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돈도 없는데 반지하에서 계속 살아야지 어떡해요. 여기 보증금(2000만 원)으로 갈 곳이 없는데….”
유순애 씨(72)는 31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반지하 집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이같이 말했다. 최근 수도권에 기록적 폭우가 내렸을 때 침수됐던 유 씨의 집은 당시 걷어냈던 장판도 깔지 못한 상태였다. 콘크리트 바닥에 비닐을 깔고 생활하는데, 바닥에선 아직도 물이 배어난다고 했다. 유 씨는 폭우 당시 맞은편 빌라에서 발달장애인 등 일가족 3명이 숨진 것에 충격을 받고 지상층 이사를 알아보다가 그냥 눌러앉기로 했다. 유 씨는 “지상으로 가려니 보증금이 3000만 원 더 필요하더라. 다시 침수될 것 같아 두렵지만 방법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 다시 반지하로 돌아온 저소득층
지난달 30일과 31일 동아일보 기자가 반지하 집이 많은 서울 관악·동작·영등포구를 둘러본 결과 폭우 피해를 입고 지상층으로 이사하려던 반지하 주민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보증금과 월세를 감당하기 어려워 대부분 반지하를 떠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 동작구 상도동의 반지하에 사는 김모 씨(69) 역시 침수 피해를 겪고 부동산중개업소 10곳 이상을 돌아다녔지만 가장 싼 지상층도 보증금과 월세가 지금의 2배 이상이었다고 했다. 기초생활수급자인 김 씨는 “방에는 습기가 여전한데 갈 곳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관악구 신림동의 한 중개업소에 따르면 폭우 이후 최근 3주 동안 반지하 거주 30여 가구가 지상으로 이사하고 싶다며 찾아왔지만 실제로 반지하를 탈출한 건 1가구뿐이었다. 공인중개사 김모 씨(58)는 “한 가구는 경기도의 지상층으로 이사하기로 했는데, 나머지는 자금 사정 때문에 지상으로 올라오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서울시는 지난달 15일 반지하 주민이 지상층으로 이주하면 매달 월세 20만 원을 2년간 지원하겠다고 밝혔지만 아직 지급이 시작되지 않았다. 국토교통부 역시 지상층 이주 시 보증금을 최대 5000만 원까지 무이자로 빌려주겠다고 했지만 2023년 예산에 포함돼 국회를 통과해도 내년에나 지원이 가능하다.
○ 반지하 떠나려고 생계용 차량까지 팔아
당장 지원을 받지 못하다 보니 생업에 필요한 차량까지 팔아 지상층으로 옮긴 반지하 주민도 있었다.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 사는 공모 씨(50)는 폭우 당시 거동이 불편한 노모와 함께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다. 이후 일주일 동안 날마다 중개업소를 돌아봤지만 기존 보증금 1000만 원으로는 이사할 곳을 찾지 못했다. 막노동과 용달 일을 병행하는 공 씨는 결국 용달용 트럭을 팔고 저축했던 돈을 합쳐 보증금 3000만 원인 지상층 집을 구했다. 5일 입주를 앞둔 공 씨는 “이제 침수 피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면서도 “월세 부담이 커져 당장 먹고살기가 빡빡할 것”이라고 했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장은 “정부와 지자체가 거주 취약계층을 위한 지원을 서둘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당장 반지하를 벗어날 수 없는 주민들을 위해 차수막이나 배수구 설치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지상층 이주를 돕는 월 20만 원 바우처의 경우 지급 방법을 조율하고 있다. 가능한 한 조속히 지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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