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당 4명 “사회생활 중 정신질환 생겼다”며 신체검사 재검 신청
모의 끝에 전문의, 병무청까지 속여 현역 아닌 사회복무 판정 받아
병무청 특사경 사후 조사로 직업 등 드러나 덜미
자동차 딜러로 일하는 청년이 대인기피증을 호소하며 병역 신체검사에서 4급(사회복무요원 근무 대상) 판정을 받았습니다. 자동차 딜러는 찾아온 고객들에게 차를 소개하고 가격과 옵션을 놓고 흥정도 해야 하는 직업인데, 대인기피증을 앓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직업인지 언뜻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병무청 특별사법경찰관(특사경)도 이 점을 수상하게 여겼습니다. 특사경은 병역 판정이 끝난 뒤에도 이들을 끈질기게 추적해 청년들이 허위로 정신질환을 앓는 척하며 검사에 응한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이어 지난달에 이들을 검찰에 송치했습니다. 최근 정신질환을 앓는 척하며 병역을 감면받거나 면탈하려는 이들이 늘면서 병무청 특사경이 분주한 모습입니다.
●‘현역’ 판정 받은 인천 4인조…“갑자기 정신질환이 생겼어요”
지난달 병무청은 정신질환으로 위장해 병역을 감면받으려던 일당 4명을 적발해 검찰에 송치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병무청과 국민의힘 강대식 의원실 등에 따르면 이들 4명은 모두 인천에 살았습니다. 학교 동창이나 친구 사이는 아니었지만 지인 등의 소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20대 초반 처음 신체검사를 받을 당시에는 모두 현역 복무 판정을 받았습니다. 처음부터 아예 병역을 기피할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라고 병무청 관계자들은 전합니다. 하지만 군대에 가기 싫었던 걸까요. 이들 4명은 현역 판정 후 얼마 뒤 병무청에 재검사를 신청합니다. “사회생활을 하던 중 마음의 병을 얻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청년 4명 머리 맞대고…정신과 전문의 6개월간 속였다
정신질환으로 병역을 회피하는 일은 꽤 복잡한 검증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병무청에 따르면 정신질환 검사를 신청하기 위해서는 1개월 이상의 정신병원 입원 기록 혹은 6개월 이상 꾸준히 병원에 다니면서 정신과 진료를 받은 기록이 있어야 합니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6개월 동안 정신질환 전문가 앞에서 ‘환자 연기’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까지 한통속이 아니라면 질환을 인정받기가 어려울 수 있을 것도 같은데요. 병무청 특사경은 조사 과정에서 이들이 다녀갔던 병원 의사들도 의심해 허위로 정신질환을 끊어준 것은 아닌지 조사했습니다. 그러나 조사 결과 이 청년들에게 정신질환 진단을 끊어준 의사들에게선 혐의가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20대 초반 청년 4명이 숙련된 정신과 전문의를 속였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각자 인터넷 등을 통해 알게 된 우울증, 대인기피증 등 정신질환 증상들을 메신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등을 통해 끊임없이 공유하며 공부했다고 합니다. 병원 진료 후에는 각자 진료 경험을 공유하며 의사 앞에서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도 논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보 공유를 도왔던 일당 중 한 명의 여자친구도 현재 병역면탈 방조 혐의로 이들과 함께 검찰에 송치된 상태입니다.
일당은 우여곡절 끝에 병무청 검사도 통과했습니다. 통상 병무청에서는 정신질환을 호소하는 자에 대해 1차로 서면 인성검사, 2차는 심리상담사를 대동한 정밀검사를 실시합니다. 여기서도 정신질환자 판정을 받으면 마지막으로 정신과 전문의의 문진을 받게 됩니다. 이 청년들처럼 재검을 신청한 대상자의 경우 6개월 이상의 병원 진료 기록을 가져오면 마지막 단계인 전문의 문진만 받는다고 합니다. 결국 이들은 2020년 4급 보충역 판정을 받았습니다.
●엉뚱한 직업 ‘자동차 딜러’에 꼬리 잡힌 4인조
병무청은 정신질환으로 병역감면 처분을 받은 자들에 대해 처분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조사를 합니다.
병무청 특사경은 이들의 직업 현황을 조사하던 중 4명 중 2명이 ‘자동차 딜러’로 활동하는 점을 미심쩍게 여겼습니다. 이전에도 휴대폰 판매업자 등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직업군에 종사하는 이들 중에서 정신질환을 앓는 척하며 병역 감면을 시도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지난해 8월 병무청 특사경이 이들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조사 결과 자동차 딜러로 일하는 두 명 외에 다른 한 명은 일반 회사원, 또 다른 한 명은 대학생이었다고 합니다. 수사 과정에서 이들이 신체검사 시 제출한 진단서 내용과 달리 아주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을 파악했습니다. 또 과거 이들의 학생부 기록까지 검토해 이들이 우울증이나 대인기피증 등 성향이 없이 원만하게 친구들과 학창시절을 보냈다는 점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약 10개월간의 조사를 거쳐 올해 6월 이들을 병역면탈 혐의로 검찰에 송치한 것입니다.
●늘어나는 ‘정신질환 위장’ 시도…바빠지는 병무청
정신질환으로 위장해 병역을 기피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습니다. 과거엔 몸무게를 고의로 줄이거나 늘려 병역면탈을 하는 것이 많았다면 최근엔 ‘정신질환 연기’의 비중이 더 높아지고 있습니다.
국민의힘 강대식 의원실에 따르면 2018년 병역면탈 혐의로 적발된 69명 중 정신질환 위장은 7명으로 전체의 10.1%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2021년에는 60명 중 29명으로 48.3%에 달했습니다. 올해는 5월까지 23명 중 14명으로 60.9%에 달하며 절반을 넘어섰습니다.
이는 지난 정부에서 병역판정 신체검사 등 검사규칙을 수정한 영향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국방부는 2020년경 체중 관련 신체검사 기준을 강화했는데, 이에 따라 키 175cm 기준으로 ‘저체중 52kg’ ‘과체중 102kg’이었던 4급 판정 기준이 각각 ‘저체중 48kg’ ‘과체중 108kg’으로 강화됐습니다. 이에 ‘풍선효과’처럼 정신질환으로 병역을 감면받으려는 이들이 늘어났다.
병무청 특사경은 부담이 커지고 있습니다. 병무청 관계자는 “구체적으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정신질환으로 면제판정을 받은 사람이 이후 어떻게 지내는지 등을 확인하고 있다”라고 밝혔습니다. 강대식 의원은 “정신질환 위장 병역면탈자들이 매년 증가하는 상황에서 사전 대책과 병역 판정 후 엄정한 사후관리를 통해 공정병역문화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전문의들도 혹여나 입대를 앞둔 이가 ‘환자 연기’를 하는 것은 아닌지 더욱 꼼꼼히 살펴야 하게 됐습니다. 권준수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입대를 앞두고 치료를 받기 시작했거나, 치료를 얼마 받지 않았는데 진단서를 원하는 경우 문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치료기간이 1년 미만으로 짧으면 진단서 자체를 써주기 어렵다”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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