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특유 ‘부모·자녀 동일체’ 의식
서로의 성공·실패 공유 ‘운명공동체’
부모, 대리만족 위해 불행 감수
자녀, 부채의식이 성공 동력으로
“신뢰·자율성 전제된 친밀함이 우선”
정신건강, 정서 문제 등 마음(心) 깊은 곳(深)에 있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수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 수상자에 허준이 미국 프리스턴대 교수(39·한국 고등과학원 석학교수)가 5일(현지시간) 호명되자 한국 언론의 관심은 재빨리 허 교수의 부모에게 향했다. 허 교수의 아버지는 허명회 고려대 통계학과 명예교수이고, 어머니는 이인영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명예교수다. 허명회 교수가 수학과 연관된 통계학과 교수였다는 점에서 언론 인터뷰가 집중됐다. 허 교수의 어릴 적 학업성취도와 교육법 등 질문이 이어졌고, 관련 기사에는 “훌륭한 자녀 앞에는 훌륭한 부모가 있었다”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는 댓글이 달렸다.
물론 전 세계 수학계에서 국격을 드높인 주인공이 어떤 환경에서 성장했는지 궁금증이 생기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하지만 스타탄생이라는 특별한 상황이 아니어도 우리는 “느그 아부지 뭐 하시노?”라며 부모의 직업을 궁금해 하곤 한다. 반대로 자녀의 대학 진학이나 취업 성패에 따라 부모들의 기가 살기도, 죽기도 한다. 왜 우리는 부모나 자녀가 ‘뭐 하는 사람’인지가 그토록 중요할까.
● 부모와 자녀는 운명공동체?
심리학, 교육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부모·자녀 동일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부모와 자녀가 서로의 성공과 실패를 공유하는 운명공동체라는 의미다.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한국 문화에서 부모는 자녀를 독립적 존재로 인식하지 않고, 자녀도 표면적으로는 분리돼 있다고 생각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부모와 하나라고 인식한다”며 “부모의 것은 자녀의 것이 되고, 반대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이런 문화는 동양의 관계주의에 기인한다. 개인보다 관계에 중심을 두는 동양은 가정을 운명 공동체로 본다. 또 가정의 중심은 부부보다 부모·자녀 관계에 맞춰져 있다. 반면 서양의 개인주의 문화에서는 부부가 가정의 중심이고, 부모·자녀 관계는 독립적으로 본다.
한국인의 심리적 특징을 연구한 고(故) 최상진 중앙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이를 ‘부자유친성정(父子有親性情)’이라고 명명했다. 삼강오륜의 ‘부자유친(父子有親·부모와 자녀는 친밀함이 있다)’에서 따온 말로, 부모와 자녀가 서로를 짠하게 여기며 끈끈하게 묶인 한국의 특성을 개념화했다. 최 교수는 저서 ‘한국인의 심리학’에서 “한국 자녀들은 부모에게 미안함, 측은함, 고마움을 가지고, 부모들도 자식에게 측은함을 느낀다”며 “서양의 부모들은 자녀를 자랑스럽게 느낄 수 있어도 불쌍하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는다”고 했다.
● 유교문화와 한(恨)이 불 지핀 교육열
최근 종영한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최한수(차승원 분)는 아내와 딸을 미국에 유학 보내고 즉석 밥으로 혼자 끼니를 때우는 40대 기러기 아빠로 나온다. 그는 어릴 적 아버지가 술 마시고 도랑에 빠져 죽은 후 평생 가난과 싸웠다. 어렵게 공부해 결혼했지만, 딸이 골프 유학을 떠나자 또 다시 돈에 허덕인다.
기러기 아빠는 자녀의 성공을 위해 헌신하는 대표 사례다. 드라마에서 최한수는 “할 만큼 했다. 포기하자”며 우는 아내에게 “부모가 돼서 우리가 어떻게 포기를 하느냐”며 한숨을 쉰다.
국내의 다양한 심리학, 교육학 연구에서는 한국의 유별난 교육열이 부모·자녀 동일체 의식과 유교의 입신양명(立身揚名), 한(恨)의 정서가 영향을 준 결과로 봤다. 특히 한은 부당한 차별을 받을 때 쌓이는데, 이때 자녀 교육은 부모의 한을 대신 푸는 수단이 된다. 주변의 ‘엄친아’ ‘엄친딸’ 사례를 들며 자녀의 성취를 압박하는 것도 이런 현상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 “나의 성공은 부모님의 작품”
이때 자녀는 부모에게 애정과 부채의식을 동시에 느낀다. 세계적 축구스타인 손흥민 선수는 지난해 아버지 손웅정 감독이 낸 에세이 추천사에 “나의 축구는 온전히 아버지의 작품”이라며 모든 것을 아버지의 공으로 돌렸다. 아들의 코치 겸 매니저인 손 감독은 손 선수를 세계적 선수로 키워낸 것으로 유명하다. 설기현 경남FC 감독의 어머니는 홀몸으로 포장마차와 과일 노점을 하며 축구뒷바라지를 했다. 설 감독이 유럽 리그 활동 당시 “모든 성공은 어머니가 지금껏 살펴 주신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말해 현지 언론에서도 큰 관심을 받았다.
박영신 인하대 교육학과 교수는 “우리는 자녀가 성공했을 때 개인의 노력과 능력 덕이라고만 보지 않는다. 그 뿌리에 부모의 희생과 헌신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관계주의 문화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초·중·고·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부모에게 ‘고마워서’ ‘보답하기 위해’ 효도한다는 의식이 드러났다. ‘청소년학연구’에 실린 ‘청소년의 효도에 대한 지각과 학업성취’ 연구(1706명 대상)에 따르면 자녀들은 효도의 가장 좋은 방법으로 ‘순종’(22.1%) ‘학업충실’(19.8%)을 꼽았다. 효도하는 이유로는 ‘혈연관계’(37.8%) 다음으로 ‘부모의 희생에 대한 보답’(30.2%)을 꼽았다.
● ‘무한 책임’ 의식 넘어 일가족 살해도
부모·자녀 동일체 의식이 비극적으로 드러날 때도 있다. 지난달 전남 완도 앞바다에서 조유나 양(10) 가족이 숨진 채 발견됐다. 이는 삶을 비관한 부모가 ‘나의 실패=자녀도 실패’라고 여겨 일가족이 목숨을 끊는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의 ‘살인범죄의 실태와 유형별 특성’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2000~2019년 가족을 살해하고 자살(미수 포함)한 426건의 사건 중 41.4%는 부모가 자녀를 살해한 경우였다. 범행 동기는 처지 비관(25.6%), 생활고(24.6%), 금전문제(12.9%) 순이다. 연구를 진행한 홍영오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가해자는 가족 구성원을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동반자살은) 가족 전체를 제거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서영석 연세대 교육학과 교수는 “자녀에 대한 무한책임 의식을 넘어 ‘나도 힘드니 자녀도 힘들게 살 것’이라고 투사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이밖에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세습 관행도 문제로 꼽힌다. 재벌(‘chaebol’)은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한국의 대기업 집단’으로 실려 그 특징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정치인들이 자녀에게 지역구를 물려주거나, 일부 대형교회에서 담임목사 직을 세습해 문제가 되기도 했다.
● “일체감 중요하지만 의존 아닌 의지로”
다만 부모·자녀 간 동일체 의식을 병적이거나 개선되어야 할 것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자녀를 소유물로 여기거나 과도한 교육열, 세습 등 문제도 있지만, 관계주의 문화 안에서 이해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최인재 한국청소년개발원 선임연구위원은 “서양에서는 부모·자녀의 일체감을 서로 독립이 안 된 부정적 상태로 보지만, 우리는 오히려 연합이 제대로 안될 때 정서적 문제가 생긴다는 연구가 있다”고 했다. 이어 “부모와 유대관계가 잘된 아이일수록 성인기에 자아 분화도 잘 한다. 부모가 자녀를 신뢰하는 관계가 기본이 돼야 한다”고 했다. 박영신 교수는 “부모가 자녀를 자신의 일부로 여기고 헌신하는 것을 서양의 개인주의 문화보다 열등한 문화로 치부하는 건 서양 시각”이라며 “자녀가 부모에게 죄송하고, 고맙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취의 커다란 동력이 된다”고 했다.
다만 이때 각자의 자율성이 전제돼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서영석 교수는 “주관이나 자율성이 확보되지 않은 과도한 밀착 관계는 오히려 스스로는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외로움을 유발한다”며 “상대방의 세계를 인정해주며 의존보다 상호 의지하는 관계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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