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관 남편 허승민이 태백 강풍 피해 현장을 수습하다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박현숙은 울지 않았다. 남편이 남기고 간 생후 110일 된 딸 소윤이 슬픈 기억을 갖고 살지 않았으면 했다. 엄마와 씩씩하게 크길 바랐다. 그래서 현숙은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눈물을 참아내고, 눌러냈다. 1년, 그리고 2년.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 잘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허승민 소방관이 강풍 피해를 수습하다 순직한 지 2년이 조금 지났을 때였다. 승민의 아내 박현숙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안녕하세요. 소방청에서 일하는 조인담 주임이라고 합니다. 서울에서 6월 말에 소방관 유가족 모임이 있는데요. 1박 2일입니다. 보호자도 1명 동반할 수 있고요. 안 오시면 양육비 지원이 어려울 수 있으니 꼭 오세요.”
현숙이 답을 하기도 전에 전화가 뚝 끊겼다. 멍하니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봤다.
‘뭐야. 신종 보이스피싱인가?’
소방청으로부터 전화를 받아 본 일이 거의 없었던 탓에 현숙은 인담의 말을 믿지 못했다. 이런 행사를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전화를 끊고 소방청 홈페이지를 뒤져 봤다.
“조인담. 어, 진짜 있네? 흔한 이름은 아닌데….”
044로 시작하는 전화번호도 스마트폰에 찍힌 것과 같았다. 다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죄송한데요, 아직 아기가 어려서요. 서울까지 가는 건 어렵겠어요.”
현숙도 할 말만 하고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 아이는 핑계였다. 다른 유가족을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상처받고 힘든 사람들끼리 모여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뜻밖의 통화
인담이 중앙소방본부(현 소방청) 소방정책과로 발령 난 1년 반 전. 첫 출근을 하자마자 한가득 쌓여 있는 종이를 멍하니 바라봤다. 소방관 복지 민원부터 순직 유가족의 연금 및 보상금 서류와 공무상 재해 인정 소송 상황까지. 파악할 업무가 수두룩했다.
“내가 있는 동안 다른 건 몰라도 순직 사건만은 일어나지 마라.”
소방관이 순직하면 각종 행정 처리에 보상까지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할 일이 산더미인데 새로운 일까지 맡고 싶진 않았다.
어느 날 서류를 살피던 인담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고 김범석 소방교.
익숙한 이름이었다. 남양주에서 일할 때 본부에 투병 중인 소방관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혈관육종암’이라 일컫는 희소암이었는데, 발병 원인을 알 수 없다는 이유로 공무상 재해를 인정받지 못했다. 범석은 몇 달 뒤 암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인담은 본부 동료들과 장례식장을 찾았다. 범석의 아내가 검은 상복을 입은 채 상주 자리에 서 있었다. 범석과 그녀 사이엔 돌을 갓 지난 아들이 있었다. 초점 없는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뭐라 덧붙일 말이 없었다. 눈을 맞출 자신도 없었다. 인담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곤 자리를 떴다.
범석이 떠난 후 유가족들은 공무원연금공단을 상대로 행정 소송을 진행했다. 아들에게 자랑스러운 소방관 아빠로 기억되고 싶다는 범석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가족들은 국가가 그의 죽음을 순직으로 인정하길 바랐다.
1심 선고일 인담은 법원을 찾았다. 범석의 가족이 승소해 순직 관련 새 판례가 생기면 인담도 바빠질 터였다. 새 기준으로 순직과 공상 인정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다. 지원해야 할 순직 소방관 유가족 수도 늘어날 가능성이 컸다.
“혈관육종암은 매우 희소한 질환으로 그 발생 원인이 불명확하다.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
인담에겐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결과였다. 하지만 인담의 머릿속엔 범석의 아이가 맴돌았다. 자신도 세 아들을 키우고 있었다. 아빠 없이 커가야 할 아이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아이가 적어도 성인이 될 때까지는 보살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범석의 아내에게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조인담인데요, 항소도 진행하시죠.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최대한 돕겠습니다.”
“주변에선 다 안 될 거라고 하는데, 방법이 있나요?”
지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범석의 아내는 “변호사들이 항소심에서도 승소 가능성은 1%라는 이야기만 했다”고 걱정했다. 그녀는 어떤 방법을 찾아야 할지 난감해했다.
전화를 끊은 인담은 직접 2심을 맡을 변호사를 찾아가 항소심을 준비했다. 범석의 아내와 같이 변호사를 만나며 재판 대응 논리도 짰다. 그녀가 지친 기색을 보이면 인담은 그녀를 다그치며 더 강하게 설득했다.
“어머니, 이건 범석 대원과 남은 아이를 위한 일이에요. 어머니께서 희망을 갖지 않으시면 저는 어떻게 할까요? 그냥 모른 척할까요?
범석의 아내는 계속된 인담의 설득에 조금씩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인담은 공무상 재해임을 입증할 전문가도 찾아나섰다. 화재 현장에서 발생한 유독 가스가 소방관의 암 발병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수소문 끝에 하버드대 의대 교수까지 연락이 닿아 자문서를 받았다.
‘화재 현장의 유독 가스가 암 발병의 원인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2년 뒤 항소심 재판부는 인담이 전문가들에게서 받아온 자문서를 인용했다. 승소였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
그때부터 인담은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시작했다. 유가족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고 걱정됐다. 처음에는 무작정 그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인담 주임이라고 합니다. 요새 힘든 건 없으시고요?”
“네?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반응은 생각보다 냉담했다. 유가족들은 낯설고 불편하다는 기색을 내비치기도 했다. 인담으로선 친절하게 말을 건넸다고 생각했지만 동정으로 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인담은 작은 구실이라도 만들어 계속 전화를 걸었다. 꾸준하게 안부를 묻는 인담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사람도 생겼다. 대부분 사는 게 힘들다는 이야기였다.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다고, 그래도 지금 삶에 만족한다고 말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우리 아이만 왜 아빠가 없을까.’ ‘왜 나만 가족을 잃고 이렇게 힘들게 사는 걸까.’
남겨진 가족들은 평범한 가정과 비교하며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꼈다. 인담이 유가족 수십 명과 주기적으로 통화를 하며 내린 결론이었다.
그렇다고 가족들에게 도움이 될 뾰족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막연히 같은 지역에 있는 유가족들을 만나게 하는 프로그램을 생각하다 포기했다. 정해진 업무 절차나 예산이 없었다. 인담의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졌다.
온종일 전화를 돌리던 인담을 한 기업이 찾았다. 순직자 자녀에게 심리 상담 비용을 지원하고 싶다고 했다. 인담의 머릿속에 작은 생각 하나가 스쳤다. 순직 소방관 가족의 자녀와 아내, 남편을 대상으로 한 캠프를 열면 어떨지 역제안했다. 그들이 모이면 대화와 치유의 물꼬가 자연스레 트일 것 같았다.
인담이 기획한 캠프는 미국의 순직 소방·경찰관 지원재단이 20년 전부터 하고 있는 사업과 비슷했다. 미국에선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캠프를 1년에 10번 이상 연다. 순직자와의 관계, 자녀 여부, 자녀 연령대 등을 구분해 개최하는 행사도 있었다. 같은 유가족이어도 각자의 처지에 따라 상황이 다를 수 있어서다. 다만 인담은 이런 케이스까진 알지 못했다.
가족들의 반응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냉랭했다.
“평일에 직장을 다니는데 어떻게 가겠어요.”
“직장이 어딘데요? 제가 직접 전화하고 협조 요청 공문 보낼 테니 한번 와 보세요.”
“애들을 집에서 돌보는 것만 해도 힘든데, 다 데리고 거길 무슨 수로 가요.”
첫 시도는 실패였다. 그냥 그만둘까도 생각했다. 비슷한 사연을 가진 소방관 가족을 모이게 하면 변화가 생길 거라 믿었던 인담도 흔들렸다. 그러나 포기하기엔 너무 늦었다. 이미 상부에 보고를 올리고 후원 기업도 설득해 놨다. 인담은 2번, 3번씩 유가족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숙도 그의 끈질긴 전화를 받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괜찮은 줄 알았다
승민이 떠난 지 7개월이 지나고 1월에 태어난 소윤의 첫돌이 찾아왔다. 소윤의 백일 때 현숙과 승민은 따로 사진을 찍지 않았다. 그 대신 첫돌이 오면 사진관에서 예쁘게 차려입고 가족사진을 찍자고 약속했다.
‘그때 좀 찍어 놓을걸. 가족사진 하나 없네.’
밀려오는 후회에 현숙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현숙은 아빠 없는 아이의 돌잔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돌잔치에서 웃을 자신도 없었다. 그렇다고 소윤을 돌잔치도 못 해본 아이로 키우긴 싫었다. 무작정 태백의 유명한 식당부터 예약했다. 친정 식구와 친한 친구들을 부르고 남편이 근무했던 소방서에도 연락했다.
그녀의 예상보다 많은 이들이 돌잔치를 찾아 축하했다. 눈을 깜빡이던 소윤이 판사봉을 집어 들었다. 모녀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승민과 약속했던 가족사진은 친정 가족들과 찍었다. 현숙의 오빠, 남동생의 아이들을 모두 불러 함께 사진을 찍었다. 현숙은 그렇게라도 아빠의 빈자리를 채우고 싶었다.
곧이어 설 연휴가 다가왔다. 모든 식구가 모였는데 승민만 없었다. 침묵이 이어지던 중 시어머니가 입을 뗐다.
“이제부터 명절 때 차례는 안 지낸다. 울상 하고 있지 말고 산 사람은 어디 여행이라도 다니면서 편히, 즐겁게 지내자.”
그때부터 현숙은 연휴나 명절마다 식구들과 여행을 다녔다. 태백을 떠나 슬픈 생각은 잊고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시댁 식구들과 함께 여행을 다니며 소윤에게 추억을 만들어주려는 마음도 컸다. 승민을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이 아렸지만 현숙은 그 마음을 애써 외면했다. 그저 이만하면 소윤과 잘 살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자신을 다독였다.
다시 겨울이 왔다. 현숙은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검진을 받으러 왔다가 남동생 부부와 가까운 대형 쇼핑몰을 찾았다. 기분 전환을 할 생각이었다. 쇼핑몰에 들어서던 현숙의 안색이 갑자기 새파래졌다.
‘어? 내 몸이 왜 이러지?’
현숙은 몸이 자꾸만 뒤로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러다 거꾸로 넘어질 것만 같았다. 현숙이 옆에서 걷고 있던 남동생의 팔을 꽉 붙잡았다.
“허공에 떠 있는 기분이야. 나 못 걷겠어.”
남동생이 119에 다급히 전화했다.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구급대원들이 도착했다. 현숙은 그들의 부축을 받으며 근처 병원으로 갔다. 응급처치를 받고 집으로 돌아오니 깜깜한 새벽이었다. 소윤은 시어머니 집에서 잠들어 있었다.
“많이 늦었죠? 죄송해요. 어지럼증 때문에 응급실 다녀오느라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시어머니는 걱정 어린 눈빛으로 “꼭 큰 병원에 가보라”고 당부했다. 현숙은 동해에 있는 병원으로 출발했다. 태백에서 동해, 그녀가 수도 없이 다닌 길이었지만 이날만큼은 이상하리만치 낯설었다. 그래도 직접 운전대를 잡아야 했다. 뒷자리에는 친정 엄마와 소윤이 탔다. 태백 시내를 벗어나 국도 38호선에 들어서 터널로 진입했다.
‘어…? 내가 왜 이러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 터널 안으로 들어갈수록 숨이 막혀 왔다. 도로 끝에 빛이 보였지만 터널을 벗어나자마자 또 다른 터널이 나왔다. 끝도 없는 어둠 속으로 향해 달리는 기분이 들었다. 10개가 넘는 터널을 지나야 했다. 목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동해에 거의 다 와 갈 때였다. 마지막 터널인 것 같았다. ‘이것만 지나면 되는데… 이것만….’ 끼익―. 그녀가 브레이크를 세게 밟았다. 차가 덜컹하며 앞으로 쏠렸다.
“엄마, 나 이 터널로 들어가면 죽을 것 같아. 더는 못 가겠어.”
현숙은 양손으로 핸들을 꼭 쥔 채 떨고 있었다. 멀리서 119 구급차 소리가 들렸다. 구조대원들이 그녀를 구급차에 태웠다.
“엄마아, 엄마아.”
정신이 아득해지는 상황에서 소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현숙은 눈을 꼭 감았다. 진단서에 적힌 병명은 공황장애. 의사는 “극심한 스트레스가 원인으로 보인다”고 했다.
●곪은 눈물이 덧났다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공황장애 치료를 위해 입원했던 현숙은 집으로 돌아왔다. 식탁 앞에 앉아 소윤에게 줄 꼬마김밥을 말았다. 노란색 계란 지단과 초록색 시금치, 주황색 볶음 당근이 놓였다. 여러 색의 재료가 현숙의 눈에는 모두 회색빛으로 보였다. 눈앞에서 놀고 있는 소윤마저 색이 없었다. 김밥을 자르던 현숙은 소윤이 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숙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TV로 ‘뽀로로’를 틀어주고선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이와 둘만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승민의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식을 들은 시어머니가 달려왔다. 시어머니가 안방에서 떨고 있는 현숙의 손을 꼭 잡았다.
“니는 아직 멀었다. 아직 멀었어. 한참 더 울어야 해.”
중얼거리듯 외는 소리에 현숙은 눈물이 핑 돌았다. 현숙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더 울어라. 그렇게 해야 니가 산다. 그래야 니가 살아.”
2년 가까이 곪았던 눈물이 한 번에 흘러내렸다. 현숙은 시어머니의 손을 잡고 울었다. 소윤은 거실에서 할머니의 손을 꼭 붙잡고 눈물 흘리는 엄마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숙은 친구 오정미, 김진영과 동네 카페에서 만났다. 자식들 키우는 게 쉽지 않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웃음 짓던 현숙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 사실 동해 가려고 운전하다 터널 앞에서 공황이 왔었어. 구급차에 처음 실려 가봤잖아. 병원에 일주일 정도 입원했다가 퇴원했어.”
정미와 진영의 눈이 마주쳤다. 천천히 할 말을 정리한 정미가 입을 뗐다.
“그래, 병원에 가 봐야지. 주기적으로 다녀 봐.”
정미는 섣불리 현숙을 위로하지 못했다. 진영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바라보는 진영은 심란해진 마음으로 생각했다.
‘밝고 꿋꿋하게 지내서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다 속에서 곪는 줄도 모르고… 왜 네 감정을 숨기고 산 거야….’
●확신할 수 없는 모임
“심리 상담 프로그램도 할 거고요. 다른 소방 가족들도 오기로 했습니다. 일단 한번 오세요.”
인담이 또 현숙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숙은 뭐라 대꾸를 하지 않았다. 답을 듣지 못한 인담과 대답을 보류한 현숙 모두 망설였다. 현숙은 캠프에 가서 다른 유가족을 만난다고 해서 자신의 아픈 마음이 치유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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