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거점국립대의 연구중심대학 전환은지역대학 육성의 유력한 방안으로 거론되고있다. 반도체 산업 인력 양성에도 지역대학의 역량을 활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동아일보는 8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김동원 전북대 총장, 이용훈 UNIST(울산과기원) 총장, 정성택 전남대 총장이 참석한 가운데 ‘지역균형개발과 연구중심대학 역할’ 방담을 열고 체계적인 지역대학 육성 방안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 윤석열 대통령이 반도체 인재 육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정부에서 수도권과 지역에 반도체학과 신설 계획 등을 밝혔는데, 바람직한 반도체 인재 공급 방안은 무엇이라고 보나. 이용훈 총장=반도체는 크게 반도체 소재·소자와 시스템반도체로 나뉜다. 소재·소자 분야는 물리학을 기반으로 하며, 먼지가 통제된 클린룸 같은 고가의 실험설비가 필요하다. 클린룸은 1년 내내 가동해야 하고, 10년 주기로 교체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든다. 또 시스템반도체는 수학이 기반이고, 고성능 컴퓨터와 칩 설계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칩 제작을 위한 파운드리(foundry) 서비스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 더해 실제 인공지능이나 이동통신 분야에서 새로운 시스템 칩을 설계하려면 교수진은 기본이고, 대학에서 체계적 교과과정을 설계할 수 있어야 반도체학과 신설이 가능하다.
그런데 정작 학교에 시설이 다 있어도 학사 과정에서는 사고 위험이 있어서 실험도 한번 제대로 못 해보고 졸업한다. 독가스 등 안전사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이론적 강의만 듣다가 졸업한 학생들이 반도체 관련 대기업에 취업해도 많은 부족함이 있다. 기업에서도 기초가 잘되어 있는 학생들을 채용해 숙련된 인력으로 교육시킬 필요가 있는데 대학 탓을 많이 한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각 대학에 모든 설비나 인프라를 구축하면서 반도체학과를 신설하기는 어렵다. 정부에서 반도체학과 신설 계획을 구체적으로 먼저 정하고, 지역별로 거점을 정해서 학과를 신설해 학교별로 협력할 부분을 찾는 게 맞다. UNIST 같은 연구중심대학을 비롯한 몇몇 거점에 반도체학과를 신설하면 기존 장비를 중심으로 인력 양성을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김동원 총장=전북대에는 반도체 분야 학부과정에 자연과학대학 반도체기술학과를 비롯해 9개 모집단위에 약 2750명의 학생이 공부하고 있다. 석·박사과정 11개 전공 과정에서도 약 295여 명이 재학 중이다. 정부에서 2003년 서울대, 경북대, 전북대 3개 대학에 설치한 반도체공정연구센터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역시 시설 유지와 보수가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든다. 이미 구축된 시설이 있는 대학끼리 거점별로 블록을 형성해서 같이 운영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대학별로 각자 알아서 해서는 경쟁력이 부족하다. 지방대에서 반도체 우수 인력이 나올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다. 고졸이나 전문대 졸업 인력 등 다양한 층위의 인재가 필요한 것 아니겠나. 우수 인재들이 수도권에서만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정성택 총장=반도체 관련 인재 공급을 위해서는 산업 현장의 목소리와 인력 양성 실태를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우선 대학에서는 대학원 과정에서 석·박사 양성을 위한 융합전공 등 신설, 교수자원 확보, 재정지원사업 재정비를 해야 한다. 학부 단위에서는 기업맞춤형으로 ‘계약학과’를 신설·확장해 기업이 원하는 수요와 역량 수준을 맞춰 나가는 것도 중요하다.
사실 ‘반도체 인재’라는 것이 어떤 수준의 인재를 말하는 것인지 애매한 측면도 있다. 특성화고에서부터 평생학습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량층에 맞춘 인력 양성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 더불어 전기·전자, 물리학 등 다양한 분야가 모여 반도체라는 꽃을 피우는 건데 기초공학 생태계를 유지하는 것도 국가거점국립대의 역할이 아닌가 한다.
― 연구중심대학 전환은 어떻게 진행되어 가고 있나. 어떤 효과를 기대하나.
정 총장=전남대는 111개의 다양한 전공학과를 보유하고 있다. 사실 연구와 교육 중 어떤 것이 중요한지 선택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종합대학으로서 예술, 철학 등 학문의 다양성을 가지고 교육에 충실하되, 어느 특정 분야의 연구에 집중하는 모델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적으로 대형 국책연구사업을 대거 유치해 융·복합 고급 인재를 양성하고 대학 내 연구기반 확보에 집중해 연구중심대학 전환의 기반을 닦고 있다. 대표적으로 △4단계 BK21 △디지털 신기술 인재양성혁신공유대학 △소프트웨어중심대학 △지역지능화 혁신인재양성 △AI융합대학지원 사업 등이다. 전남대는 광주시가 미국 피츠버그시처럼 의공학에 특화된 도시로 발전할 수 있도록 지역의 연구중심대학인 GIST(광주과학기술원), 한국에너지공대와도 협력할 계획을 갖고 있다.
김 총장=전북대의 연구중심대학 전환은 대학이 강점을 갖고 있는 바이오헬스케어를 비롯한 반도체, 에너지 및 수송 기기 분야의 역량 강화에 달려 있다. 최근 전북대는 국토부의 캠퍼스 혁신파크 사업에 선정됐고, 산학융합플라자를 완공하는 단계에 있어 대학이 지역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넓어지고 있다. 전북대의 역량과 새만금 및 전북혁신도시 인프라가 융합되면 미국의 리서치트라이앵글 파크, 실리콘밸리, 보스턴 의약바이오 밸리 등과 비슷한 연구집적 단지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 UNIST 브랜드 사업을 벤치마킹한 지역 미래산업과 연계한 특성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 대학 종합발전계획 및 지역전략산업과 연계한 미래 핵심기술 분야 집중 지원을 통한 ‘JBNU’ 핵심기술 브랜드화도 추진한다.
이 총장=UNIST는 2009년 개교한 이후 연구중심대학으로서 지역 인재 양성에 힘을 쏟았다. 한국과학기술평가원(KISTEP)에서 발표하는 ‘지역과학기술혁신역량평가(R-COSTII)’ 순위를 보면, 2010년 전국 16개 광역시도 중 15위에 머물던 울산이 2020년 5위까지 가파르게 상승했다. 또 2020년까지 총 6395건의 특허를 출원하거나 등록해서 울산의 R-COSTII 평가지수 상승에 기여했다. 같은 기간 기술이전 건수는 130건인데, 이를 금액으로 평가하면 101억8200만 원 수준이다. 이 기간에 창업한 기업은 66개이고, 기업들의 평가 가치는 5380억 원에 이른다. 또 지역의 제조업 기반 기업들이 스마트제조업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인공지능대학원을 유치했고, 올가을부터는 교과목 개발을 통해 탄소중립대학도 만들었다. 의과학자 양성을 위해 울산대 의대와 협력 중인데 이를 바탕으로 울산을 ‘한국판 켄들스퀘어’로 만들어 의약바이오의 메카로 발전시킬 계획도 갖고 있다.
―지자체와 협업도 중요할 것 같다. 6월 지방선거 이후 새롭게 출범한 지방 정부와 어떤 시너지를 낼 수 있나.
김 총장=UNIST나 한전공대를 지원했던 것처럼 지자체에서 지역거점대학에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 새 정부 국정과제를 보면 ‘이제는 지방대학 시대’라는 기조가 있고, 지자체와 지역대학 간 협력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새롭게 출범한 지방정부는 대기업 계열사 유치 등 경제적 발전에 더욱 중점을 두고 있는데, 대학에서 연구를 통한 혁신적 기술을 지역 기업과 공유해 지역발전에 협력할 수 있다. 특히 반도체 인력 양성과 관련 기업 육성·유치를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또 현재 우리 지역에 구성된 지자체와 각 기관 사이의 협의체나 기구가 좀 더 실질적인 역할을 하도록 바꿔 투자협약제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정 총장=지역과 대학은 공동운명체다. 지방과 중앙은 서로 동등한 관계라는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우리 대학의 각종 사업들은 지자체 협력 없이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교육부와 정부가 국가발전과 지역균형발전이라는 대의를 위해 지자체와 국립대에 대한 안정적인 지원에 나서 줄 것을 기대한다. 전남대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반도체 산업 육성에 부응하기 위해 지자체와 AI반도체특화단지 조성에 힘을 모으기로 확약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이른 시일 내에 광주시, 전라남도, 전남대가 상생 MOU를 추진할 예정이다.
이 총장=UNIST는 개교하면서 울산시와 울주군에서 10여 년간 1500억 원 이상을 지원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대학이 빠르게 성장했기에 감사한 마음과 책임감을 갖고 있다. 이제는 지금까지 성장한 것을 기반으로 지역과 함께 그림을 그려나가야 한다.
UNIST는 에너지 및 화공·화학 분야에 주력해 강력한 연구팀들을 확보하고 있다. 이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확보해 지역발전뿐 아니라 국가발전에도 기여하고자 한다. 최근 몇 년간 UNIST는 AI대학원을 중심으로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지역기업의 혁신을 도왔다. 전통적인 제조업 공단에 AI기술을 적용해 스마트 공단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또 반도체소재부품대학원을 출범시키면서 울산의 정밀화학기업들이 반도체 소재기업으로 거듭나도록 지원하고 있다.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을 대학에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정 총장=대학교육은 더 이상 고등교육이 아니라 일반교육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교육의 안정된 재원을 만드는 것은 국가가 해야 할 역할이다. 14년 이상 등록금 동결로 고등교육 생태계는 위기다. 교육세를 전환하고,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을 개정해 고등교육세를 신설하고 안정된 재원을 법령화해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기회를 틈타 교육감이나 대학 총장들을 갈라치기 하는 것은 최악이라고 본다. 정치는 국회에서 해야 한다. 교육자들이 자꾸 교육부나 국회 앞에 가서 피켓 들고 시위하면서 난장판에 뛰어들게 만들면 안 된다.
김 총장=유치원, 초·중등생은 줄어가고 있는데, 세수와 연동된 재정지원 규모는 기계적으로 늘어가고 있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유치원, 초·중등 교육에 대한 교육재정지원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상위이지만, 정작 고등교육에 대한 재정지원은 OECD 평균인 1%에도 미치지 못하는 0.6%에 불과하다. 고등교육부문 예산을 정책적으로 늘린다든지, 지방교육재정부문을 고등교육세로 전환하거나 고등교육세를 신설해야 한다.
이 총장=UNIST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소관 기관으로 지방교육재정교부금과 관련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의견은 없다. 다만 대학 재정운용의 측면에서 볼 때 연구자들의 인건비가 박하게 책정돼 있는 것은 늘 아쉽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외국 대학들처럼 연구비를 지원받았을 때 간접비용 등을 폭 넓게 지원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대학의 재정 자율성을 보장해줘야 한다.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교육부 장관도 새롭게 임명됐고, 국가교육위원회도 출범할 예정이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김 총장=우리의 교육정책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자주 변경됐다. 교육정책 수립과 시행에 있어서도 국가 주도에 의한 하향식으로 진행된 적이 많다. 이제는 정부 성격에 따른 어젠다에 휘둘리지 말고 충실하게 현장에서 교육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국가교육위원회는 장기 계획을 수립하고, 교육부는 단기 계획에 집중하는 것이 맞다. 여야가 합의해서 국가교육위원회 위원을 10년 정도로 임기를 늘려 오랫동안 비전을 가지고 풀어갈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
이 총장=UNIST는 2015년 교육부에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소관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교육부 아래에 있을 때 생겨난 행정적인 각종 위원회가 너무나 많다. 학내에 위원회가 100개 정도 된다. 결과적으로 규제가 너무 많고, 행정력 낭비가 심하다. 아직까지도 간접적으로 교육부 체제를 경험하고 있는 셈인데, 행정적인 면에서도 대학의 자율성이 보장되면 좋겠다.
정 총장=교육부 장관은 사회부총리다. 교육을 중심으로 정부의 여러 사회 통합 기능을 하라는 상징적 의미인데, 그동안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교육부 장관이 사회부총리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 국가와 교육이 공동운명체라는 차원에서 인재를 키우는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최근 반도체 인재 양성 관련 이슈 때문에 교육계가 시끄럽다. 하지만 바이올리니스트 하나 가지고는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구성하지 못하듯, 다양한 학문 생태계를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고, 그 주체는 대학이다. 제발 취업률에 연연하지 않는 교육 정책을 펼쳐줬으면 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