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가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에 2억1650만 달러(약 2900억 원)를 배상해야 한다는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의 결정이 나왔다. 론스타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6조 원대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을 제기한 지 10년 만이다. 금융권과 법조계에선 초대형 분쟁 리스크에서 한국 정부가 비교적 선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31일 법무부에 따르면 ICSID의 론스타 사건 중재판정부는 이날 오전 9시경 한국 정부가 론스타에 약 2900억 원을 배상하라는 내용이 담긴 판정문을 보냈다. 론스타 측이 청구한 배상액 46억7950만 달러(약 6조3000억 원) 중 4.6% 가량이다. ISD는 해외 투자자가 상대국의 법령이나 정책 때문에 손해를 입었을 경우 국제 중재를 통해 손해배상을 받도록 하는 제도다.
하지만 한국 정부와 론스타 측 모두 취소 신청 등 불복 절차를 검토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 정부의 판정승이라는 관측이 나오지만 전부 승소가 아닌 만큼 한국 정부도 취소 신청을 검토하고 있다. 한 국제중재 전문 변호사는 “위원회가 취소 판정을 내리면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하는 배상 책임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정부 입장에서는 취소 신청을 안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론스타는 2003년 당시 부실 우려가 불거진 외환은행 지분 51.02%를 1조3834억 원에 사들였고, 이후 여러 차례 외환은행 매각을 시도했다. 2007년 9월 HSBC와 5조9000억 원대의 외환은행 지분 매매 계약을 체결했지만 이듬해 9월 HSBC가 인수 포기를 선언하면서 불발됐다. 결국 2012년 하나금융지주에 외환은행을 매각하면서 매각 및 배당 이익 약 4조7000억 원을 챙겼다. 하지만 론스타는 같은 해 11월 “한국 정부가 매각 승인을 지연해 손해를 봤다”며 46억7950만 달러(약 6조3000억 원) 규모의 ISD를 제기했다.
ICSID는 2013년 중재판정부를 구성하고 2016년 6월까지 심리를 진행했지만 좀처럼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2020년 3월에는 의장중재인이 사임하면서 다시 결정이 미뤄졌다. 같은 해 11월 론스타는 당초 청구 금액의 5분의 1수준인 8억7000만 달러(1조1710억 원)를 배상하라는 협상안을 제시했지만 한국 정부가 이를 거절한 것으로 전해졌다.
론스타가 제기한 문제는 크게 3가지였다. 먼저 2007년 HSBC와 체결한 매매 계약이 정부가 승인을 미루면서 파기됐고 결과적으로 2012년 하나금융지주에 3조9157억 원에 팔게 되면서 손해를 봤다고 주장했다. 또 하나금융과의 협상에서 정부가 매각 가격 인하를 압박했고, 부당한 과세도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중재판정부가 이 주장을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배상금액이 대폭 줄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일정 부분 책임론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거액의 국고 손실을 피하면서 론스타 매각 과정에 관여한 현 정부 핵심 인사들도 한시름 덜게 됐다.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은 외환은행이 하나금융에 매각될 당시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이었다. 당시 금융위원회에선 추경호 경제부총리가 부위원장, 김주현 현 금융위원장이 사무처장으로 재직했다. HSBC와의 매각 협상이 진행될 때 이창용 현 한국은행 총재는 금융위 부위원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양측이 이번 판정에 불복할 경우 120일 안에 취소 신청을 해야 한다. ICSID가 취소 신청을 접수하면 취소위원회가 꾸려져 취소 여부를 결정한다. 결정이 날 때까지 집행은 유예된다. 중재판정부의 판단에 대해 전부 또는 일부 취소 결정이 나올 경우 배상액이 달라질 수 있다. 취소 사유가 없어 기각될 경우 판정이 확정된다. 다만 전부 또는 일부 취소 결정에 불복할 경우 다시 중재 판정을 청구할 수 있다. 한 국제법 전문가는 “취소위원회의 취소 여부 결정에만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2년 가량 소요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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