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네임 세탁 등 수법 더 교묘해져
올 1월 피해 신고했지만 수사 부진
주범 ‘엘’ 텔레그램 탈퇴후 잠적
경찰, 전담팀 구성… 늑장수사 논란
경찰이 미성년자를 협박하고 성착취 영상물을 제작한 뒤 온라인 메신저 ‘텔레그램’에 유포한 혐의를 받는 용의자 ‘엘’(가칭)을 추적 중인 가운데 범죄에 가담한 인물이 적어도 8명이 더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중에는 공범으로 추정되는 인물도 있다.
경찰은 2019년 성착취 영상물을 제작해 유포했던 조주빈 일당의 ‘n번방’과 비슷한 수법으로 보고 전담팀까지 꾸려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 ‘엘’과 성착취물 유포…“3년 전보다 진화”
2일 동아일보 취재진이 주범 ‘엘’이 활동했던 텔레그램 방 중 하나를 분석한 결과, ‘엘’이 만든 성착취방에서 피해자를 협박하거나 성착취 영상 유포 등에 가담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최소 8명이었다. ‘엘’은 ‘n번방’ 사건을 취재했던 활동가 ‘불꽃’(전 추적단 불꽃)이 피해자 보호와 경찰 수사를 위해 임의로 붙인 이름이다.
이들 중에는 스스로 “엘과 같은 방에 있었다”고 밝힌 사람을 포함해 ‘엘’이 만든 영상을 다른 방에 올리거나, 또 다른 성착취방을 만들어 운영한 정황이 확인된 사람도 있었다. ‘엘’과 이들은 약 5000명의 이용자가 모인 텔레그램 방에서 성착취 피해자의 영상을 유포하는 방을 공유하기도 했다.
지난해 5월 ‘엘’은 텔레그램방에 스스로 성착취를 한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밝히면서도 “나는 절대 안 잡힌다. 잡힐 수가 없다. 내가 잡히면 다크웹이라는 데가 있으면 안 된다”고 자신했다. 다크웹은 인터넷주소(IP주소) 추적이 안 되는 음성적 웹 공간인데, ‘엘’은 추적이 불가능한 다크웹처럼 자신은 텔레그램을 통해 동영상을 유포하기 때문에 ‘경찰 수사를 피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박사’ ‘갓갓’ 등 자신의 활동명을 딴 고정 채팅방에서 성착취 영상을 유포했던 2019년 ‘n번방’과는 달리 ‘엘’은 대화명을 수시로 바꾸고 여러 채팅방을 옮겨 다녔다.
‘n번방’을 파헤쳐 공론화했던 불꽃의 원은지 에디터(대안미디어 ‘얼룩소’ 소속)는 1일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범죄 수법이 n번방 때보다 더 진화했다”며 “텔레그램 닉네임을 수차례 세탁하는 수법으로 추적을 피했다”고 설명했다.
● 텔레그램 탈퇴 뒤 잠적…경찰 ‘늑장 수사’ 논란
지금까지 확인된 피해 여성만 6명이고 유포된 영상물도 수백 개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엘’은 ‘추적단 불꽃’이나 ‘최은아’라는 이름을 사용해 피해 여성들을 안심시킨 뒤 “텔레그램에서 당신의 사진과 개인정보가 퍼지고 있다. 가해자와 사진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끌면 (가해자에게) 바이러스를 심겠다”고 속였다. 이런 방식으로 피해 여성과 무려 8시간 가까이 대화하면서 자신의 텔레그램으로 성착취 영상물을 전송받기도 했다.
경찰이 수사에 나서자 ‘엘’은 지난달 30일 오후 6시경 갑자기 텔레그램을 탈퇴하고 자취를 감췄다. 경찰은 수사팀을 확대해 ‘엘’의 행방을 쫓고 있지만 ‘늑장 수사’ 논란이 일고 있다.
불꽃에 따르면 피해 여성 중 한 명은 올 1월 경찰에 피해 신고를 했다. 유포 정황이 있는 디지털 성착취범죄는 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팀에서 맡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 사건의 경우 일선 경찰서 여성청소년계에서 수사를 했고 8개월이 지났지만 수사는 속도를 내지 못했다. 경찰 관계자는 “성착취물이 유포된 정황이 없어서 일반 수사팀에 배정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엘’ 등이 여러 공범과 오랜 기간 조직적으로 범행을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서울청 사이버범죄수사대는 전담수사팀을 구성하고 수사 인력을 6명에서 35명으로 증원하는 등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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