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인생 2막]이웅범 前 LG이노텍 사장
이노텍-화학 등 거친 37년 LG맨… 상사-후배와 신뢰관계가 버팀목
소통으로 신화 일군 ‘야전사령관’… 은퇴후엔 저서 내고 노하우 전수
기업 강점 100% 발휘하게 돕고… 유튜브로 젊은 직장인 대상 강의도
한 회사 울타리 안에서 37년간 일했다. 26세 청년은 63세 초로의 나이가 됐다. 이쯤 되면 그의 인생 전체가 회사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회사란 때가 되면 반드시 떠나야 하는 곳. 퇴직으로부터 2년이 더 지난 지금, 그의 인생 2막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을까.
17일 서울 금천구 본인의 사무실에서 만난 이웅범 전 LG이노텍 사장(65)은 “떠났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직 그때 사람들을 자주 만납니다. 사실 떠날 수 없죠. 제 인생 대부분이 거기 있었는데요. 여전히 프로야구에서 (LG 트윈스가) 지면 온종일 속상하고….”
그에게 회사는 고향 같은 곳이 돼 있다.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는 자세로”
그는 평사원에서 최고경영자(CEO)까지 올라간 입지전적 인물이다. 1983년 반도상사(현 LX인터내셔널)에 입사해 LG전자, LG이노텍, LG화학 등을 거치며 17년을 직원, 18년은 임원으로 지냈다. LG이노텍 사장과 LG화학 전지사업본부장(사장)을 맡아 성공 신화를 썼다. 최종 이력은 LG가 설립한 연암공대의 총장이었다. ―처음부터 ‘여기 내 인생 다 걸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시죠.
“당연하죠. 중간중간 그만둘 뻔한 일이 많았습니다. 함께하는 사람들과 잘 맞았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고, 특히 윗사람 운이 좋았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봐주신 분들이 있었어요. 그건 결국 신뢰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고 봅니다.”
조직은 팔로어십과 리더십의 상호작용을 통해 굴러간다. 매출이 급증하는 생산 현장에서는 다소 무리한 계획도 세우곤 했지만 이런 때 “해 봐, 믿으니까”라고 말해주는 상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인이 상사가 됐을 때도 후배들에게 그런 존재가 되려 했다.
그는 직장 생활의 자세로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을 소개한다. 마음이 힘들 때마다 찾던 성지사 스님이 주신 편액에 쓰인 금언으로,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곳마다 모두 참되다’는 뜻이다.
“이 금언은 늘 저를 더 높은 관점에서 바라보고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채근했습니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지침이 됐지요.”
LG이노텍 카메라모듈 사업은 그가 LG전자 부품소재사업 본부장으로 일하기 시작한 2010년을 기점으로 급성장했다. 애플의 수주액은 첫해 3000억 원, 2011년 9700억 원으로 급증했다. 2011년 말 그는 아예 LG이노텍 대표이사(부사장)로 취임했고 카메라모듈 매출은 2012년 2조 원, 이듬해 2조5000억 원을 돌파했다.
○만년 야전사령관
그에겐 ‘야전사령관’이란 별명이 따라다녔다. 일화 하나. 애플이 2012년 4분기(10~12월) 갑자기 발주 물량을 늘렸다. 위기와 기회가 함께 찾아온 셈.
“현장 인원 1000명을 새로 투입해야 할 물량인데, 신입사원 뽑을 시간도 없었죠. 며칠 궁리 끝에 노조위원장을 만나 전국 공장의 인력을 최대한 끌어모아 구미 생산라인에서 일하도록 협조를 구했습니다.”
전사적 동원체제였다. 공장 인력뿐 아니라 사무기술직, 연구소 직원, 사내 변호사까지 구미 생산라인에 투입됐다.
“모두가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 잘 알았죠. 손은 더뎠지만 품질이 높은 상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점차 생산성도 현장사원 수준으로 올라갔죠. 그 많은 물량을 높은 품질을 유지하며 납기를 맞추자 애플의 신뢰가 커졌고 주문 증가로 이어졌습니다.”
부수 효과도 있었다. 그때의 경험이 자기 업무에 도움이 됐다는 직원이 많았다. 예컨대 연구개발 부서 직원은 직접 만들어본 카메라 모듈을 떠올리면서 연구개발을 할 수 있게 됐고, 관리부서 직원은 원가를 계산하고 절감하는 연구를 더 생생하게 할 수 있었다.
○ “가야 할 때를 아는 아름다운 사람”
연암공대 총장 퇴임이 다가오면서 이런저런 제안들이 들어왔다. 가장 마음이 끌렸던 것은 기술력 있는 벤처기업을 경영해 달라는 요청이었지만 부인의 만류가 컸다.
“‘평생 일했으면 됐지, 이 나이에 돈을 번들 뭐하겠느냐. 자식들 좋은 일이나 시키는 거지. 그냥 쉬엄쉬엄 사람들이나 도와주라’고. 똑소리 나게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사실 새로 기업을 경영한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죠. ‘가야 할 때를 아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로 했습니다.”
그가 택한 것은 코칭. 개인과 기업에 대한 코칭을 통해 오랜 경영자 생활에서 얻은 노하우와 지식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생각했다. 퇴임과 동시에 갤럽사가 인증하는 ‘강점코치’ 자격증을 따고 자신의 이름을 건 ‘유비스(UB‘s) 컨설팅’을 만들었다.
“저는 평생 대기업에서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둘러보니 제가 도와줄 중소기업이 많겠더군요. 실제로 벤처기업 코칭을 해보면 규모는 커졌어도 사람을 어떻게 관리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중소기업들도 조직 구성원의 강점과 약점, 조직문화를 돌아볼 기회는 없죠. 그런 회사들을 위해 내가 봉사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경영 컨설팅 같은 건가요.
“‘코칭’은 뭔가를 가르치는 ‘티칭’과 다릅니다. 상대가 지닌 역량을 끄집어내는 활동이죠. 그중에서도 강점코칭은 ‘잘하는 것을 더 잘하게’ 하는 코칭입니다. 흔히 강점과 단점이 있으면 먼저 단점을 보완할 생각을 하기 쉽지만 단점은 놔두고 강점을 더 키워 전체 역량을 강화하는 겁니다.”
그는 유비스 컨설팅의 유일한 코치다. 회사 코칭은 에너지 소모가 많고 집중력이 필요한 일. 한 달에 딱 한 군데만 해주는 걸 원칙으로 한다. 또 조직문화를 바꾸는 일이다 보니 반드시 사장부터 코칭을 시작하도록 하고 있다. “사장이 안 오고 밑의 직원만 보내면 안 해 준다”고 한다.
최근 ‘LG가 사장을 만드는 법(세이코리아·작은 사진)’이란 저서를 내고 유튜브 방송에 출연하는 것도 자신의 노하우를 나눠주기 위해서다. 대상은 주로 젊은 직장인들. 책에서는 LG가 사원을 임원으로 발탁해 사업가 후보로 집중 관리하며 사장으로 길러내는 방법, 직장의 정점에 오르는 자가 지녀야 할 자질 ‘‘‘등을 상세히 안내했다.
“독자들에게는 제 모습이 모진 풍파를 겪고 항구에 묶인 배의 잔해처럼 보일 수도 있고, 꼰대 세대의 자기 자랑처럼 느껴질 수 있겠다는 걱정도 듭니다. 하지만 직장생활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싶다면 한번 참고해 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서른 넘은 아들, 이제 철이 든 걸까”
요즘 그는 엉뚱하게도 가끔 연예계 뉴스에 등장한다. 아들 이경이 잘나가는 배우가 됐기 때문이다. 아들이 유명해질수록 아버지의 신원과 연봉 등도 ‘엄친아’ ‘금수저’ 등의 표현과 함께 기사화 됐다.
이런 이경이 2년 전쯤 올린 유튜브 영상 “부모님께 ‘갑자기’ 꽃을 드려봤습니다”가 눈에 들어왔다. 어느 날 갑자기 꽃다발 2개를 산 이경이 집에 가서 부모님께 전달하는 장면을 찍은 영상이다. 당시 아버지는 눈물을 흘렸지만 아들의 지적에 ‘우는 거 아니다’라고 잡아뗐다.
이번에 그 이유를 물으니 “아이가 드디어 철이 들었나 하는 생각에”라고 말한다. 실제 유튜브에서 이경은 이런 세리머니를 하는 이유를 “부모님과 더 자주 사진을 찍어놓고 싶어서”라고 밝혔다. 머물 수 없는 세월의 섭리를 30대가 된 아들이 느낀 걸까.
베이비붐 세대인 아버지는 어릴 적 꿈이 스포츠캐스터였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야간고를 나와 공대에 진학했고 졸업과 동시에 취업했다. 회사에서 37년간 ‘수처작주’를 되뇌며 자신을 강제하고 책임을 다하는 삶을 꾸려 왔다. MZ세대 이이경은 자신의 꿈을 좇아 이것저것 해보고 자신의 일을 한껏 즐기는 해맑음을 보여준다. 각자 시대 배경에 따라 버전이 달라졌을 뿐, 열심히 사는 대목은 꼭 닮은 부자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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