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내내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비가 왔지요? 이 비로 돌아가신 분들도 있다고 하니 참 안타깝습니다. 인류는 예로부터 잦은 홍수와 가뭄으로 인명과 재산피해가 생기는 걸 막고자 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벼농사를 중심으로 했던 농업 국가라 강우 현상과 비의 양 측정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 세종 때 장영실(생몰년 미상·사진)이 만든 측우기는 이런 노력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장영실의 아버지는 원나라 출신의 기술자였지만 어머니는 관청의 기생이라 장영실은 관청의 노비, 즉 천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분에 상관없이 인재를 추천하던 ‘도천법’을 통해 태종 때 궁중 기술자로 발탁이 됩니다. 이후 세종 대에 와서 종5품 상의원 별좌에 임용됩니다. 이때 ‘출신이 천하다’는 이유로 반대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 장영실의 업적은 대단합니다. 그는 두 차례나 사신으로 명나라를 방문해 당시 동양 최대의 천문대인 ‘관성대’를 보고 옵니다. 이 경험은 각종 천문기기 제작의 바탕이 됐습니다.
천체 관측기구인 혼천의, 혼천의를 간소화한 대간의와 소간의, 휴대용 해시계 현주일구와 천평일구, 시간과 함께 남북의 방위도 알려주는 해시계 앙부일구, 밤낮으로 시간을 잴 수 있는 일성정시의 등이 그것들입니다. 한편 장영실은 아라비아 서적까지 읽고 연구하면서 1434년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도 만들었습니다.
측우기(測雨器)는 장영실이 만든 또 하나의 뛰어난 발명품입니다. 측우기는 ‘그릇의 넓이’가 다르더라도 일정 시간 동안 빗물이 고이는 깊이는 일정하다는 점을 이용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비가 오고 난 뒤 땅에 비가 스며든 깊이를 재는 방식으로 강우량을 측정해 보고했습니다.
이런 원시적인 방법은 당시 조선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널리 사용됐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436년 전후 가뭄과 폭우로 흉년이 거듭되자 세종의 지시로 세자 이향과 장영실이 함께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1441년 높이 41.2cm, 직경 16.5cm 크기의 원통형 쇠그릇을 만들어냈습니다. 세계 최초의 측우기입니다.
측우기는 1442년(세종 24년)부터 규격을 통일해 20세기 초 일제 통감부에 의해 근대적인 기상관측이 시작될 때까지, 조선 왕조의 공식적인 관측기구로 사용됩니다. 강우량을 재는 과학적인 방법이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을 때 조선이 국가 차원에서 시작했다는 점은 의의가 큽니다.
장영실은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무려 종3품 대호군까지 오릅니다. 하지만 그는 1442년 임금이 타는 가마를 부실하게 만들었다는 죄명으로 파직되고 그 이후로는 행적도 죽음도 알려지지 않고 역사에서 아예 지워집니다. 어쩌면 이는 한 개인이 갖고 있던 능력을 끝까지 인정하기 어려웠던, 당시 신분제 사회가 가지는 한계였는지도 모릅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