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대구 변호사사무실 방화 사건이 일어난 수성구 범어동 우정법원빌딩 내부는 검게 타지 않은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여서 화재 당시의 참혹함을 짐작케 했다.
이날 취재진에 공개된 빌딩 내부는 1층까지 바닥이 온통 재로 덮여 검게 변해있었다. 화재가 처음 발생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창문이 깨지면서 생긴 유리파편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2층에 들어서니 매캐한 냄새가 심해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였다. 복도 바닥과 벽면은 깡그리 불에 탔고, 천장 자재도 뜯겼거나 휘어진 채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불길이 얼마나 거셌는지 가늠케 했다.
● 매캐한 냄새 진동
복도 끝 방화 현장인 203호와 맞붙은 사무실 역시 불에 타지 않은 온전한 사무집기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훼손돼 있었다. 경찰은 현장 감식을 위해 203호 내부는 공개하지 않았다.
이날 현장 감식에 참여한 관계자는 “203호는 특히 출입문 근처가 불에 심하게 탔다”라며 “방화범이 출입문 근처에 불을 지른 것이 확실해 보인다”고 했다.
경찰은 203호 내 사무장 등 직원들이 주로 이용하는 좌측 사무공간에서 피해자 시신 2구, 탕비실에서 1구, 주출입구 오른쪽 창문 근처에서 2구를 발견했다.
김모 변호사(57)의 시신은 변호사들이 주로 이용했다는 우측 사무공간에서 확인됐다. 방화 용의자 천모 씨(53)의 시신 역시 이 사무공간 입구에서 발견됐다.
203호 주출입구 앞에서는 등산용 칼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번 사건으로 변을 당한 김 변호사와 박모 사무장(57)의 친구라고 밝힌 한 남성은 10일 기자와 만나 “사체 검안에 배석했는데, 두 사람의 배와 옆구리가 심하게 훼손된 채였다”고 했다. 경찰은 천씨가 203호에 들어가 피해자들에게 20초가량 흉기를 휘두르면서 위협을 하는 등 소란을 피우다가 불을 질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경찰은 이날 현장에서 천 씨가 인화성 물질을 담은 것으로 보이는 유리 용기 3점과 수건 등 4점을 추가로 수거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잔류성분 감정을 의뢰했다.
● 방화 4분전 인화 물질 차에 실어
방화 용의자 천모 씨(53)는 방화에 사용할 인화물질 등을 미리 치밀하게 준비한 것으로 드러났다.
천 씨는 사건 현장에서 직선거리로 700m 가량 떨어진 범어동의 한 아파트에 살았다. 이 아파트 폐쇄회로(CC)TV에는 천 씨가 범행 당일인 9일 오전 10시 48분경 흰 천으로 가린 원통형 물체를 들고 나와 차량 조수석에 싣는 모습이 포착됐다. 약 4분 뒤인 10시 52분경 천 씨는 불을 지른 우정법원빌딩에 들어섰다.
천 씨는 대형건설사인 A사에 10여 년간 다니다가 2010년경 퇴직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2015년에도 A사 대구경북지사장이라며 지역 매체와 부동산 관련 인터뷰를 한 흔적이 있다. A사 관계자는 “우리 회사에는 해당 직책이 없으며, 천 씨가 퇴직 뒤 거짓으로 대구경북지사장이라는 명함을 만들어 갖고 다니며 재건축사업 분양 홍보를 하는 등 주변을 속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천 씨는 약 4년 전 52.9㎡(약 16평)규모의 이 아파트에 월세를 얻어 전입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구지법까지 차로 약 5분 거리여서 자신이 진행하고 있던 약정금 반환 소송에 대응하기 편해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근 부동산에 따르면 1982년 준공된 이 아파트는 임차료가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20만원 정도다.
천 씨의 이웃 주민은 “자주 교류하지는 않았지만 천 씨가 일주일에 3,4일 정도 집에 들어왔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부인 등 천 씨의 가족은 타 도시에 사는 것으로 전해졌다.
천 씨가 앙심을 품었던 배모 변호사(72)는 10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천 씨가 한차례 사무장에게 전화를 걸어 불만을 표시하고, 법정에서도 터무니없는 비판을 하는 모습을 보여 불만을 갖고 있던 사실은 알고 있었다”라며 “그러나 나와는 법정에서도 직접 대화를 한 일이 없다”고 했다. 배 변호사는 천 씨가 제기한 약정금 반환 소송에서 시행사 대표 A 씨의 법률 대리인을 맡았으며, 사건 당일 출장을 나가 화를 면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