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조금 잠잠했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재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실외 마스크 해제가 허용된 지 불과 두 달 만입니다.
그런데 코로나19 확산 초기, 국제적인 위기 상황에서 코로나19를 빠르게 진단하고 조기에 치료하는 한국의 전염병 대응 방식이 세계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성숙한 시민의식도 한몫을 했겠지만, 무엇보다도 아프면 쉽게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는 우리나라 건강보험제도 덕분이라는 평가도 나옵니다. 세계 여러 국가를 둘러봐도 전 국민이 한국 같은 의료 서비스를 받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이런 국민건강보험제도의 시작을 ‘청십자의료보험조합’으로 보는 의견이 있습니다. 이를 만든 사람이 바로 장기려 박사(1911∼1995·사진)입니다.
장기려는 1932년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뒤 일본 나고야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40년부터 평양의과대 외과 교수와 평양도립병원장을 지냈습니다. 6·25전쟁이 터지면서 1950년 1·4후퇴 때 남쪽으로 피란을 옵니다. 이때 평양에 부인과 다른 자녀를 남겨두고 차남만 데리고 내려오며 이산가족이 되었습니다.
부산에 정착한 그는 전쟁 중에 천막을 치고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진료합니다. 1951년에는 교회 창고에 복음진료소(훗날 고신의료원)를 세워 영양실조와 전염병에 시달리던 피란민들을 진료했습니다. 1958년에는 행려병자를 위한 무료 진료소를 차립니다. 병에 걸려도 병원 문턱조차 밟지 못하던 가난한 사람들은 그의 무료 진료 덕분에 평생 처음 의사를 만날 수 있게 되자 “이제는 살았다”며 울음을 터뜨렸다고 합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1968년에 만든 청십자의료보험조합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한 이 조합은 언론에 크게 보도되면서 의료보험의 필요성을 널리 알립니다. 그 전에도 민간 의료보험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의료보험 전에 성공했던 건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 유일합니다. 이후 전국적인 의료보험 설립운동이 생겼고,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 지금과 같은 의료보험제도를 만드는 데 참고가 되었습니다.
장기려는 생전에 “자기 눈앞에 나타난 불쌍히 여길 것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바로 인술(仁術·의술)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노년에는 집 한 칸 없이 비좁은 옥탑방에 살면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봤습니다. 그래서 ‘바보 의사’, ‘한국의 슈바이처’ 등으로 불렸습니다.
장기려가 죽은 후에는 제자들이 ‘청십자 운동’으로 스승의 정신을 계승했습니다. 그가 제2의 고향으로 삼은 부산에선 ‘장기려길(路)’을 만들어 그를 기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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