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 말단 수거책 검거, 제보자는 피싱 조직이었다 [사건 Zoom In]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5월 30일 16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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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금 조직에 전달 않고 빼돌린 수거책
이름-가족관계 신상정보 경찰에 넘겨 ‘보복’
수거책 잡혀도 해외 상부 조직-총책 타격 없어
“경찰이 범죄조직 복수에 악용당하는 셈”… “어쨌거나 범죄자니 잡아야”
경찰 “수거책은 ‘일회용품’, 고액 알바 홍보 경계해야”

한해 피해 건수가 3만 건이 넘고, 피해액이 8000억 원에 육박하는 보이스피싱 범죄. 말단 수거책이 잡혔다는 소식은 심심치 않게 들려오지만 상부 조직은 중국이나 필리핀 등 해외에 있어 근절은커녕 날로 피해 규모가 커지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계좌 이체 대신 ‘수거책’이 피해자를 직접 만나 돈을 가로채는 방식으로 수법을 바꿨습니다. 지난해의 경우 피해자의 3분의 2가 이 방식에 당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방식은 보이스피싱 조직으로서도 ‘리스크’가 있습니다. 계좌 이체는 송금 받으면 끝인데 반해, 수거하는 사람이 돈을 제대로 전달할지는 모르는 일이니까요. 실제 수거책이 피싱 피해금을 조직에 전하지 않고, 중간에 들고 도망치는 일도 종종 벌어집니다.

한데 최근 해외의 피싱 조직이 돈을 중간에서 빼돌린 수거책의 신원을 경찰에 알려 보복하는 일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배신’한 조직원이 경찰에 체포되도록 만들어 복수를 하는 것입니다. 말단 수거책이 붙잡혀 봐야 해외의 상부 조직에는 아무런 타격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태연히 이 같은 ‘보복 신고’를 합니다. 경찰로서는 제보의 출처가 어디건 범죄자인 수거책을 체포하는 게 당연합니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경찰이 보이스피싱 조직의 복수 수단으로 악용당하는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 씁쓸한 실태를 들여다보겠습니다.
●수거책 ‘배신’하자 피싱 조직이 신상 폭로
© News1 DB
© News1 DB


지난해 11월 서울 종로경찰서에 보이스피싱에 300만 원을 사기 당했다는 피해자가 찾아왔습니다. 전화를 받았더니 수화기 너머 검사라고 밝힌 사람이 “당신의 통장 명의가 도용됐다”고 했다는 겁니다. 다급한 마음에 경황없이 서울 중구 모처에서 돈을 건네라는 말을 따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피해자의 경우 통상의 보이스피싱 피해자와 좀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돈을 건넨 뒤 문자 메시지가 오더니 “이 사람이 당신의 돈을 (수거해) 가로챘다”면서 20대 남성 김모 씨의 신분증과 가족관계 증명서가 날아왔다는 겁니다. 피해자는 그제야 사기에 당했음을 깨닫고 부랴부랴 경찰에 신고를 했습니다.

경찰이 김 씨를 붙잡아 조사한 결과 피싱 조직의 수거책 김 씨가 피해자의 돈 300만 원을 조직에 전하지 않고 빼돌린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김 씨가 이같이 빼돌린 피해 금액은 모두 1300만 원 이었습니다.

경찰 관계자는 “문자로 수거책의 신상을 보내온 사람은 보이스피싱 범죄조직의 간부로 추정되며, 문자 발송에는 ‘대포폰’이 사용됐다”면서 “발송자의 신원이나 소재는 파악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경찰은 피해금액은 거의 회수하지 못했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김 씨는 원래 아르바이트 구직 사이트를 통해 보이스피싱 조직에 유인당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피싱 조직은 “땅 사진을 찍어서 의뢰인에게 보내고, 돈을 받아오는 일을 하면 일부를 떼주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일을 시작하려면 본인의 신분증과 가족관계증명서가 필요하다고 해 보내기도 했습니다. 김 씨는 막상 피해자들로부터 돈을 받고 보니 피싱 범죄의 수거책으로 이용당하고 있다는 의심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사기 피해금을 빼돌린 겁니다. 조직은 김 씨가 수거한 돈을 건네오지 않자 김 씨의 신원을 피해자에게 알려 경찰에 검거되도록 만든 것이고요.
●“잡기는 잡는데… 웃지 못할 상황”
지난해 6월 제주도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수거책이 피해자로부터 가로챈 현금 2000만 원을 빼돌리자 피싱 조직이 피해자에게 수거책의 신분증 사진을 보내 경찰에 붙잡히도록 만든 겁니다.

피해자는 보이스피싱에 속아 수거책에게 돈을 건넨 뒤 매우 당황했다고 합니다. 한데 “당신의 돈을 가로챈 사람”이라며 수거책의 신상이 담긴 문자 메시지가 모르는 전화번호로 왔다고 합니다. 수거책은 32세 여성이었습니다. 경찰은 이를 바탕으로 수거책이 인천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붙잡았습니다. 다행히 피해금액 중 1850만 원이 회수됐습니다.

이 사건을 담당한 경찰은 “수거책이라도 인적사항을 파악하려면 엄청난 양의 폐쇄회로(CC)TV를 돌려 봐야 하는데, 조직의 폭로로 신상이 한 번에 확인되면 검거에는 도움이 된다”면서도 “(피싱 조직의 제보로 검거하게 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이처럼 중간에서 돈을 빼돌린 수거책의 신상을 보이스피싱 조직이 폭로하는 일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조직이 수거책의 이름과 연락처, 주민등록번호 등을 피해자에게 알려 경찰에 신고하게 하는 경우도 있고, 제3자를 시켜 경찰에 알리기 일도 있다고 합니다.

경찰 관계자는 “지난해 말에도 한국 수거책 조직이 중간에서 돈을 빼돌리자 중국에 있는 총책이 간접적으로 경찰에 신고해 검거한 일이 있었다”며 “이런 식의 사건이 최근 몇 년간 계속 벌어지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경찰 “수거책은 일회용품, ‘고액 알바’ 경계해야”

‘조직의 제보’로 수거책을 검거하는 것에 관해서는 경찰 내부에서도 의견이 엇갈립니다. 잡기는 잡아야 하지만 말단 수거책을 아무리 잡아봐야 상부 조직을 붙잡기도 어려운 탓입니다.

한 서울 지역 경찰은 “수거책이 총책을 알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수거책을 통해 한 단계 위의 조직원에게 접근하는 기회는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반면 다른 경찰 관계자는 “수거책은 조직 입장에서도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같은 존재”라며 “점조직 형태를 띠는 보이스피싱 조직 특성상 말단을 통해 윗선을 잡기는 쉽지 않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경찰 관계자는 “조직의 제보건 뭐건 경찰은 수거책도 당연히 잡아야 한다”면서 “궁극적으로 보이스피싱 조직의 총책을 잡기 위해 수사를 벌이고 있지만 총책은 거의가 해외에 있어 검거에 한계가 있는 게 사실”이라고 했습니다.

보이스피싱을 근절하지 못하는 것은 경찰로서도 참으로 갑갑한 일입니다. 30일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올해 1, 2월 감소하던 보이스피싱 신고 건수와 피해금액이 3월부터 다시 증가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피해액은 606억 원으로, 지난해 8월 이후 최대를 기록했습니다.

경찰 관계자는 “보이스피싱 조직은 ‘고액 알바’로 포장해서 수거책을 끌어들이는 경우가 많다”며 “서울경찰청에 접수되는 보이스피싱 사건만 한 달에 수백 건이니 당하거나 자신도 모르게 가담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당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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