과정 국제 경쟁력을 높이는 데 꼭 필요합니다.”
―UNIST의 재정은 어떻습니까.
“총 연구비가 1534억 원(2021년 기준), 학교 창업기업 매출이 1730억 원(2022년 3월 기준)에 이르지만 재정은 어렵습니다. 신생 대학이라 교수님들의 호봉이 올라서 인건비가 해마다 50억 원씩 증가하고 있지만 총 인건비의 반 이상인 56.3%를 대학이 해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다른 과학 특성화 대학들은 54∼73%까지 정부에서 필요한 인건비를 지원받고 있습니다.”
―UNIST는 지역 발전에 어떻게 이바지할 계획인가요.
“UNIST가 빨리 세계 100대 대학에 진입해 그 과실을 지역과 나누는 것입니다. UNIST 개교 후 울산시 지자체 연구개발지수가 15위에서 5위로 상승하고, 대학이 있는 울주군 인구 증가가 울산시보다 높아지는 등 여러 기여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UNIST는 울산의 대표 브랜드가 됐습니다. 2020년 인공지능대학원을 개설했고 올 9월 탄소중립대학원을 열 계획입니다. 이는 4차 산업혁명과 탄소중립 측면에서 도전을 받고 있는 부산·울산·경남의 핵심 산업인 자동차, 선박, 정유 등 중후장대 산업의 성공적인 전환에 도움을 줄 것입니다. 특히 탄소중립 분야에서 우리 대학의 IBS(기초과학연구원) 다차원탄소재료연구단을 이끌고 있는 로드니 루오프 교수는 이 분야에서 세계 1위입니다. 탄소중립을 원자 레벨에서 연구를 하고 있는데 UNIST의 연구 역량이 탄소중립 시장에 진출하려는 지역 기업들에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방정부의 지원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UNIST가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울산시의 꾸준한 블록 펀딩 지원과 대학 주변 개발이 필요합니다. 시내에서 고립돼 있는 대학 근처 부지가 의과학 허브와 탄소중립 관련 시설들로 채워진 과학문화타운으로 개발됐으면 합니다. 저희는 대학 주변을 미국 보스턴시의 생명과학 클러스터인 캔들 스퀘어(Kendall Square)처럼 한국을 대표하는 ‘울산판 캔들 스퀘어’로 만들고 싶습니다. 이미 울산대 의대와 의과학자 양성에 필요한 공동 교육과정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UNIST 학생들이 아산병원 수술실에 들어가 공부하고, 울산대 의대 학생들은 UNIST에서 공학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야 의학을 아는 공학자와 공학을 아는 의학자를 키워낼 수 있습니다. UNIST-울산대 의대의 벤치마킹 대상은 하버드대 의대와 매사추세츠공대(MIT)의 협업입니다.” ―윤석열 정부의 주요 대학 정책인 지역대학 활성화는 국가거점국립대의 연구중심대학 전환과 맞물려 있습니다. 연구중심대학의 경영자로서 의견이 있을 것 같습니다.
“지역대학 활성화는 지역 발전에 대학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도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또 급변하는 시대에 연구중심대학이 창출하는 기술과 연구력은 대한민국이 퍼스트 무버로 나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연구중심대학 육성에 있어 수월성에 대한 구체적 목표 제시가 필요합니다. 독일의 엘리트 대학 육성 프로그램은 ‘1개 이상의 세계적 수준의 연구집단’이 지원 자격입니다. 한국도 정부가 연구중심대학 기준을 제시하거나 대학들이 ‘몇 년까지 어떤 분야에서 세계적인 연구집단 몇 개를 만들겠다’라는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UNIST의 세계 대학 랭킹 순위를 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IBS 사업단의 국가거점국립대 유치를 제안합니다. 우리 대학에는 첨단연성물질연구단, 유전체향상성연구단 등 3개의 IBS 사업단이 있고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연구중심대학 육성에 긍정적인 IBS 사업단이 국가거점국립대와 협력하는 방식도 좋아 보입니다. 지역에 세계적인 연구집단 몇 개가 생긴다면 지역 발전에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입니다.”
―UNIST가 진학 위주의 한국 교육을 바로잡는 데도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UNIST는 최근 울산과학고의 STEAM(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Art, Mathematics)교육에 도움을 주고 있는데 이를 부울경 과학고로 확대한 후 일반고까지 지원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아울러 고교 때까지 진학 경쟁에 짓눌린 UNIST 학생들이 ‘공부 기계’가 안 되도록 북카페인 ‘지관서가’, 학생들의 문화행사 지원 버스인 ‘해운대 셔틀’ 등 문화적 소양을 기를 수 있는 환경도 조성하고 있습니다.”
이용훈 총장은… ● 1955년 서울 생. ● 서울대 전기공학 학사, 석사. ●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전기공학 박사. ● UNIST 제4대 총장(2019∼ ), 수소경제위원회 위원, 한국공학한림원 정회원 ● 전 미국 뉴욕 버펄로주립대 조교수 ● KAIST IT리서치센터장, 공대 학장, 교학 부총장 ● 텔레커뮤니케이션 리뷰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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