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인생 2막]1세대 정치평론가 유창선의 두 번째 삶 이야기
59세에 뇌종양 수술로 죽음의 문턱까지, 8개월 투병과 재활 거쳐 다시 일상으로
“예순 넘어도 설레고 꿈꾸는 삶 발견했습니다.”
“석양 속 한강변 달리며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내가 행복해야 남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
한국의 1세대 정치평론가로 꼽히는 유창선 박사(62)는 요즘 ‘두 번째 삶’이란 표현을 많이 쓴다. 3년 전 느닷없이 찾아온 뇌종양 수술로 죽음의 문턱을 밟았고, 8개월 사투 끝에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뒤 삶의 모든 게 바뀌었다. 지난달 29일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 나이 예순, 걸음마부터 다시 시작하다
2019년 뇌 자기공명영상(MRI) 검사에서 연수(숨골) 부위에 꽤 오래된 종양이 발견됐다. 연수는 생명유지에 중요한 반사중추와 뇌의 신경세포들이 몰린 부위다. 의사는 종양의 위치가 나쁘다며 ‘(종양 자체는) 양성이지만 악성’이라 했다. 그냥 둔다면 어느날 길거리에서 돌연사할 가능성이 크지만, 워낙 어려운 부위라 수술이 가능한지조차 확답하지 못했다.
결국 10시간에 걸친 대수술로 종양은 깨끗이 제거됐지만 워낙 중요한 신경들을 다 건드린 상태. 엄청난 후유증이 남았다. 혈압조절이 안 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기만 해도 의식을 잃었고 혀가 마비돼 말을 할 수 없었다. 식도 괄약근이 열리지 않아 8개월 동안 튜브로 경관식을 했다. 삼키지 못한 타액이 폐로 들어가 폐렴만 세 번 앓았다.
그의 얘기를 듣다보면 사람이 자기 발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를 실감하게 된다.
“악전고투 끝에 조금씩 회복돼 스스로 걸어서 화장실에 가고 세면대에서 세수를 할 수 있게 된 날, 인간으로서 당당함을 느꼈다. 걷는 것, 먹는 것, 말하는 것. 무엇하나 당연하게 되는 건 없었다. 그게 가능하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감사한 일인지.”
입원할 때는 열흘 정도면 퇴원할 줄 알았지만, 8개월(대학병원 2개월, 재활병원 6개월) 뒤에야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걷는 것부터 다시 시작하는 삶, 그에게 예순살은 그렇게 찾아왔다.
● 행복하고 싶은 본성에 정직하게 살자
그는 ‘살아있음을 확인하려고’ 수술 이틀 뒤부터 중환자실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에 글을 썼다. 두 달 뒤에는 시사주간지에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써낸 책이 퇴원 전 세상에 나온 ‘나를 위해 살기로 했다(사우)’이다. 최근에는 ‘나이 든다는 것은 생각만큼 슬프지 않다’는 부제가 붙은 인생에세이 ‘나를 찾는 시간’(새빛)을 펴냈다.
-‘나를 찾는다’는 표현의 의미는.
“‘행복하고 싶은’ 내 본성 앞에 정직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겁니다. 수술 뒤 만신창이 몸을 안고 투병과 재활의 시간을 거쳤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오히려 긍정의 정서가 지배하더군요. 가장 힘이 됐던 것은 나를 살리려고 애쓰던 가족이었습니다. 최후에 돌아갈 곳은 가족이구나. 내 인생 마지막은 가족과 함께 사랑하며 늙어가고 가족 안에서 죽어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까지 남은 시간 어떻게 좋은 사람으로 나이 들어갈 것인지 모색해야겠다고 말이죠.”
-그간 자신의 행복은 뒷전에 두고 살아온 건가요.
“운동권 문화 중에 그런 게 있었어요. 세상이 불행해 보이는데 나만 행복해선 안 될 것 같은 중압감을 젊은 시절부터 안고 살았지요. 나이 들어서도 나는 솔직히 행복한데 그렇다는 표정을 지어서는 안 될 것 같은 허위의식이랄까, 엄숙주의가 있었죠. 하지만 이제는 페이스북에도 행복하다는 표시를 합니다. ‘오늘 달리니까 너무 좋다’. ‘한강 풍경이 너무 예쁘다’…. 그게 가장 자연스럽고 내 본성에 정직하게 사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남을 행복하게 해줄 수도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세상의 중압감을 내려놓고 자신으로 돌아가니 자연스레 ‘동네아저씨’로 살아가게 됐다. 글쓰고 운동하며 가족과 교감하는 생활. 이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기쁘고 소중하다고 한다.
●진영이 갈린 세상에서 자유로운 외톨이의 길 선택
대학시절에는 학보사 기자였고 운동권 서적 출판으로 몇 개월 구치소 생활도 했다. 한때 현실정치에 발을 담그기도 했지만 스스로 정치인이 될 마음이 도무지 생기지 않았다. 그 즈음 우연히 방송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정치평론을 직업으로 하는 길로 나섰다. 제대로 평론을 하기 위해 모교인 연세대로 돌아가 박사학위를 받은 2001년, 마침 ‘노풍(盧風)’을 타고 시사프로그램 바람이 불었다. 이때부터 그는 정치평론가로서 전성기를 맞았는데, 종편이 없던 시절인데도 공중파에 하루 5~6개씩 출연했다고 한다. 다만 그는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 대해서도 비판할 것은 비판하면서 ‘노빠’들로부터 공격을 받아야 했다.
방송은 외풍에 약했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흔들렸다. 이명박 정권에서는 고정출연 프로그램들에서 줄줄이 하차 통보를 받았다. 방송이 출마자들의 대기소 같이 변해가는 것도 거북함을 넘어 모욕감을 안겨줬다. 권력이 5년을 못가는 세상에서 갈수록 명확히 진영이 갈라지자 그는 ‘내 힘으로 나를 지켜야 한다’며 스스로 고독의 길을 택했다. 어느 한 진영에 속하는 순간, 자기 진영에 대해 성찰할 수 없게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박근혜 정부 때는 3년간 동네 독서실에 들어가 인문학 공부를 하고 인문학 서적(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새빛)을 써내기도 했다.
●방송 대신 글로 쓰는 정치평론으로 전환
-건강은 어떠십니까.
“이제 일상생활은 대체로 정상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조심조심 하면서죠. 혀의 마비가 아직 조금 남았고 근육통도 심합니다. 식도를 보톡스 치료로 열고 삼키는 훈련을 해 먹을 수도 있게 됐어요. 먹고 싶은 것을 먹는 것, 그게 인간에게 정말 중요하다는 걸 절감합니다. 다만 전 아직 여러 불편이 남아있는데 수술해준 병원에서는 상대도 해주지 않아요(웃음). 이 정도로 회복된 것도 기적이라고들 하니까요. 아직 회복되지 않은 후유증은 제가 안고 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는 여전히 ‘정치평론가’다. 방송은 사실상 은퇴했지만 신문 잡지 등 8개 매체에 고정칼럼을 쓴다. 매일아침 늦어도 9시 이전에는 집 근처 카페에 착석해 공부와 글쓰기 작업을 한다고 한다. 페이스북을 통한 소통도 부지런히 하고 있다.
그는 인터뷰 중 “끝난 줄 알았는데 끝난 게 아니었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예컨대 먹고사는 문제도 궁금했는데, 원고료 수입이 꽤 된다고 자랑한다.
“제가 병원에 있을 때 큰아이가 취직했는데, 퇴원하면 매달 용돈을 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한 1년 주더니 슬그머니 그만두더군요. ‘어? 나름 버네?’라고 생각했는지…. 다행히도 아내가 들어놓은 연금저축이 있었고 곧 국민연금도 타게 됩니다. 살림 규모를 많이 줄이고 수입 지출 열심히 계산하면서 삽니다. 둘째딸도 최근 취직이 돼 두 아이 모두 앞가림은 하게 됐으니, 이제 저희 부부만 잘 살면 됩니다.”
그는 이번에 노후 경제적 대비의 중요성을 절감했다고 말한다.
“연금 하나 더 있고 없고가 큰 차이를 낳더군요. 사실 젊어서 월 10~20만원은 있으나 없으나 별 차이 없잖아요. 술값 쓰고 놀러가는 정도죠. 그런데 그게 차곡차곡 쌓이면 나이 들어 연금으로 돌아오는데, 연금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노후 삶의 질을 좌우합니다. 느닷없이 아파보니 보험에 대한 생각도 많이 달라졌어요. 제가 수술 1년 전쯤 실손보험 가입 상담을 했는데, 제 건강을 과신하며 안 들었거든요.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살면서 나에게 벌어지지 않을 것 같은 일에 대해서도 겸허하게 대비하는 자세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상상도 못해본, 석양 속 한강다리를 달리는 기분
3개월 전 우연히 트레일 런(달리기) 모임에 참석하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제가 몸을 치유하려고 엄청나게 걸었어요. 그걸 아는 지인이 같이 걷자며 모임에 불러줬는데, 10여 명이 처음엔 걷다가 ‘이제 뜁시다’하고 달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저로서는 혈압이 불규칙해 걷는 것도 조심하던 때거든요. 그런데 그분들 따라 조금 달려보니 기분이 너무 좋더라구요. 제가 달린 건 500m 정도지만 20대에서 60대까지, 그분들의 에너지가 제게 전해져오는 듯했어요. 그 뒤로 혼자서도 그 기분을 느끼기 위해 많이 달렸습니다. 사람 몸은 신기해서 뭐든 꾸준히 하면 조금씩 늡니다. 이제는 한번에 5km 정도는 달릴 수 있어요.”
요즘은 ‘달리기는 장비빨’이라며 여느 아마추어 러너들처럼 운동복이나 장비 쇼핑에 푹 빠져 있다고 한다.
“아침에 눈뜨면 늘 뉴스검색부터 했는데 요즘은 러닝복 쇼핑코너를 보고 있습니다. 그런 제 모습이 좋아요. 석양이 떨어지는 한강다리를 달리며 건너는 기분이란…. 이걸 모르고 죽었다면 억울했을 겁니다.”
●“나이 들어보니 이기고 지는 게 별 차이 없더라”
-갈수록 진영 대결의 세상이 되어갑니다. 분명 같은 나라에서 사는데 서로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많은 광경들을 겪고 나니 세상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게 되더군요. ‘내 젊은 시절 옳고 그름을 따지고 혁명을 논했지만 나이 들어보니 이기고 지는 게 큰 차이 없더라’는 도로시 파커의 시 ‘베테랑’의 구절이 딱 제 마음입니다. 나이 들어서까지 앞줄에 서서 매달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나의 행복, 나의 평화를 추구하는 삶을 사는 게 맞겠다는 결론에 이른 거죠,”
6월에는 현 정부에서 자리 제안을 받았지만 정중히 거절했다. 인생에서 가장 고즈넉하게 동네아저씨로 살아가는 시간을 흔들고 싶지 않았다. 정부 일을 한다는 것은 여기저기 쓰는 글에 구애받거나 비판할 자유를 잃는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나이 든다는 것은 생각만큼 슬프지 않다’
-수술이 없었다면 박사님의 60대는 어떻게 흘러갔을까요?
“여전히 방송 출연하고 글 쓰고 살았겠죠. 이 고즈넉한 세계의 느낌을 끝내 몰랐을 수도 있고요. 투병 이후 다른 인생을 맛본 지금, 그런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나옵니다. 투병 이후 몸은 불편해졌는데 삶의 질은 오히려 좋아졌어요. 이건 내면의 정서인데, 설렘같은 게 생겼습니다. 하고 싶은 것 하며 수시로 ‘참, 좋다’는 그런 느낌이 옵니다. 평생 느껴보지 못한 충만함이 문득문득 수시로 와요. ‘와, 참 좋구나’하고. 가령 3-4년 전만 해도 내가 달리기하는 모습은 상상도 못했죠. 내가 이러고 살고 있을 줄이야.” -책 표지에 붙은 ‘나이 든다는 것은 생각만큼 슬프지 않다’의 뜻은.
“전에는 60세를 넘긴 저에 대해 생각하기도 싫어했던 것같아요. 그냥 나이 60을 넘으면 인생을 정리하는 시간이라 생각했는데, 60이 넘어서도 앞날에 대한 기대 꿈 설렘을 가질 수 있다는 걸 체감하고 있어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더군요.” -60세 전후의 세대들은 고민도 생각도 많습니다. 동 세대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
“진부한 얘기 같기도 한데, 제2의 인생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흔히 은퇴하고 뒤로 물러서는 시기라고 하는데, 그 동안 해오던 일에서 은퇴한 것에 불과하죠. 내 인생은 그 순간부터 새로 시작됩니다. 은퇴 후 인생을 더 주도적으로 설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주 소소한 것들이라도 신명나게 기쁨을 맛보며 할 수 있는 뭔가를 찾아가는 것. 그게 필요한 나이가 우리 나이인 듯합니다. 그게 있냐 없냐에 따라 나이와 함께 늙어가느냐, 숫자는 늘어도 여전히 젊게 사느냐가 갈리지 않을까요.”
● 최후에 돌아갈 곳은 가족
인터뷰하며 느낀 것은 그의 가장 든든한 원군이자 수호천사는 가족, 그 중에서도 부인이라는 점이다.
고비고비마다 부인이 등장해 현명하고 올바른 길로 가도록 도왔다. 문병 왔던 친구들조차 ‘못 살 것’이라고 봤던 남편을 꼬박 8개월간 보살피며 살려냈고 퇴원 뒤에는 제주도에서 함께 한달살기를 하며 좋은 길을 걷는 즐거움을 전수해줬다.
이런 의견에 유 박사는 흔쾌히 말한다. “남자들은 혼자 놔두면 망했을 사람이 부인 덕에 잘사는 경우가 많아요. 저희 아이들도 ‘아빠는 엄마 잘 만나서 평안하게 사는 줄 알라’고 하죠.”
2시간 가까운 인터뷰가 끝난 뒤 ‘집에는 어떻게 돌아가시느냐’고 묻자 부인이 근처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혹시 모르니 대기 중이라는 것. 역시나 이 부부, 2인3각이었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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